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의 전당
투신의 탑.
모두에게 절망을 선사했던 그곳의 시련이 종료됨과 동시에.
사람들은, 특히 플레이어들은 크게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며, 명예의 전당에······!”
“한꺼번에 대체 몇 개가 업데이트 된 거야?”
“내 눈이 잘못 된 건 아니지?”
메인퀘스트를 어떻게 해결하냐에 따라 점수를 책정하고 순위를 매기는 명예의 전당.
그곳이 큰 폭으로 요동친 탓이다.
그것도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동시다발적으로 메인퀘스트가 완료되며, 마찬가지로 여러 전당의 목록이 바뀌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던 이례적인 일.
갑작스럽게 몇 개의 목록이 ‘업데이트’된 건 처음이다.
하물며 그곳에 올라간 이름은 그들에게 보다 큰 충격을 선사했다.
“빌헬름이 왜 전당에있어?!”
······ 빌헬름이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메인퀘스트 1 - 생존’의 순위가 업데이트됩니다.》
<1위, 500점. 빌헬름>
<2위, 300점. 박현명>
<3위, 220점. 란돌프>
<4위, 210점. 이자벨라>
<5위, 205점. 최강남>
······.
500점.
감히 비교조차 불가할 정도의 압도적인 점수차이.
보고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의 점수였다.
허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빌헬름의 이름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등장했다.
《‘메인 퀘스트 2, 클래스 얻기’의 순위가 업데이트됩니다.》
<1위, 300점. 빌헬름>
<1위, 300점. 박현명>
<3위, 230점. 란돌프>
<4위, 198점. 그라시아>
<5위, 195점. 아스칸달>
<6위, 190점. 질렛>
······.
《‘메인 퀘스트 3, 탑 오르기’의 순위가 업데이트됩니다.》
<1위, 300점. 빌헬름>
<2위, 280점. 박현명>
<3위, 240점. 란돌프>
<4위, 219점. 그라시아>
<5위, 191점. 민트초코맛있어요>
<6위, 190점. 아스칸달>
······.
메인퀘스트 1, ‘생존’에서부터.
현존하는 모든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 것이다.
빌헬름이 겪었던 모든 업적들이 점수화하며 박제라도 된 듯이.
“이게 말이 돼?”
“그럼 빌헬름이 플레이어라는 말이야?”
모두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명예의 전당’은 플레이어의 특혜와도 같다.
오직 플레이어만 등록되며 서로가 자웅을 겨루는 곳이었다.
당연히 플레이어가 아닌 존재가 이름을 올린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빌헬름은 플레이어란 말인가?
허나 플레이어였다면 진즉에 전당에 이름이 올라갔을 일.
느닷없이 업데이트 되듯 추가된 이유가 분명히 있을 터.
그제야 사람들은 명확한 까닭을 알 수가 있었다.
“자세히 봐봐. 빌헬름만이 아니야.”
“······ 그러네. 빌헬름 외에도 처음보는 이름이 많아.”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빌헬름의 이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와서 착각했을 뿐.
명예의 전당에 추가된 이름은 빌헬름만이 아니다.
처음보는, 혹은 무언가 익숙하지만 생소한 이름들이 놓여있었다.
한참이나 전당을 살피던 플레이어 중 몇몇은 뒤늦게야 그 이름들의 정체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 아니, 미친! 내가 키웠던 부캐잖아?”
“부캐들이 전당에 추가됐다고?”
바로 부캐릭터들.
그들이 플레이어가 되기 전 육성했던 캐릭터들의 이름이었다.
부캐릭터들 역시도 게임에서 같은 메인 퀘스트를 완료했으니, 자연스럽게 전당에 이름이 업데이트 된 게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더 이상 ‘명예의 전당’이 플레이어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자신이 예전에 키웠던,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은 판게니아의 인간들.
말 그대로 ‘신병’에 걸렸던 캐릭터들이 그들과 함께 경쟁하게 된 것이다.
“그럼 부캐들도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는 건가?”
“황금률 상점이나 업적 상점 같은 것들도?”
“······ 만약 그렇다면, 큰일 아니야?”
플레이어는 판게니아에서 ‘죄인’이다.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육성했던 부캐릭터들은 ‘신병’에 걸려, 그들이 플레이했던 시간 동안 기억을 잃는다는 게 어느정도 알려진 상태.
뿐만인가.
‘신병’이 걸렸던 그들은 자신을 조종했던 플레이어를 증오한다.
하지만 초월하지 않는 이상 찾을 수 없고, 초월해봤자 단편적인 정보만 알 수 있으니 복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말 그대로 ‘부캐릭터’인지라 플레이어에게 위협을 가할 정도로 강한 경우가 적기도 했고.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진정으로 부캐릭터들이 시스템의 대열에 합류했다면.
