어떻게 이런 일이?
세계수(世界樹).
세계를 지탱하는 나무.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세계를 유지하는 근간이다.
현재 판게니아에 남아있는 세계수는 ‘태초의 숲’에 존재하는 엘프들의 나무뿐.
하지만 한 그루가 더 있었다.
이곳, 팔가의 성역에.
‘세계수의 존재가 창공의 대륙을 존재케 한다.’
그리고 대다수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세계수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말이다.
먼 옛날, 대륙이 하나였을 시절.
찬란했던 문명은 ‘멸망’의 출현으로 파멸했다.
그나마 대지의 여신 ‘레아’의 희생으로 완전한 파멸은 막을 수 있었지만, 절반의 땅은 심연에 가라앉았으며 나머지 절반의 땅은 하늘로 떠올랐다.
하늘에 떠오른 땅은 본래 먼지처럼 사라질 예정이었으나 레아의 쌍둥이 여신인 창공의 여신 ‘피나’가 지탱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지금의 판게니아가 완성된 이야기.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그 ‘지탱력’으로 사용된 게 바로 ‘세계수’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세계수가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조차도.
‘세계수는 마르고 있었다······.’
문제는 세계수가 죽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엘프들도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을 테지만,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실정.
해결방안이 없는 탓이다.
세계수를 관리하던 종족의 부재(不在)로 인해.
멸망에게 멸족당한 비운의 종족 중 하나.
‘드루이드.’
······ 드루이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멸망은 세계의 근원이 되는 종족들을 모조리 멸족시켰다.
탑을 관리하는 흉의 까마귀들을 없애 탑이 재기능을 못하도록 만든 것처럼.
그리하여 신들을 약화시켰듯이.
드루이드를 없애, 세계수가 모두 말라 죽도록 하였다.
오직 드루이드만이 유일하게 세계수의 씨를 뿌리고, 세계수를 관리할 수 있는 종족이었으니!
‘그런데······.’
대장로는 믿기지 않는 눈초리로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오랜세월 명예의 세계수를 돌보며 지켜보았다.
진정으로 명예로운 자가 자격을 확인하여 꽃이 개화한 적이 두 번 있기는 했지만······.
‘만개 하다니······!’
그것도 몇송이에 불과하다.
모든 잎이 만개(滿開)한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 갑자기?
라이가를 튕겨낸 직후에 만개했단 말인가.
하물며 말라가던 세계수가 기운을 되찾았다.
자신이 사력을 다해 돌보았음에도 찾지 못했던 기력이건만.
그도, 라이가도 아니라면 원인은 하나뿐이다.
-재미있는 아이를 데려왔구나.
저 아이.
라이가가 데려온 제자.
허나 기대하지 않았다.
전대 팔가의 주인이 데려왔던 라이가 역시 세계수의 인정을 받지 못했으므로.
라이가가 데려온 제자라는 녀석은 훨씬 더 볼품없으리라 여겼다.
“······.”
대장로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하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함께 이동했다.
그들 또한 은연중 느꼈기 때문이리라.
지금 이 변화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를.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확인해야만 했다.
“······ 받아보겠느냐, 자격의 시험을?”
대장로가 입을 열었다.
그조차도 살짝 긴장한 듯한 눈동자로.
툭-
짧게 고개를 끄덕인 라이가의 제자가 그 즉시 한 발자국을 떼었다.
그리고 세계수로 다가가 말했다.
허나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전혀 예상 외의 것이었다.
“내가 너의 주임인을 인정하거라, 세계수여.”
“······!”
“······!!!”
장로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대장로도 당황하긴 매한가지였다.
팔가의 주인, 후계자, 혹은 제자 따위의 말을 늘어놓을 줄 알았다.
한데, ‘너의 주인’이라니?
설마 세계수의 주인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말도 안 된다.’
대장로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세계수의 주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천하의 드루이드도 세계수의 주인임을 자처할 수는 없다.
만약 그런게 있다면 그건.
드루이드 중에서도 전설로 화자되는.
오직 단 한 존재만이 가능할 것이다.
‘······ 하이 드루이드.’
드루이드의 지배자.
모든 만물의, 자연의 주인이라고 칭해지는 그 이름만이 가능할 터.
