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 해제
깨달음.
그것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받아들이며.
그리하여 더욱 깊어지는 과정이었다.
흔히 말하는 ‘벽을 부순다’라는 표현처럼.
그것은 벽 바깥에 존재했던 것을 알게 됨으로써 자신의 세상을 한층 더 넓힌다는 의미다.
깨달음은 갈구하는 자에게만, 열려있는 자에게만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당연히 스스로가 완전하다 믿고, 앞뒤가 막혀있다면, 깨달음은 찾아오지 않는다.
이것이 빌헬름이 정의한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다.
끊임없이 갈구하고 탐욕 하되 자신을 내려놓는 것!
‘······ 허.’
한데, 지금 내 앞에서 깨달음이 이루어지고 있다.
내게 가르침을 준다면서 도리어 스스로 가르침을 얻게 된 모습.
나는 모든 행위를 멈춘 채 라이가를 바라봤다.
검을 맞대며 눈을 감은 라이가.
마치 정지화면처럼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다만, 그의 전신에서 뭉실뭉실 떠오른 기운들이 잔잔하게 피어올라 세상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연결되는 중이다.
불현 듯 떠오른 깨달음을 붙잡는 중이었다.
그렇게 실과 같이 떠오른 기운의 줄기들이 마침내 나에게도 닿자.
-살고싶다······.
순간 라이가의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살고싶다고.
이대로 죽기 싫다고.
자신의 목소리를, 의지를, 그는 처음으로 바깥에 내었다.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인 척 하였으나 사실 살고 싶었던 게다.
부족함을 알게되고, 받아들임으로써 삶을 욕망하게 된 것이다.
오랜세월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를 때까지.
“······ 으음.”
반나절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묵묵히 그가 문을 여는 것을 기다렸다.
마력을 펼쳐 아무것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완전한 밤이 되어서야 그는 눈을 떴다.
동시에 나를 보는 두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날··· 기다려준 게냐?”
“축하드립니다.”
“······ 고맙구나.”
라이가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고맙다는 말.
그러한 말을 사용해본 게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진정으로 고마웠다.
깨달음은 찰나와 같아서 항상 쏜살같이 지나간다.
그 찰나에 잡지 않으면, 모두 훑지 않으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게 깨달음이다.
허나 그러한 집중력은 작은 움직임 하나, 숨소리 하나만으로도 깨져버린다.
특히 라이가와 같은 강자의 깨달음은 더욱 그러하다.
그것을 알고 함께 멈춘 채 기다려준 것이다.
상대에게 극도로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한 일이었다.
또한, 반나절이 넘는 시간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어준 것도 엄청난 인내심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해야할 일이었습니다.”
뿐만인가.
말은 또 어찌나 마음에 들게 하는지.
좀이 쑤시고 불편했을 게 뻔할 텐데도.
그래서일 것이다.
스승님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라이가가 ‘호감’이라는 걸 가져본 것은.
‘절대적인 경지인 심검지경에 다다랐다고 생각했으나, 나는 아직 합일(合一)조차 제대로 이르지 못했다.’
검사의 경지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그중 심검(心劍), 혹은 무검(無劍)의 경지라고 칭해지는 단계는 ‘절대자’가 되었음을 뜻하는 말이었다.
라이가는 생사의 경계에서 심검을 깨달았다.
하여 절대자가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했으나.
사실 정기신(精氣神)의 합일조차 이루지 못했음을 이제 알았다.
‘팔가의 비기, 오문개방의 문제점은 정기신의 합일이 원활하지 않은 것이다.’
······ 하여 제대로된 축기가 되지 않고, 오문을 열면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드디어 팔가의 문제점을 깨달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도 얼추 알 것 같다.
연결이다.
무한히 연결되는 것이다.
“······.”
라이가가 입을 작게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굳게 먹고 녀석에게 물었다.
“··· 생사경의 나머지 부분을, 내게 알려줄 수 있겠느냐?”
*
결(結).
맺고, 끊는 것.
라이가의 깨달음은 내게도 각성의 단초를 주었다.
