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
심상의 늪이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것은 한 줄기 빛이, 광명이 비추고 있다는 것.
고작 한 줄기의 빛이 더해졌을 따름인데 더 이상 이곳은 춥지도, 외롭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어딜 가는 거냐?”
나는 저 멀리 앞서나가는 녀석에게 물었다.
그럼에도 녀석은 멈춰서지 않았다.
가만히 빛을 향해 녀석은 그저 계속해서 걷고 있었다.
“개 같은 놈아. 이대로 가버리면 난 어떻게 하라고?”
서로 함께하여 완성할 수 있었다.
혼자였다면 결코 나는 다다르지 못했으리라.
흉과 재의 신으로부터 해방되고, 투신의 탑을 올라, 또 다른 란돌프를 정복한 것 모두가 녀석의 덕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온전히 ‘존재’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묵묵히 나와 함께해주었던.
포기하지않고 검을 휘둘러주었던.
“빌헬름!”
··· 빌헬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툭.
한 발자국을 내딛자, 발이 질척이는 깊은 늪에 빠졌다.
나는 애써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뎌보았다.
다시 한 발자국, 또 다시 한 발자국.
하지만 생각처럼 쉬이 나아갈 수가 없다.
아무리 나아가고 나아가도 진척이 없다시피 하였다.
‘빌어먹을.’
입술을 깨물었다.
빌헬름은 온전하게 걷고 있음에도 나는 여전히 진창이었다.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이대로면 영원히 닿지 못할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는 명명백백했다.
산 자와 죽은 자.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하여 만날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함께 가자!”
··· 나는 너와 함께하고 싶다, 빌헬름.
너와 함께여서 좋았다.
이기적이지만 이번에야말로 함께 끝을 향해 달려나가고 싶은 게다.
검만이 아닌, 검을 들고 나누는 대화만이 아니라.
함께 일상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 한번씩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누군가를 흉보거나, 혹은 누군가를 칭찬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를 사랑하며 고민을 털어놓는.
별 거 아닌 일에 고뇌하고, 서로의 고민에 공감하고, 함께 웃으며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너는 내······.”
······ 그런 관계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세간에선 그러한 관계를 부르는 호칭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쉬우나, 나에게는 진정으로 어려운 말.
“둘도 없는 친구, 라고······!”
친구.
나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늪에 빠져간다.
어느덧 허리까지 집어삼킨 늪은 순식간에 가슴팍을 지나 어깨를, 마침내 머리를 먹어치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것은, 이 늪은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경계라는 걸.
잠긴다.
끝없이 잠긴 끝에, 나는 다시금 현실로 향하리라.
이제 빌헬름을 재차 마주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대로 영원히······.
툭!
그때였다.
누군가가 내가 뻗은 손을 잡았다.
그리곤 늪에 빠진 내 상반신을 들어올리며.
“······ 우리는 함께할 수 없다.”
그가.
빌헬름이 말했다.
화아아악!
곧이어 그의 등 뒤로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빌헬름을 부르는 빛이다.
빛을 더 자세히 보자, 그곳엔 두 여신이 있었다.
“나는 여신의 품으로 돌아간다.”
원래 있던 곳으로.
여신의 품에서 안식을 맞이할 것이라는 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안식을 갈구하는 녀석의 의지를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 그러니,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말거라.”
그런 눈이라니?
내가 어떤 눈을 하고 있기에.
그리고 정말 괜찮은 건가?
이대로 끝나도?
이러한 끝이 구원이라고 말하는 거냐?
“우리가 함께한 시간에, 후회는 없노라.”
툭!
곧이어, 그가 내 손을 놓았다.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듯이.
다시 늪에 빠지는 나를 보며.
빌헬름이 나지막히 마지막 말을 담았다.
“개 같은······ 나의 친구여.”
*
쿠르릉!
탑이 떨린다.
동시에 모두가 알 수 있었다.
