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305화 (305/317)

시상식

분명히 란돌프의 클래스는 두 개였다. 

별의 계승자, 그리고 지고의 검성. 

한데, 그 두 가지 클래스가 사라지고 난데없이 ‘또 다른 멸망’이라는 이름이 나타난 것이다. 

‘또 다른 멸망······ 또 다른 란돌프의 영향인가?’ 

클래스가 변형, 혹은 진화한 것인지. 

하지만 기존의 클래스가 변형과 진화를 거듭한들 ‘또 다른 멸망’으로 완성되진 않을 것 같았다. 

이유가 있다면 분명 ‘또 다른 란돌프’의 영향이리라. 

진리의 문에 갇힌 ‘또 다른 란돌프’는 ‘천상’과 연결되어버렸다. 

하마터면 멸망의 자아가 될 뻔 했으니, 관련된 클래스가 추가된 것일 터. 

‘······ 그래도 아이러니하군.’ 

솔직히 골때리는 상황이었다. 

멸망이 되려는 걸 막았더니, 또 다른 멸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박현명’의 2차 탈피가 완료되었습니다.》 

《‘란돌프’의 2차 탈피가 완료되었습니다.》 

《클래스가 진화하고 추가됩니다.》 

《‘박현명’에게 ‘별의 군주’ 클래스가 추가되었습니다.》 

《‘란돌프’에게 ‘원시 천마’ 클래스가 추가되었습니다.》 

다시금 떠오른 메시지들. 

이제야 비로소 탈피가 완전하게 끝났다는 내용! 

‘별의 군주, 원시 천마?’ 

별의 계승자 수준을 넘어 아예 별을 다스리는 군주가 되었다. 

나, 박현명이. 

란돌프에겐 ‘원시 천마’라 불리는, 원형의 천마가 클래스로서 주어졌다. 

상상조차 못한 일. 

그러나 본 순간 어느정도 납득은 되었다. 

‘성향이 분리되었군.’ 

빛과 어둠. 

박현명은 빛의 성향으로, 란돌프는 어둠의 성향으로 분리된 것이다. 

서로가 갖고 있던 혼돈의 기운들이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간 셈이다. 

나와 란돌프는 경험을 공유하지만, 이 극의 성향만큼은 공유할 수 없다. 

혼란과 혼돈이 가져다주는 현상을 직접 겪지 않았나. 

‘혼돈은 틈을 만든다. 그 틈을 없앤 거다.’ 

나뉨으로써 얻게 되는 첫 번째 이점. 

이번 투신의 탑에서 일어난 일과 같은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 

완전무결한 성향은 다른 것들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설령 주신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흉과 재의 신과 같은 주신들이 내 몸에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된다. 

‘또 다른 란돌프도 결국 혼돈에서 탄생한 자아이니.’ 

마찬가지로 ‘또 다른 란돌프’, 혹은 ‘또 다른 박현명’이 나타날 일도 없을 터였다. 

혼돈에서 파생된 자아는 파멸을 불러오기 마련이었다. 

‘주신, 혹은 천상의 개입 전부를 막는다.’ 

그런고로 성향의 분리는 반드시 진행해야하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놔뒀을뿐. 

천지개벽의 깨달음, 그리고 빌헬름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전히 나는 혼돈 상태였을 것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말이다. 

‘··· 극의를 본다. 볼 수 있다.’ 

또한, 이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극의로 향하는 길이 보다 단순해진 탓이다. 

계단으로 치면 그동안은 너무 중구난방이었다. 

극의로 향하는 계단은 특히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내딛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침내 일직선으로 계단이 정리되었다. 

그저 내딛기만 하면 된다. 

천천히 나 자신을 믿고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소리다. 

“피곤하면 조금 더 쉴 테냐?” 

“······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라이가의 물음에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 나는 ‘아드리움의 현’이었으니까. 

“왜 제가 이곳에 있는 겁니까?” 

“기억이 안 나나? 탑의 입구에서 기절해 있었다.” 

탑의 입구에서?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정상을 정복하고 입구로 튕겨나간 건지. 

이자벨라와 세렝게티, 그리고 다른 이들은 그럼 어떻게 된 걸까. 

“내일 시상식이 진행될 예정이다. 그때까지 몸을 조금 더 회복하도록.” 

라이가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말했다. 

“생사경의 나머지 부분은 말 안해도 되는 겁니까?” 

“······.” 

우뚝!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이가의 동작이 정지했다. 

대회의 마지막 시험. 