그의 결이 내게 닿으며 알게된 것들이 있었다.
‘빌헬름은 맺는다. 라이가는 끊어낸다. 허나, 둘 다 있어야 비로소 결이 완성된다.’
빌헬름의 검술은 맺었다.
상대를 파악하고, 파장을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흘려냈다.
무한한 순환.
끝없이 맺고 또 맺는 게 빌헬름의 검술이다.
상대의 힘을 이용하며 더욱 크게 굴려 받아치는 묘리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 반동은 상상을 초월했다.
반면, 라이가는 전혀 달랐다.
결을 끊는다.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중심을 무너트린다.
정신과 기운, 신체의 균형을 박살낸다.
하지만 결을 끊어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빌헬름과는 완전히 다른, 정반대의 검술이라서 더욱 그런 듯싶었다.
‘결을 온전히 맺고, 끊을 줄 알게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검 숙련도 레벨 35.
그 이후의 세계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걸.
‘숙련도 레벨이 35에 도달하자 검강 대신 무장 해제라는 기술이 나타났지.’
숙련도 레벨 20에 이르면 검기를 사용할 수 있다.
30을 넘어서면 검강을 발현시키는 게 가능해진다.
하지만, 그 이후는 몰랐다.
35레벨에 도달하자 ‘무장 해제’라는 신기술이 발현될 줄은.
피해량이 100% 증가하는 것만으로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건만.
말인 즉슨, 그 이후의 세계가 더 있다는 뜻이다.
‘무장 해제······ 공격할 수 없는 것을 공격할 수 있게 해주는 힘.’
검기나 검강처럼 따로 피어나는 기운은 아니다.
허나, 능력만큼은 확실했다.
방어를 꿰뚫는 관통력과는 다르지만, 어떤 의미에선 관통력을 넘어서는 능력이었다.
절대적인 회피.
혹은 공격불가의 무언가를 공격할 수 있게 해주는 게 바로 ‘무장 해제’였으므로.
말 그대로 상대의 무장을 해제시킨다는 말이다.
예컨대.
“결(結)을 보아도 끊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파괴불가, 무적과도 같은 능력을 지닌 것들. 말 그대로 ‘회피’를 전제로한 것들이다. 실체가 없는 정령들도 여기에 포함되지.”
내가 그에게 생사경의 반쪽을 알려줘서일까.
라이가는 결(結)에 대한 공부를 내게 가르치고 있었다.
결을 베어내는 게 가능한 것과, 불가한 것.
하지만 듣다보니 궁금해졌다.
무장 해제의 경지에 다다르면, 저것들조차도 공격가능한 게 아닌지.
“파괴가 불가한 무적의 능력을 지닌 적은 그럼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궁금증을 입에 담자 라이가가 답했다.
“완전한 무적은 없다. 보통 파괴가 가능한, 혹은 무적을 푸는 조건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틈’이 존재한다면 ‘결’을 읽어 공격할 수 있다.”
용신이 그랬다.
단 하나의 약점만을 지닌 신격체들.
약점을 찾는다면 한없이 약해지지만, 그 약점을 찾아내는 일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데, 결을 읽으면 해결이 가능하다니?
“결을 읽으면 약점을 찾아내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까?”
“아아. 제대로 ‘결’을 읽을 줄만 안다면 그 틈을 파고드는 게 가능하다. 어렵게 약점을 찾아낼 필요가 없어지지.”
······ 문득 대원정에서 이세라의 약점을 찾고자 개고생을 한 게 떠올랐다.
라이가의 말마따나 결을 읽어내 틈을 파고들 수만 있다면, 굳이 그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허나 제대로 ‘결’을 읽을 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아니, 결을 읽고 완벽하게 베어낼 줄 아는 건 이 세상에서 라이가뿐일 것이다.
“만약 약점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런 적을 만난다면······ 도망가거라.”
라이가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더더욱 궁금해졌다.
‘무장 해제와 결을 베어내는 것. 두 묘리가 더해지면 진짜 가능할지도······.’
무적과 파괴 불가.