그러나 하이 드루이드는 전설속에서만 등장한다.
그 이름을 계승한 자는 대장로도 본 적이 없었다.
세계가 멀쩡하던 시절에도.
‘하이 드루이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저 증명은 실패할 것이다.
라이가와 제자, 둘 다 세계수의 선택을 받지 못하리라.
한데,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빨간색.
세계수가 붉은빛을 내보냈다.
실패의 색깔이다.
하지만.
‘······ 튕겨내지 않았다. 명예 1만점을 넘겼다는 뜻이다.’
명예의 세계수는 명예를 수치화하여 확인한다.
빨간색은 1만점의 영역이다.
하지만 1만점에 도달하지 못한 자는 그 즉시 튕겨낸다.
라이가가 튕겨나간 이유 역시 1만점이 되지 않아서다.
허나 라이가의 제자는 튕겨나가지 않았다.
그 말인 즉슨, 1만점을 넘겼다는 의미.
화아아악!
‘주황색!’
··· 색이 바뀌었다.
주황색.
2만점의 영역에.
전설로 남겨진 왕들, 대영웅들의 명예가 보통 이 점수대에 속한다.
그들이 자격을 증명할 때 주황색에서 멈추는 경우가 극소수로 있었다.
아니면 그와 비슷할 정도로 찬란하며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있을 때, 주황색이 나타났다.
그러할진대.
화아아악!
‘······ 넘어섰다고?’
노란색.
3만의 영역대에 진입했다.
이는 황제도 될 수 있는 명예로운 색이다.
팔가의 주인이 될 자격도 이곳에 포함된다.
하지만, 3만의 명예를 쌓았다면 이미 그 이름을 모두 알고있는 자여야만 한다.
굳이 라이가의 제자가 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신이 직접 빚은 영혼의 소유자라는 것이냐?’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영혼만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거늘.
그야말로 신이 빚은 것처럼, 신의 선택을 받은 교황 같은 자의 영혼이라면 노란색도 가능하다.
“아······!”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
또 다시 빛의 색깔이 바뀌었다.
초록색!
······ 이는 여태껏 단 두 번 나타났던 색깔이다.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겼던 두 존재.
스스로 쌓아올린 명예로 정해진 결과를 바꾸었던 최강자들.
대장로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성스러운 둘 제외하고는 처음보는 색이었다.
무려 명예 4만의 영역.
만약 같은 규격의 영혼이라면, 도무지 상상도 안간다.
성스럽고 거룩한 신의 아이라면 가능할는지.
“······?!”
“······!!!”
허나.
그조차도 끝이 아니었다.
모두 경악하였으나, 목이메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 파란색.
명예점수 5만의 영역에 진입했으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색이었다.
대장로도, 다른 모든 장로들도.
명예의 세계수가 파란색의 빛을 내는 건 전혀 목도한 바가 없었다.
모두가 초록색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상 가는 존재는 앞으로 나타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만약 파란색의 빛을 내는 존재가 나타난다면······.
‘세계수의 주인.’
······ 처음 내뱉었던 말과 같이, 진정으로 세계수의 주인이라 칭할만하다.
허나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대장로는 아무런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라이가의 제자는 증명해 냈다.
팔가의 주인이 되었음을, 그 이상 가는 자격을 지녔음을.
세계수가 만개하고 기운을 차린 이유도 이제는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마치 선지자(先知者)와 같은······.’
먼 옛날.
굳이 증명을 받을 필요가 없었던 이들이 있었다.
종의 정점에 군림하며 태초를 이끌어나갔던 자들이 있었다.
하이 드루이드가 그러했다.
영원의 군주가 그러했고.
마혈왕이 그러했다.
하지만 이제는 사라지고, 잊혀진 절대자들이다.
그들이라면, 그들과 같은 선지자라면 파란색의 빛을 뿜어내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대··· 장··· 로님······!”
“나, 남색입니다!”
“이럴수가!”
······ 설마 다시금 색깔이 바뀌리라곤 상상조차 못했기에.
파란색을 넘어, 남색이 되었다.
두 번째 최초의 자격.
6만대의 영역에.
“아······.”