··· 종결되었음을.
《‘투신의 탑’ 챔피언이 ‘란돌프’에서 ‘빌헬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투신의 탑’의 모든 저주가 정화됩니다.》
빌헬름이 승리하였음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양손을 들었다.
“빌헬름이······!”
“승리했다!!”
“만세!!!”
그리고 빌헬름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를 내질렀다.
그가 걷고, 이룩했던 모든 것들이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으므로.
그의 승리가 마치 자신의 승리처럼 여겨진 것이다.
하지만.
“빌헬름은 어딜 간 거지?”
“란돌프는 그럼 죽은 건가?”
승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패자인 란돌프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마치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다.
아무리 찾아봐도, 탑의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여 모두가 의문을 갖고 있을 때.
“······ 이건 예상 외로군.”
한 남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소드마스터 락투샤, 개미왕 페르몬과 함께 했던 자.
다크엘프 로드.
그가 락투샤와 페르몬의 시체를 수거하며 말했다.
“드디어 ‘놈’이 개입할 줄 알았거늘······.”
그는 처음부터 탑의 정복에 관심이 없었다.
흑왕의 명령에 따라 바알과 멸망의 파편을 찾는 건 애시당초 관심 밖이었다는 소리다.
‘지워진 자.’
잊힌 존재.
스스로를 운영자라 말하는 파랑새.
오로지 천상의 멸망만을 바라는 그 존재가 개입할 줄 알았다.
‘이 모든걸 설계한 주제에, 빌헬름이 나타나자 발을 빼버렸다.’
흉과 재의 신.
그 둘을 움직인 것도 모두 ‘지워진 자’였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틈새’에서 겁쟁이처럼 잠겨만 있던 두 주신들이 갑자기 탑의 일에 관여할 리가 없지 않은가.
투신의 탑에 숨겨진 틈새의 존재를 알고, 그 틈새로 거침없이 향할 수 있는 건 오직 ‘지워진 자’뿐이다.
란돌프의 육체로 말미암아 스스로 다시 틈을 열어 소환될 예정이었을 터.
그런데 빌헬름이 나타나자 모습을 숨겼다.
심지어 흉과 재의 두 주신은 합치의 길로 선로를 바꿨다.
모든 게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판을 뒤흔든 존재, 빌헬름으로 인해.
“······ 아무래도 판을 더 키워야겠군.”
다크엘프 로드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시금 ‘지워진 자’를 찾으려면, 판을 더 키울 수밖에 없을 듯했으므로.
때마침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여신교를 지우도록하지.’
여신교를 지우면, 나타날 수밖에 없으리라.
파랑새, ‘지워진 자’는 두 여신과 밀접한 관계였으니까.
어차피 이미 진행중이기도 했고.
투신의 탑을 벗어나, 인적이 없는 곳으로 향한 그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동시에.
《로그아웃 했습니다.》
《‘민트초코맛있어요(4)’로 로그인합니다.》
*
제국.
거대한 황궁의 내부, 화려하기 그지없는 방의 안에서.
“······.”
한 남자가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금색의 가면을 쓴 자.
사신교를 이끄는 최고간부인 그가.
천천히, 거울을 바라보며.
가면을 벗었다.
“······.”
남자는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가면의 너머엔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빌헬름.”
지금, 투신의 탑을 정복한 남자의 얼굴이.
탑을 정복한 끝에 사라진 그가 왜 제국에 있는 걸까?
그것도 황금 가면을 쓴 채로.
“내가 진짜다. 너는··· 나를 흉내낸 가짜에 불과해.”
어릴 적, 황궁에서 쫓겨난 가짜.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모방품.
그가 바로 빌헬름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어릴 때 이후로 가면을 벗은 적이 없다.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한 존재가 바깥을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그 깊숙한 혐오감과 증오가.
더할 나위 없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 이곳에 네가 있을 자리는 없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가면을 썼다.