그 두 가지의 난제를 해결하는 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는 판게니아에서 여태껏 극복되지 않은 옵션이었으므로.
방어는 관통력으로 뚫으면 된다지만, 저 두 가지는 어떻게 뚫어야 되는지 제대로 논의된 바가 없었다.
판게니아를 넘어, 어지간한 신들조차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 미지의 탐험이라.’
아직 이 판게니아에 내가 극복하지 못한 게 남아있음에, 그야말로 미칠 듯이 심장이 뛰었다.
*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백을 안다. 결의 묘리를 벌써부터 깨우치고 있다.’
라이가는 현을 보며 끊임없이 감탄했다.
현은 마른 스펀지처럼 그의 가르침을 흡수하고 있었다.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내가 느리다는 생각이 들다니.’
라이가도 마찬가지로 현에게 배우고 있다.
허나, 현이 익히는 속도에 비해 자신의 배움이 느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을 맺는 것과, 생사경의 나머지 반절.
둘은 묘하게 관계가 있었다.
‘흡성의 능력이다. 상대와 이어지고, 상대의 것을 빼앗아오는 게 나머지 반쪽의 내용이니.’
팔가는 오로지 결을 끊는 것만 가르친다.
맺는 법에 대해선 가르치지 않는다.
배운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현.
녀석을 보며 자연히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 정말로 묘한 녀석이다.’
까도 까도 끝이 없는 양파 같다.
녀석의 끝을 보고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려면 오문을 극복해야만 한다.
깨달음을 말미암아 계속해서 나아가야만 했다.
시간이 부족할지언정, 포기하지 않는다.
이제는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생겼다.
라이가와 현.
둘은 서로를 보며 부족함을 채워갔다.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웠다.
그렇게 보름간 쉴 새 없이 이동한 끝에.
“이곳이 ‘명예의 성소’다.”
마침내 도착했다.
명예의 성소.
······ 팔가가 봉문된 장소에.
*
명예의 성소는 거대한 궁전으로 둘러싸여있었다.
이곳은 스스로의 자격을 증명해내어 인정받는 곳이었다.
자신이 명예롭다 생각하는 이들이 찾아오는 장소이기에, 수많은 이들로 붐볐다.
성소에서 자격을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명예’라 이름붙은 성배 앞에서 맹세하는 것이다.
자격을 묻는 것이다.
“나, ‘아무름’은 ‘왕’의 자격으로 그대 앞에 섰다. 내 자격을 인정해다오, 명예의 성배여!”
오직 실력으로 몇 개의 도시를 정복한 ‘아무름’이라는 자가 성배 앞에서 외치자.
화아아아악!
성배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빛은 아무름에게 닿지 않았다.
도리어.
쿵!
······ 아무름을 튕겨냈다.
그러자 아무름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감히······! 물건 따위가 나를 거부해!”
스릉!
분노에 차올라 검을 빼어든 순간.
촤악!
아무름의 목이 잘려나갔다.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른 채.
“신성한 성소에서 무기를 빼어들면 즉결사형입니다.”
그때, 성배를 지키던 남자가 말했다.
허나 검을 빼어드는 것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극에 이른 발도술이다.
이어 남자가 라이가를 바라보았다.
“돌아가십시오, 라이가님. 이곳은 당신에게 허락된 대지가 아닙니다. 하물며······.”
라이가임을 알고 있음에도 적대적으로 말하는 남자.
남자가 나를 슬쩍 바라보곤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무엇을 하러 왔는지 알고 있다는 기색이다.
냉담한 반응에 라이가가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 여덟 장로를 모두 불러오라. 다 부숴버리기 전에.”
“마지막 경고입니다. 저는 당신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 네놈 따위가?”
라이가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곤 어깨를 으쓱했다.
“오냐, 네놈을 죽이면 전부 나타나겠지. 보아하니 네놈이 내 다음 전인인 듯싶으니-”
“멈춰라!”
그때였다.
흰색의 무복을 입은,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 등장한 것은.
······ 마치 신선처럼, 구름을 탄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