생사경을 읽고, 익히는 내용이었으나 결국 책은 반쪽짜리였다. 

하지만 생사경의 소실된 부분을 나는 알고 있었다. 

팔가의 비원을 이뤄줄 유일한 존재가 나라는 뜻. 

“······ 괜찮다.” 

허나 라이가는 방을 떠나갔다. 

관심이 없다면 거짓일 터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접었다. 

어째서? 

‘이제야 죽음이 와 닿는 것이겠지.’ 

라이가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가뜩이나 상태가 안 좋았는데, 빌헬름과 대결하며 더 상태가 악화된 것이리라. 

제국 최강이자 인류 최강이라 불리었던 남자치고는 초라한 뒷모습. 

허나, 절대로 그가 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빌헬름이 너무 강했을 뿐이지.’ 

라이가는 강하다. 

태고의 존재들, 심연의 주인들과 대결해도 밀리지 않을만큼. 

그저 상대가 나빴을뿐. 

그들보다 빌헬름은 더 강했고, 

또 다른 란돌프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계속된 패배와 확정된 죽음이라······.’ 

하지만 연달은 패배와 죽음의 공포가 라이가의 정신을 짓누른 것일는지. 

작게 혀를 차고 말았다. 

그렇다고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라이가의 죽음은 말 그대로 확정적이었으므로. 

그나마 ‘가라앉은 황제’에게서 가능성을 보긴 했으나, 그를 찾는 일은 해변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본인에게 살려는 의지조차 없다면 더욱이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여 아쉬울 따름이었다. 

라이가는 분명히 판게니아에서 억제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신교를 견제하고, 나름 인류 평화에 이바지하고 있는 게다. 

무엇보다. 

‘······ 심검.’ 

비록 완성한 것은 아니나, 심검(心劍)의 경지에 스스로 올라섰다. 

빌헬름과는 전혀 다른 결이다. 

빌헬름 또한 심검지경에 이르긴 했으나 그의 심검은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것에 치중되어 있었다. 

방어에 가깝다. 

반대로 라이가의 심검은 이름 그대로 검(劍)이다. 

오로지 공격일변도인 것이다. 

심검을 다루는 의지의 방향이 완전히 반대였다. 

‘그건 좀 배우고싶은데.’ 

빌헬름과는 전혀 다른 결의 검이기에 도리어 탐이 난다. 

익히고 내 것으로 만들수만 있다면 완벽한 심검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아쉬운 것이다. 

라이가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게. 

‘우선······ 나부터 좀 살펴봐야겠군.’ 

한차례 고개를 털어냈다. 

지금은 라이가보단 나의 변화에 치중할 때였다. 

별의 군주, 그리고 원시 천마. 

흉과 재의 장갑에 무슨 옵션이 달렸는지도 제대로 확인을 못했으니.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다시금 상태창을 살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확인했을 때. 

“······ 허허.” 

또 다시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라이가는 확신했다. 

하루가 다르게 자신은 죽어가고 있다는 걸. 

자신의 생명이 채 한 달이 남지 않았음을. 

무의 극의를 보았고 전율하며 자신 또한 닿기를 욕망했으나. 

결국 모든 게 부질없음이라. 

어차피 죽는다. 

특히 마지막에 빌헬름이 보여주었던 검. 

‘닿지 못한다. 내 재능으로는 닿을 수 없다.’ 

그 검이, 단 한 번의 휘두름이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처박아넣었다. 

절대로 닿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깊은 절망감이 몰려왔다. 

이해조차 못했으니까. 

탑을 오를 때의 빌헬름은 이해가 되었으나, 그가 마지막에 휘두른 그 검만큼은 아예 알 수가 없었다. 

말인 즉슨. 

······ 차원이 다를 정도로 라이가와 빌헬름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빌헬름의 격이, 검에 대한 조예가. 

자신을 압도적으로 넘어선다는 뜻이었다. 

하여, 생사경의 나머지 반쪽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이제 곧 죽음 사람일진대. 

“대회의 우승자는 ‘아드리움의 현’이다.” 

짝짝짝! 

라이가가 박수로 아드리움의 현을 맞이했다. 

하지만 환호성은 적었다. 

“이 불신한 놈들! 다들 환호하지 않고 뭣들 하는 거냐!” 

딱 한 명. 

여신교 추기경의 아들, 아론을 제외하곤. 

어쩔 수 없다. 

제대로된 배경조차 없는 남자의 승리를 축하해줄 이는 어디에도 없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이곳은 제국이고, 우승자가 여신교의 텃밭에서 나온 인물이라면 더더욱 싸늘한 여론이 형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상식은 빠르게 종료됐다. 