전부가 아니더라도, 명예의 전당 등에서 이점만을 취할 수만 있다면!
······ 그렇다면, 부캐릭터들은 훨씬 더 빠르게 강해질 것이다.
지금만 하더라도 그간 밀려두었던 보상을 한꺼번에 습득할 수 있을 터.
사람들은 당황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당혹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하물며.
“박현명······ 이놈은 대체 뭐야?”
“······ 그러니까. 빌헬름과 맞먹는 점수들이잖아.”
“어디서 뭘 하고 다니길래?”
“투신의 탑을 오른 건 맞겠지?”
“메인퀘스트 5까지 한번에 전부 클리어했다고?”
빌헬름의 등장이 충격적이라 잠시 뒤로 밀어졌지만.
박현명의 이름 또한 빌헬름과 동급이거나 혹은 바짝 추격하는 형태로 명예의 전당에 등장하고 있었다.
“빌헬름이 등장하고, 란돌프는 아직 살아있다······.”
“둘 다 살아있는 거겠지? 명예의 전당은 살아있는 자들만 나타내잖아.”
“그래도 이미 그 둘은 우리 손을 벗어났어.”
명예의 전당은 ‘살아있는’ 플레이어만 이름을 비추게 만들었다.
란돌프와 빌헬름의 이름도 여전히 등록된 상태였다.
둘 다 살아있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그 둘은 이미 플레이어의 영역을 벗어나,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남은 건 한 명.
그들의 손에 그나마 닿을 수 있는 존재는.
“박현명을 찾아!”
“당장 박현명을 찾아와!”
······ 박현명 뿐이었다.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쯤이라면 분명히 지구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
*
“지금부터 병기술의 기초를 알려줄 것이다.”
제국의 넓은 연무장.
창을 쥔 라이가가 우뚝 선 채 말했다.
여전히 병들어보이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그의 상태는 감히 범인(凡人)에 비할 바는 아니다.
쉬익!
창대가 허공을 꿰뚫는다.
공기의 저항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
“만병지왕. 모든 병기의 왕은 검이라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창이야말로 가장 다루기 쉬우며 강력한 무기이니.”
“그럼 왜 검을 다루시는 겁니까?”
“결국 그 끝에 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너에겐 요원한 경지이니 우선 창술부터 갈고 닦도록.”
라이가가 연무장의 끝에 진열된 무기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알아서 가져오라는 뜻이다.
큰 기대 없는 눈빛.
정식적으로 사제의 연을 맺은 것조차 아니었다.
그보단 내 재능을 더 보겠다는 의도가 강했다.
제대로된 대회의 진행이 불가능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우승자로 점찍긴 했지만 아직 확신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현재의 라이가에겐 아무런 빛도 없는 상태였다.
하루하루를 죽음만 기다리고 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진열장에서 창 한 자루를 가져왔다.
‘라이가의 제자 타이틀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지.’
여신교의 성지인 아드리움에 가서 소노라의 신병을 확보하고, 롱기누스의 창의 남은 파편을 가지려면 보다 확실한 신분이 필요했다.
란돌프로 변신한 채 아드리움에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란돌프는 완전한 악성향이 됐다. 란돌프인 상태로 들어갔다간 결계에 걸려 발각돼.’
여신의 결계에 걸려 발각당할 터.
라이가의 제자라는 신분이 필요한 이유였다.
물론, 그러한 이유만으로 이곳에 남은 건 아니지만.
‘팔가의 힘. 오문의 개방도 결국 자연재생력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 궁금했던 것이다.
팔가의 비기, 라이가가 한순간 태고의 존재들조차 압도했던 힘의 근간.
오문개방에 관하여.
오문을 개방한다고 즉사하는 게 아니라면, ‘자연재생력’에 의해 생명을 연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명을 잃어가는 속도보다 재생의 능력이 더 높다면 ‘오문’을 개방하고서도 살 수 있지 않을까?
라이가의 검을 익히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사실상 가장 궁금한 건 팔가의 비기에 관한 것이었다.
하여, 남았다.
굳이 남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므로.
물론, 그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었다.
예컨대······.
‘··· 빌헬름의 신분은 황자였다.’
이곳, 제국의 황자였다.
그러나 가짜로 취급되어 쫓겨났다.
이곳 어딘가에 빌헬름의 얼굴을 한 자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사신교 간부 중 누군가가 빌헬름의 신분을 대신하고 있다.’
이 제국에 대해 더 깊게 파고들 필요가 있을 듯싶었다.
쫓겨난 황자와, 그 자리를 차지한 가짜.
가짜의 탄생과 종국적인 음모, 계략에 관하여.
