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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308화 (308/317)

명예의 성소

또 다른 멸망. 

그리고 원시 천마! 

본질은 비슷하다. 

두 가지 클래스 모두 ‘악(惡)’과 ‘마(魔)’에 근간한다는 것. 

빛과 영광의 성향은 박현명에게, 반대의 성향이 모조리 란돌프에게 몰린 결과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스위칭한 것만으로도 이만한 위력이라니! 

절제하며 갈무리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 

··· 강하다. 

너무 강했다. 

마의 기운이. 

악의 형상이. 

가뜩이나 강력했던 어둠의 성향이 몰리고, 합쳐지며, 격을 넘어 초월하더니 비로소 완결무결해진 것이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멸망’은 ‘멸망’을 불러오는 자입니다.》 

《‘세계’를 선택해, ‘붕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세계를 붕괴시켜 ‘완전한 멸망’으로 거듭나십시오.》 

《하나의 세계를 붕괴시킬 때마다 ‘멸망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혹은 ‘신의 심볼’을 파괴할 때마다 ‘멸망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멸망 포인트’로 멸망의 힘을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의 세계를 파괴할 때마다 권속이 늘어납니다.》 

《첫번째 권속, ‘멸망의 까마귀’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 

······. 

또 다른 멸망에 대한 설명. 

세계를 파괴하고, 그 파괴한 세계에서 힘을 얻는 이기적인 클래스. 

단순 히든 클래스를 넘어서는 압도적인 내용이었다. 

그리고 신의 심볼은 아마도 신의 격을 상징하는 중요한 성유물, 혹은 ‘탑’과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일 테다. 

그것들을 파괴해 포인트를 얻고, 멸망의 본질을 강화시키다니. 

일전 판게니아를 멸망시킨 ‘멸망’ 역시 이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걸까? 

허나, 내가 판게니아나 지구를 멸망시킬 일은 없었다. 

만약 모조리 부숴버려야한다면 그것은 ‘천상’이 될 것이다. 

‘권속이라.’ 

게다가 사흉과 같은, 나로부터 파생한 첫 번째 권속까지. 

왜 하필 까마귀인가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었다. 

흉과 재의 신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진화했던 까마귀의 힘. 

그것의 최종진화 형태라고 봐도 될 것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글귀는 계속해서 떠올랐다. 

이번엔 원시천마에 관하여. 

《‘원시천마’는 최초로 천상에 오른 마귀입니다.》 

《하늘을 위협하고 세상을 오시했던, 하지만 너무 강력했던 탓에 천상이 직접 봉인한 이름입니다.》 

《이후의 모든 마귀는 원시천마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위대한 이름을 계승했고자 하였지만 ‘원시천마’의 격에는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천마신공’, 혹은 ‘흡성대법’등을 만들어 스스로를 천마라 부르며 ‘원시천마’의 기술을 흉내내었으나, 결코 원류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원시천마’는 가장 강력한 마귀.》 

《‘원시천마’는 모든 마귀를 잡아먹습니다.》 

《‘원시천마’의 고유 히든 스킬 ‘멸세천마’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 

······. 

내가 지니고 있던 천마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합쳐지며 ‘원시천마’로 완성됐다. 

원류의 천마. 

가장 강력했던 그 이름으로. 

새로이 얻은 두 이름은 강력하지 않은 게 없었다. 

도리어 너무나도 강력해서 탈이었다. 

지금의 나로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이었으니! 

《‘재의 장갑’을 사용합니다.》 

《‘박현명’으로 변신합니다.》 

재빨리 스위칭했다. 

가만히 란돌프로 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었다. 

하물며 이곳은 제국의 심장이다. 

발각되었다간 그대로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발각되지 않기가 힘들 수준으로 마력이 끓어넘치고 있었으므로. 

‘······ 레벨만 올린다고 능사가 아니군.’ 

그제야 깨달았다. 

성향을 분리하기 전의 란돌프는 혼돈 그 자체였다는 걸. 

그리고 내 레벨을 올린다고 완전한 균형이 맞춰지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빛의 힘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만 란돌프의 어둠을 제어할 수 있다. 

제어하지 못하면, 그저 변신하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멸망을 가속화할 터이다. 

칠대악마나 마왕이 친구하자며 달려들수도 있는 노릇이다. 