우승자에겐 약속대로 ‘빛의 길’과 ‘거룩한 길’이 지급되었다. 

······ 살아생전 빌헬름이 사용했던 장비가. 

또한, 아드리움의 현을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마음이 들뜨긴커녕 차갑게 식어버렸다. 

팔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일임에도. 

‘그래봤자 닿을 수 없을 테니.’ 

아무리 재능이 넘쳐 흐른다고 한들, 그래봤자 빌헬름을 뛰어넘진 못할 테니까. 

“······ 미친 거 아닌가?” 

“선을 넘었군.” 

“설마설마 했건만······!” 

제국의 심장, 황궁으로 사신교의 간부들이 모여들었다. 

한창 ‘황금의 정령왕’을 찾아 헤메던 이들이 모인 까닭은 다름아닌 시상식 때문이다. 

라이가가 진짜로 여신교의 성도에서 온 자를 우승자로 점지했기 때문이다. 

선을 넘었다. 

그냥 넘은 게 아니라, 선 자체를 박살낸 것과 다를 게 없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생각인가, 황금가면?” 

“······.” 

그들의 중심에서 황금가면은 침묵했다. 

대회를 여는 조건으로 ‘탐욕의 심장’을 라이가에게 받기는 했으나, 그 역시 이번 결과는 의외였다. 

라이가가 정말 제국의 사람이 아닌 다른 자를, 심지어 여신교의 텃밭에서 나고 자란 남자를 선택할 줄이야. 

그때 사자탈을 쓴 남자가 말했다. 

“아드리움의 현에 대해 조사해봤다. 그런데 마치 허공에서 솟아난 자 같더군.”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가 가진 정보력으로도 알 수 없다면 정말로 그렇다는 말이다. 

“제대로된 신원조차 없는 자라니?” 

“설마 노예라고?” 

그런 경우는 대부분 한 가지뿐이었다. 

신분이 없는 노예라는 것. 

당연히 그들로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 동병상련이라도 느낀 건가?” 

“미치겠군. 노예라니.” 

“‘팔가’가 또······!” 

팔가의 전대 주인이 라이가를 데려와 후계자로 낙인했을 때도 한차례 피바람이 불었다. 

전대 팔가의 주인은 라이가에 대해 불신하는 가신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심지어 자신을 따르던 기사들마저도. 

그래서 사신교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제알아서 팔가가 손과 발을 자르는데 굳이 의견을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전대 팔가의 주인이 죽은 뒤에는 라이가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심연의 탐색과 같은 일들만 주구장창 시켰다. 

나중에야 라이가가 진정 사자새끼였다는 게 밝혀지긴 했으나,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고.

“이번에는 안 된다.” 

“싹을 잘라내야 해!” 

간부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노예가 같은 황궁에서 숨을 쉬는 것도 한 번이면 족하다. 

라이가 때에는 방관했으나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겪을 순 없었다. 

“······ 당장은 놔두도록하지.” 

하지만, 그러한 원성 속에서 황금가면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러자 주변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라이가와 무슨 거래를 한 거냐?” 

“황금가면. 설마 라이가와 그새 정이라도 든 건가?” 

거래를 하긴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황금가면이 입을 열었다. 

“머지않아, 라이가는 죽는다.” 

“······ 연기일 수도 있지 않나?” 

“아니, 확실하다. 라이가는 죽는다. 곧.” 

황금가면의 확신에 좌중이 순간 조용해졌다. 

라이가의 죽음. 

팔가의 힘에 공백이 생긴다는 것. 

황금가면이 계속해서 말했다. 

“길어봐야 한 달이다. 그 안에 힘을 계승한들 한계가 있다. 아드리움의 현은 그 뒤에 처리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구태여 라이가를 건드려 팔가의 세력이 들고 일어날 빌미를 줄 필요는 없지 않나?” 

팔가의 세력. 

팔가는 단순히 기사단과 라이가만으로 존재하는 집단이 아니다. 

그 뒤에 팔가의 진짜 가문이, 세력이 있다. 

세상 밖으로는 잘 나오지 않지만,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괴물들이 있다. 

천하의 라이가조차도 그들에게 완전히 인정받진 못했다. 

하물며 ‘아드리움의 현’이 인정받으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한 황금가면이 재차 강조했다. 

“놔두면 알아서 자멸할 것이다. 라이가도, ‘아드리움의 현’도. 그러니 놔두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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