자신의 얼굴이지만 정말 꼴도 보기가 싫었다.
허나 이 얼굴은 제국의 상징이다.
자신이 황제의 핏줄이라는 증거였다.
그가 천천히 바깥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디······ 바라고 또 바라건대, 돌아오지 말거라. 돌아와봤자 어차피 네놈이 바라던 구원은 없을 터이니.”
*
세렝게티는 아우성쳤다.
······ 기사왕.
나의 유일한 주군이시여.
저만을 놔둔 채, 어딜 가시는 겁니까?
-세렝게티! 그대가 단장님을 지켜라!
-우리 ‘원탁’은 오로지 기사왕을 위해서만 존재하니!
-믿고 맡긴다, 우리 막내!
-울지마, 짜샤! 사내새끼가! ···아, 미안. 여자였나?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들.
이미 지나간 자들이다.
죽어서 사라진 기사들이었다.
모두 죽고, 세렝게티 혼자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세렝게티는 아우성을 쳤다.
어째서.
어찌하여!
겨우 재회했건만, 다시금 저를 혼자 두시는 겁니까?
그 찰나.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의 왕은 살아있다.
-그러니, 살아서 전하거라.
다시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들이 아니다.
기사왕 또한 아니었다.
그건 기억이다.
세렝게티의 잠겨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빌헬름의 저주를 대신 뒤집어쓰고,
그가 마왕에 의해 죽은 뒤의 기억.
그때, 누군가가 세렝게티를 마왕성에서 탈출시켰다.
그리곤 말했다.
-‘원탁’을 부활시키라고.
-‘명예의 성소’에서 그들을 부르라고.
-그들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왕의 부름만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당신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 세렝게티는 물었던 것 같다.
누구냐는 물음을 분명히 입에 담았던 것 같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낚시를 좋아하지.
-가끔 너처럼 위험에 빠진 사람도 낚고, 수많은 경계에서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낚기도 한단다.
-언젠가, 어느 바다에서, 혹은 어느 경계에서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거야.
-그러니 나의 ‘구원자’에게, 그대의 왕에게 꼭 전해다오.
*
오랜 꿈을 꾼 기분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미련할 정도로 열심히 그저 달리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 걸까?
달린 끝에, 진정으로 ‘끝’은 있는 걸까?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멈출 수 없다.
멈춰선 안 된다.
꿈을 이루기 위해선.
단 하나의, 나의 소원을 달성하기 위해선.
물론, 처음에는 아무런 소원도 없었다.
소원을 이뤄준다는 말에 시작하긴 했지만, 정작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팬텀이라 불리며 정점에 섰을 때조차도.
심지어 판게니아로 빙의된 채 소환되었을 때조차도 구체적인 꿈이라 할 게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있다.
이루고 싶은 소원이 생겼다.
아아.
그래, 나는 지금 소원을 향해 달리고 있다.
너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다.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달려나간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닿게 되리라.
“일어났느냐?”
··· 누군가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아니, 이미 조금씩 깨어가고 있었다.
흐릿한 시야.
‘으음.’
강렬한 햇빛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상반신을 들고, 한 차례 고개를 털자 그제야 주변이 보인다.
‘여긴?’
탑이 아니다.
투신의 탑 정상에서 보았던 광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화려한 방.
어딘가 익숙한 공기.
‘제국이로군.’
이곳은 제국이었다.
그리고 황궁이었다.
나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왜 내가 이곳에 있는 거지?
그러고 보니 누군가가 나를 불렀던 것 같다.
하여 더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제 좀 정신이 드나?”
······ 그곳엔 역시나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라이가가 있었다.
처음부터 목소리를 못 알아들은 이유는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 생각할 수 없을만큼 변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천길만길로 갈라진 목소리 탓에 라이가라고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는 비단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파리한 안색.
홀쭉한 얼굴과 반쯤 죽은 눈동자.
사실상 시체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라이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