······ 상상만으로도 어지러웠다. 

이후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무슨 일이냐!” 

벌컥! 

다급히 문을 열며 라이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완전무장. 

그리고 긴장이 역력한 눈빛으로. 

“페르몬과 락투샤가 죽었다······?” 

다크엘프 로드에게 보고를 받은 흑왕이 눈가를 찌푸렸다. 

절대로 패배하지 않으리라 믿고서 보낸 최측근이다. 

한데, 바알과 파편은 회수하지도 못한 채 죽었다니. 

심지어 그 둘은 자신의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이 강화되어 있었건만. 

“누구에게 죽었지?” 

“락투샤는 페르몬에게, 페르몬은 빌헬름에게 죽었습니다.” 

“······.” 

동시에 흑왕이 입을 꾹 닫았다.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는 있으나, 다크엘프 로드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가 일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혜를 입은 자들 끼리는 서로 죽일 수 없다. 

흑왕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경우도 있기는 했다. 

“페르몬이 나의 은혜를 상실한 건가?” 

은혜를 상실하는 경우. 

하지만 페르몬은 은혜를 상실하면 그냥 멍청한 괴물이 될 따름이다. 

지능을 잃고 퇴화해버린다. 

당연히 락투샤를 죽일 수 없다. 

한데, 락투샤를 죽였다니. 대체 어떻게? 

“완전체로 진화했습니다.” 

다크엘프 로드가 답했다. 

하지만 그는 ‘은혜의 상실’이 정확히 어떤 경로로 이루어졌는지 말하지 않았다. 

흑왕의 천적이 등장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신비를 파괴하고, 은혜를 부숴버리는 그 존재에 관하여. 

다만, 완전체로 진화했다고 얼버무릴 따름이었다. 

흑왕의 얼굴에 새겨진 골이 더욱 깊어졌다. 

“그럼에도 빌헬름에게 죽었다?” 

완전체로 진화했다는 건 어찌되었든 흑왕이 설계한 최종형태로 만들어졌다는 뜻. 

절망의 세포가 극대화했다는 의미다. 

락투샤를 죽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완전체로 진화했음에도 빌헬름에게 패할 줄이야. 

‘빌헬름. 백왕의 송곳니 하나를 빼앗아간 놈이지.’ 

그 이름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백왕의 송곳니를 잘라낸 자라는 것 역시. 

허나, 놈은 죽지 않았던가? 

“페르몬과 락투샤의 시체를 가져왔습니다.” 

“잘했다.” 

시체를 분석해보면 보다 확실한 답이 나오리라. 

하지만 둘의 시체를 본 순간 흑왕은 인상을 찌푸렸다. 

락투샤의 시체는 짓뭉게져 있었다. 

반면 페르몬의 시체. 

검은 인간의 형태로 정제되어 완성된 페르몬. 

빌헬름에게 패했다는 녀석의 시체는, 너무나도 멀쩡했다. 

흑왕이 작게 중얼거렸다. 

“··· 일격에 죽었군.” 

너무나도 압도적인 실력차로 인해 일격에 패한 것이다. 

정확히 생명의 근원을 잘라내었다. 

아예 재생조차 못하도록. 

쯧. 

흑왕은 작게 혀를 찼다. 

‘개미의 한계겠지.’ 

그래봤자 개미다. 

락투샤도 그래봤자 오크이고. 

아무리 은혜를 베풀고 강하게 만들어도 종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둘의 시체로 말미암아 한 가지 실험을 해볼 수 있게 됐다. 

흑왕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태초의 숲’에서의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엘프 장로를 비롯한 다수의 ‘하이엘프’를 확보했습니다. 다만······.” 

“다만?” 

“예상치 못한 존재의 출현에 의해 여왕의 생포는 불가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존재라면?” 

“백왕입니다.” 

백왕? 

북부 크람델에 처박혀 있어야할 놈이 왜 난데없이 엘프의 거점인 ‘태초의 숲’에서 나타났단 말인가. 

허나, 백왕이 등장했다 하더라도 바뀔 건 없다. 

이빨 빠진 호랑이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대 다크엘프 로드가 마저 말했다. 

“백왕이 힘을 되찾은 듯합니다.” 

“송곳니를 되찾았다? 흠······.” 

흑왕이 턱을 쓸었다. 