제국에는 깊은 어둠이 있다.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어둠을 파고들어, 빌헬름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라이가의 제자 타이틀은 반드시 필요하다.
“창만이 아닌 모든 병기술을 익히게 될 것이다. 쉽지 않을 터이니, 포기하려면 포기하도록.”
“포기하지 않을겁니다.”
“흠. 자신감은 나쁘지 않군. 그럼 따라해봐라.”
쉬익!
천천히, 라이가가 창을 찔러넣었다.
간단하기 그지없는 동작이지만 라이가의 창은 공기와 바람의 결을 정확하게 읽고 꿰뚫었다.
저 원리를 따라하라는 것이다.
창의 달인도 힘들어할 완벽한 타이밍을, 이제 막 창을 쥔 사람이 따라할 수 있을 턱이 없는데도.
후우웁.
나는 숨을 삼키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쉬익!
*
라이가는 고민하고 있었다.
이대로 자신의 대에서 ‘팔가’를 끝내는 것에 관하여.
‘제대로 계승하지 못할 바엔, 끝내는 게 맞지 않겠나.’
팔가의 숙명은 황제를 보필하는 것.
오로지 황제만을 위해 존재하는 게 ‘팔가’다.
하지만 오랜시간 황제는 잠들었고, ‘팔가’의 쓰임 역시 모호해졌다.
황제가 잠들어있으니 진정한 팔가의 세력들도 앞에 나서지 않는다.
오직 라이가만이 현장에서 움직일 따름이다.
노예의 신분이었던.
그리하여 제대로된 인정을 받지 못했던 라이가만이.
그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내가 팔가의 후계자가 되었을 땐 피바람이 불었지.’
전대 팔가의 주인.
그의 스승이었던 남자.
그가 라이가를 후계자로 만들고자 팔가를 봉문한 것이다.
계승자와 전쟁을 치룰 수 없었던 팔가의 세력은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고, 이제는 아예 모습조차 비추지 않는다.
‘나는 이놈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전대 팔가의 주인, 자신의 스승과 같은 용단을 내릴 수 없을 것 같다.
피바람을 몰고서라도 반드시 후계자로 만들겠다는 의지.
그러기엔 아무런 정도, 욕심도 안 났으니까.
그러나 정식제자로 받아들이려면 팔가의 승인이 필요하다.
규율이 그랬다.
그러니 이놈을 봉문한 팔가로 데려가 승인을 받으려거든 그에게도 확신이 있어야 했다.
또한, 어느정도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었다.
어차피 그는 죽어가고 있었으니.
‘···어정쩡한 자세로군.’
라이가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창을 쥔 꼬락서니가 정말 처음으로 창을 쥔 사람같았다.
그저 단순하게 휘두를 생각밖에 없는 것 같았다.
아무런 기대없이, 라이가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쉬익!
창이, 휘둘러졌다.
자세와 마찬가지로 아무렇게나 휘둘러진 창.
“······.”
하지만, 라이가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정확했기 때문이다.
바람의 결을 읽고 내지른 창의 일격이.
너무나도 부드럽게 저항 없이 뻗어나간 창의 간격이.
하지만 무기에 따라 모든 쓰임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검을 익혔다고 창의 타이밍을 완벽하게 알 순 없었다.
한데,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 휘둘러진 창에 담긴 묘리는.
“··· 누군가에게서 창을 배운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 다음은 ‘도’다.”
라이가는 진열장에서 검이 아닌 도를 가져왔다.
도(刀).
한쪽만 검신이 날카롭게 갈려진 무기.
양쪽 면으로 벨 수 있는 검과는 다르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절삭력을 극대화한 무기가 도였다.
스윽!
무겁게 내리긋는다.
가볍게 움직인 창과 달리 무겁게 바람을 베었다.
그러자 바람의 결이 달라졌다.
더욱 고난도의 기술.
마찬가지로 창을 잘 다룬다고 도를 잘 다룰 수는 없다.
아드리움의 현.
진열장에서 도 한 자루를 가져온 녀석이.
스윽!
그것을 휘둘러, 바람을 베었다.
한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
······ 바람만 벤 게 아니다.
라이가의 두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지금, 이놈은.
‘······ 나를 베었다.’
순간적으로 라이가를 베었다.
라이가가 베었던 바람의 결을 찾아내 정확하게 등분해버린 것이다.
이는 단순히 바람을 베는 걸 넘어, 몇 차원이나 더 어려운 기술이었다.
그걸 감각적으로, 본능적으로 해낸 것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동작을 그저 한 번 보고 파악하며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고?
만약 그렇다면, 그건.
‘······ 어이가 없군.’
······ 자신의 재능을 뛰어넘는다는 뜻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