대장로는 가만히 감탄을 흘려보냈다.
순수한 감탄이다.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이미 저 남자는 자신이 상상했던 모든 영역을 넘어서 있었으니.
세계수가 처음으로 뿜어낸 남색의 빛.
평생 죄와는 먼 인생을 살아도 1,000점을 찍기 힘든게 명예라는 것이다.
만점은 거기서 더 나아가 한없이 명예로워야한다.
그럼, 6만점은 어떨까.
대체 뭘 해야 6만점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시련의 달성자.’
그 정도로 해야 가능할 것 같다.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영원을 사는 불멸자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혹시 그와 비슷한 영혼의 규격이라면?
선지자들마저 뛰어넘는 규격이라는 게 있을 수가 있나?
‘······ 모르겠다.’
적어도 대장로는 그 이상의 존재를 떠올릴 수 없었다.
오만한 ‘천상’의 주인들이라면 가능할까.
글쎄.
그들에게 명예가 있다면 멸망을 불러내지 않았을 터.
‘끝났군.’
미지의 영역에 도달한 인간.
경이로울 정도로 명예로운 남자.
끝이다.
더 볼 필요가 없다.
뒤가 더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보, 보라······.”
“보라색!”
“꺼어억······!”
······ 더 있었다.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던, 일곱 번째 영역.
그 순간이었다.
후웅! 후우우웅!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일곱가지 색깔이 동시에 세계수를 수놓았다.
그리고 무지개를 만들었다.
무지개를 본 몇몇 장로는 졸도해버렸다.
상식을 벗어난 신비로움에.
저것을, 어떠한 자격이라고 불러야할지 더는 감도 잡을 수가 없었다.
“······ 아름답군.”
그저.
··· 아름다웠다.
대장로는 전율했다.
너무나도 거대하고 광활한 대자연의 기운이었으므로.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기운의 활성.
쩌어억!
이변은 또 일어났다.
세계수의 중심부가 갈라지며.
처음보는 영역이 나타난 것이다.
《히든 던전, ‘잊힌 명예의 던전’이 출현했습니다.》
《해당 던전은 ‘파티 던전’입니다.》
《‘완성된 명예’를 지닌 자가 지정한 일곱 존재만이 함께 입장할 수 있습니다.》
《단, 명예롭지 않은 자는 입장할 수 없습니다.》
······ 세계수와 이어진 던전이라니?
그런게 있다는 말 역시 들어본 적이 없었다.
뿐만인가.
스윽!
스으으윽!
대장로의 머리 위로 뿔이 돋아났다.
사슴의 뿔과 같은 거대한 뿔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른 장로들도 마찬가지다.
비록 대장로의 크기 정도는 아니지만, 그들 역시 뿔이 돋았다.
“아아······.”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잘라내었던 뿔이······”
힘이 솟구친다.
그들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잊고 있던, 잊어야만 했던 본분이.
“되, 되찾았습니다!”
“드루이드의 힘을······!”
감격하며 눈물을 흘렸다.
격하게 울부짖었다.
서로를 껴안고, 마구 몸을 떨어댔다.
그럴 수밖에.
그들은 드루이드였기 때문이다.
멸망을 피해 세계수를 옮기고 숨었던 존재들이다.
‘멸망을 피하고자 스스로 잘라냈던 뿔이건만.’
멸망을 피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뿔을 잘라내고, 스스로가 드루이드임을 포기하는 것.
이후 명예를 불태우며 그저 살아갈 뿐이었다.
오로지 세계수를 지키고자 자신을 버렸다.
그런데.
불태웠던 명예가, 버렸던 자격이.
······ 거짓말처럼 회복되었다.
세계수가 온전히 복구되며 그들에게 다시금 원래의 자격을 돌려준 것이었다.
대장로.
먼 옛날, 그는 드루이드를 이끄는 대족장 중 한 명이었다.
멸망과 싸웠던, 하지만 멸망의 절망스러운 힘에 좌절하며 도망쳤던.
가장 불명예한 드루이드다.
그랬을진대.
······ 대장로는 천천히.
예를 다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푸른 드루이드의 대족장 ‘알비노’가 대자연의 주인, 하이 드루이드를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