송곳니를 되찾아 전성기의 힘을 수복했다면, 다크엘프들만으로는 버거울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여왕을 확보하지 못한건 아쉽지만, 하이엘프만으로도 충분하다. 

하물며 ‘장로’가 포함되어 있다면 금상첨화다. 

······ 그때였다. 

“······!!!” 

찰나, 흑왕의 두 눈가가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옮겨, 지평선 바깥을 바라보았다. 

어딘가에서. 

분명히 지금. 

어마어마한 ‘악’이 출현했다. 

순간 사고가 멈췄다. 

마치 멸망과도 같은. 

······ 세계를 멸망시켜버릴 것만 같은 악의 기세를 틀림없이 느낀 것이다. 

흑왕만이 아니다. 

“음?” 

교만의 악마. 

프리드릭 왕 역시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 탓이다. 

“‘멸망’······?” 

바로 멸망의 기운이. 

교만을 비롯한, 다른 악마들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 이르다. 

아직, 멸망이 나타날 때가 아니다. 

교만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갸웃했다. 

‘때가 멀었거늘.’ 

지금 멸망이 나타나는 건 말이 안 된다. 

멸망의 출현조건이 만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상이 멸망을 보내는 경우는 한 가지뿐이었다. 

문명이 발달하고 신들의 콧대가 높아졌을 때. 

가장 화려하게 번성했을 때, 문명레벨이 아득히 높아져 그리하여 천상에 닿고자 할 때, 멸망이 나타나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판게니아는 멀었다. 

이제 고작 투신 카라스와 용신 한 마리가 재생했을 따름이다. 

문명의 번성은커녕 한창 갈 길이 멀다는 의미다. 

그리고 만약 그러했다면 지금 교만이 하늘을 올려다본 것만으로도 수많은 신들이 등장했어야 함이다. 

하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 신들도, 문명의 레벨도 한참 수준미달인 바. 

‘사라졌다?’ 

또한, 멸망의 기세가 찰나와 같은 순간 사라져버렸다. 

뭐지? 

분명 착각은 아닐진대. 

“······.” 

그리고 그러한 의문을 느낀 건, 교만만이 아니었다. 

마왕(魔王). 

마계의 옥좌에 앉은 채, 빌헬름의 육신을 차지한 그가. 

무저갱과 같은 눈빛으로 가만히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잔뜩 긴장한 라이가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느껴지던, 진저리쳐지는 악의 기운이 돌연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착각일까? 

찰나와 같은 순간. 

곧장 사라졌으니, 착각이라 생각해도 무방할 터이다. 

게다가 그 장소에 있던건 ‘현’뿐이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 

라이가는 할 말을 잃었다. 

이 가공할 기운을 자신만 느낀 듯했다. 

제국, 그것도 황궁 내에서. 

그렇다면. 

‘진정 죽을 때가 된 건가······?’ 

······ 역시 착각일는지. 

죽을 때가 되어 감각이 이상해지기라도 한 듯했다. 

그도 그럴게, 아드리움의 현은 악과는 거리가 멀다. 

여신교의 성도. 

그곳은 여신의 결계로 인해 모든 ‘악’의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다. 

하물며 여신교 추기경의 아들인 아론이 열렬하게 따를 정도로 신앙이 깊다. 

그래. 착각이리라. 

착각이어야만 했다. 

내심 한숨을 쉰 라이가가, 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 준비하거라.” 

“어디로 가는 겁니까?” 

현의 물음에 라이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의 성소’로 가서 ‘팔가의 의식’을 치룰 것이다.” 

정식 제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반드시 치뤄야하는 의식. 

팔가의 가문이 거부한다 하더라도 강제로 진행할 심산이다. 

그리고 온전하게 넘겨줄 것이다. 

자신의 힘을, 역대 팔가를 이끈 자들의 의지를. 

비록 제국에 충성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황제에게 검을 겨누지만 않는다면. 

그러한 업까지 물려줄 생각은 이제 없으니까. 

그저, 자신과 달리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 

어두운 심연에서 벗어나 세계를 탐험하며 이름을 날리길. 

무신의 경지에 올라 팔가의 비원을 이루어주길 바랐다. 

그렇게 팔가의 이름이 건재함을 세상에 알리기만 해도 좋다. 

그것이 팔가를 만든 최초의 선인(仙人)이 의도한 것일 터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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