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309화 (309/317)

깨달음

명예의 성소. 

이름 그대로 명예로운 자들이 의식을 치르는 곳이다. 

정식으로 ‘자격’을 발부받기 위해 반드시 들러야만 하는 장소. 

예컨대 수많은 영토를 거느린 자가 왕이 된다던가, 혹은 영웅이나 귀족으로 제대로 인정받기 위해선 명예의 성소에서 의식을 치를 필요가 있었다. 

특히 황제가 잠든 제국에선 명예의 성소에서 반드시 자격을 확인해야만 했다. 

얼마나 명예롭고, 얼마나 의로운가를. 

“‘명예’라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것은 없다.” 

다그닥, 다그닥. 

말을 탄 채 라이가가 말했다. 

현재 나는 라이가와 함께 제국을 벗어나는 중이다. 

허나 팔가의 수행치고는 무척이나 조촐하기 그지없는 행렬이었다. 

고작해야 그와 나, 그리고 말 두 마리가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한참이나 침묵으로 일관하던 라이가가 불현 듯 그렇게 말한 것이다. 

명예라는 건 부질없노라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은 태어난 환경에 따라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명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왕의 자식들, 귀족의 자식들은 평민보다 더 많은 ‘명예’를 처음부터 쥐고 있지.” 

라이가 치고는 상당히 의외의 발언이었다. 

팔가의 주인이라는, 제국 최상단의 직위를 지녔음에도 체계의 불공평함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판게니아에서 ‘불공평함’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위가 다르고, 명예가 다른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무엇보다 ‘명예’의 수치가 달랐다. 

일반적인 판게니아의 인간은 태어날 때 명예가 0이다. 

죄인의 자식은 마이너스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귀족의 자식, 왕가의 자식은 최소 100포인트 이상의 명예를 쥐고 태어난다. 

“부모로부터 쌓아올려진 ‘명예’가 자신의 아이에게 양도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보군.” 

살짝 실망했다는 눈빛으로 라이가가 나를 바라보았다. 

허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게 바로 판게니아가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이었으니. 

부모의 명예가, 부모의 죄가, 자신의 아이에게 이어지는 것. 

그래서 많은 이들이 착하게, 명예롭게 살려고 하는 것이다. 

판게니아라는 세계가 돌아가는 근간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어 라이가가 말했다. 

“명예란 스스로 쌓아올린 자격이다. 그저 태어났을 뿐일진대 누군가는 무거운 업을 지고 탄광에 들어가며, 누군가는 아무런 노력없이 하늘 위를 날아다니지. 이상하지 않느냐?” 

일종의 ‘수저론’이었다. 

흙수저와 금수저의 경계처럼. 

하지만 명예란 단순히 ‘돈’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판게니아에서 명예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그보다 극심했다.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상향(理想鄕)은 어디에도 없다. 

내 확답에 라이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진정 그리 생각하느냐?” 

“예. 우리가 명예롭게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 사람답게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아닙니까? 허나······.” 

“······.” 

“그와는 별개로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부여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회를 부여한다니?” 

“명예가 없는 출신이라 하여 실력이 있음에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보다 불명예한 일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 

라이가의 두 눈빛이 살짝 떨렸다. 

명예에 대한 정의.밑바닥 출신이라한들 실력이 있다면 기회를 주는 것이 진정한 명예라는 나의 말을 듣고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 그래, 그것이야말로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이지.” 

곧이어 라이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만족한 듯이 입가에 미소마저 띄우고 있었다. 

‘의외로군.’ 

역시 라이가는 일반적인 귀족들과 사상의 궤가 달랐다. 

고압적이고 출신을 당연히 따지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라이가가 따지는 것은 오로지 실력이다. 

실력과 노력이었다. 

‘단순히 약자를 멸시하는 게 아니라, 노력하지 않는 자를 싫어하는 것이었나.’ 

처한 상황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포기해버리는 부류를 혐오하는 것일 뿐이다. 

이 역시도 판게니아의 특권층과는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그들은 ‘노력’이라는 단어를 무척이나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이윽고 라이가가 입을 열었다. 

“또한, 명예는 ‘검’과 같다.” 

“······?” 

“갈고 닦으면 닦을수록 빛이 나며 날카로워지지. 녹이 슨 검일지라도 얼마나 열심히 가느냐에 따라 충분히 빛을내며 날카로워질 수 있다.” 

“그건 검이 아니라 다른 무기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검은 양쪽 날이 세워진 무기다. 단순히 갈고 닦기만 한다면 검은 균형을 잃는다. 양쪽을 모두 얼마나 잘 갈고 닦느냐에 따라 녹슨검도 명검이 될 수 있는 게다.” 

명예의 또 다른 이야기였다. 

검을 갈고 닦는 법. 

하지만 단순히 그러한 방법론을 이야기하고자 말을 꺼낸 것은 아닌 것이다. 

이윽고 라이가가 표정을 굳힌 채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너에게 검의 양쪽 날을 잘 갈고 닦는 법을 가르칠 것이다. 명예의 성소가,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실력이 있고, 재능이 있다면 기회를 주는 게 당연한 일이니.” 

너에겐 재능이 있다. 

라이가는 나를 향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미안해지는군.’ 

사신교의 간부로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 

나를 향한 라이가의 열정은 진심이었다. 

여태껏 몰랐던, 알 수 없었던 라이가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 기분. 

그래서 미안해졌다. 

나는 라이가에게 진심이 아니었으니까. 

라이가가 이런 인간일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었으니까. 

게다가. 

‘라이가는 나를 파악했다.’ 

아드리움의 현. 

아드리움 출신이라고 했지만, 그게 거짓임을 간파한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도리어 그럴만한 이유가 있노라고 믿는 듯싶었다. 

‘··· 나도 조금은 진심으로 대해야겠군.’ 

처음부터 거짓된 관계이나, 이제와서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의 불씨는 이제 곧 꺼진다. 

그의 두 눈은 조금씩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다만, 그렇기에 더욱 진심으로 대할 수는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가 바라는 모습으로 그의 원을 이루어줄 수는 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하는 상황. 

“······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지금은 그가 바라마지않는 ‘노력하는 천재’의 모습을 선보이기로 결심했다. 

그게 내가 라이가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일 테니. 

-명예가 없는 출신이라 하여 실력이 있음에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보다 불명예한 일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라이가는 작게 전율했다. 

단순히 재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현은 자신과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제국에는 자신과 같은 가치관을 지닌 자가 없었거늘. 

‘죽기전 하늘이 내게 내려준 선물인가······?’ 

현은 마치 선물과도 같았다. 

죽기 전, 하늘이 자신을 가엽게 여겨 내려준 선물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대답이 아니었음을 알았기에 훨씬 더 기꺼웠다. 

‘출신은 상관 없다.’ 

여신교의 성도 아드리움. 

그곳의 출신이라는 건, 거짓말이다. 

현은 그곳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기회를 노린 건 분명했다. 

아마도 출신 때문이리라. 

평민, 혹은 그보다 더 비루한 출신이었기에, 기회가 필요했을 것이다. 

아드리움에서 그 기회를 찾고 잡은 것뿐이었다. 

도리어 기특하지 않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기회를 눈앞에 두고서도 잡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반면 현은 아드리움으로 가서, 스스로 기회를 거머쥐었다. 

‘현과 관련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어째서이겠나. 

현은 이 세상에 남겨진 정보가 없다. 

가족도, 친구도, 그를 아는 자도 없었다. 

그의 정보력으로도 알아내지 못했다. 

말인 즉슨. 

‘아마도 노예 출신일 터.’ 

자신과 같은 노예의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노예의 인장은 없었지만, 라이가가 그러했듯 육체를 재생시켜 인장을 지워낼 방법은 많았다. 

그래서일까.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건. 

물론, 명예의 성소로 향해봤자 형편없는 명예의 소유자라며 타박만 당할 것이다. 

성소 자체가 거부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애초에 명예를 수치화시켜 자격을 부여하는 곳이었으니. 

당연히 팔가는 반대하겠으나, 라이가는 이야말로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다. 

팔가를 개선할, 그리하여 세상을 바꿀 첫 걸음. 

비록 자신은 실패했지만 현은 다를지도 모른다. 

아니, 달라야만 했다. 

“지금부터 나를 상대해보거라.” 

라이가는 명예의 성소로 향하며 틈틈이 현에게 가르침을 내리고 있었다. 

··· 대련의 방식으로. 

벌써 수차례나 이루어진 대련. 

한데, 라이가의 가르침을 현은 마치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아무도 따라오지 못했던 그의 검을. 

그의 검식을. 

검에 담긴 묘리와, 라이가가 행하고자 했던 검의 의지를 현은 무척이나 손쉽게 따라오고 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토록, 누군가를 가르치며 즐거웠던 기억은 없었다. 

챙-! 

검과 검을 맞대자 마찬가지로 명쾌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승님께서 나를 가르칠 때 이런 기분이었나.’ 

라이가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전대 팔가의 주인. 

스승님은 자신을 가르치며 항상 웃었다.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당시에는 자신이 구르는 모습을 재밌게 보고 있는 듯했으나, 이제와서 보니 아니라는 걸 알겠다. 

그저 즐거웠던 것이다. 

라이가를 가르치는 게. 

하지만 지금껏 라이가는 그런 기분을 맛본 적이 없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무척이나 귀찮고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어차피 아무도 따라오지 못했으니까. 

아무도, 그의 검에 공감하지 못했으니까. 

그가 보는 것을 똑같이 보는 자가 없었으니까. 

‘··· 결을 볼 줄 안다.’ 

만물에는 결(結)이 존재한다. 

라이가에겐 결이 보였다. 

어디를 찌르면 치명상이고, 어디를 베면 결의 균형이 깨어지는지 알았다. 

그리고 현 역시도 결을 볼 줄 아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녀석이 결을 보는 방식과 자신이 보는 방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라이가는 오로지 결을 베어내려고만 한다. 

하지만 현은 그 결의 순환을 이용할 줄 안다. 

다만, 그래서인지 결을 베어내는 방식엔 약하다. 

반대로 라이가도 결의 순환을 이용하는 방식에는 약했다. 

‘결의 순환. 존재의 파장을 받아들인다······.’ 

라이가는 자신에게 약했던 부분을 현을 가르치며 알게 되었다. 

이러한 방식도 있음을 깨달았다. 

단순히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상대 그 자체의 파장을 받아들인다는 것. 

만약 다른 자가 이러한 기술을 사용했다면 라이가는 본능적으로 거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르침의 즐거움을 가르쳐준 존재가, 현이 사용하는 묘리였기에 라이가에게 강력하게 부각되었다. 

라이가가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해본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던 탓이다. 

‘아······!’ 

······ 그 순간이었다. 

검을 맞대면 맞댈수록. 

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노력할 수록. 

조금씩 차오르던 무언가가 마침내 임계점에 도달했다. 

라이가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이내, 검을 맞댄 채 멈췄다. 

“······.” 

세상이 정지한 것만 같았다. 

눈을 감고, 숨소리마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만히. 

라이가는 깨달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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