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채엥-!
부딪힌다.
검과 검이.
사람과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누는 검의 대화.
‘무겁다.’
빌헬름의 검은 무겁다.
한없이 묵직했다.
여태껏 마주한 검사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무게감이 있었다.
허나 정해진 검식(劍式)이 없다.
천지개벽의 검술에는 정해진 틀이 없었다.
틀이 없으니 가벼워야 한다.
그야말로 모순(矛盾)이다.
텅 비어있음에도 어찌하여 이토록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단 말인가?
‘천지개벽은 인간 자체의 검술이다.’
그건 바로 빌헬름이 무겁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가, 그의 인생이, 그의 희로애락이.
비로소 천지개벽의 진정한 묘리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천지개벽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검술이라는 걸.
‘천.’
천지개벽의 천(天).
영역을 지배하여 상대를 제어하는 검술.
나는 그게 전부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이는 곧 상대를 읽고 상대가 되는 것과 다름이 없는 능력이다.
······ 빌헬름을 읽고, 빌헬름이 되는 것이다.
관절의 움직임, 근육의 미세한 떨림, 오장육부에서 쥐어짜지는 작은 울림 하나마저도 놓치지 않고 들여다본다.
더 나아가 빌헬름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읽어낸다.
그리하여 비로소 빌헬름이 된다.
채에에엥-!
검이 한층 더 묵직해진다.
그러자 빌헬름의 표정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평소였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나, 천의 영역을 펼쳐낸 지금이라면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당황하고 있군.’
내가 제대로 천지개벽의 천을 펼치자 빌헬름은 당황하고 있었다.
상대를 읽는다는 것.
그것은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이었으므로.
말인 즉슨.
빌헬름을, ‘개’ 같은 신인 내가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절대로 닿지 않고,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줄 알았던 존재인 내가 말이다.
그리고 내가 빌헬름을 읽어냈듯이.
‘너도 나를 읽고 있겠지.’
······ 빌헬름 역시 이제야 제대로 나를 알게 되었을 터다.
나라는 존재가 대관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진정한 검의 대화였다.
함께 펼쳐내는 천의 영역에서 우리는 마치 하나처럼 움직였다.
검의 울림에 따라, 검의 속삭임에 따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검격을 나누었다.
그러자 빌헬름은 단계를 높였다.
‘지.’
천지개벽의 지(地).
모든 공격을 파훼하는 검술.
하지만 이 역시 그저 공격을 무효화하는 게 전부인 검술은 아니었다.
상대가 되고, 상대의 모든 것과 공명한다.
공명(共鳴)이란 공감이다.
단순한 이해를 넘어 나의 일처럼 여기는 것이다.
심상의 늪에 갇힌 채 부단하게 나를 이해하고 공감하려 했던 빌헬름만이 온전히 펼칠 수 있는 검술이었다.
‘내가 못 따라갈 것 같은가?’
······ 그러니 당연히 내가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빌헬름은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해와 공감은 한끝 차이이지만, 완전한 공감은 타인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끝없는 시간 동안 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빌헬름과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내가 움직인 캐릭터에 동화한 채, 나의 의지와 생각에 하나되어 검을 휘두른 빌헬름.
자신을 포기하며 남과 공명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너는 나고, 나도 너다.’
빌헬름은 ‘남’이 아니다.
나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
또 다른 나였다.
그의 고통과 슬픔을 나는 이해한다.
녀석은 나를 ‘개’ 같은 신이라 부르며 원망했으나, 동시에 선망하고 있었다.
포기를 모르던 나의 정신에 어느덧 감화된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나는 빌헬름이 보여준 불굴의 정신을 선망하고 있다.
그의 지칠줄 모르는 노력과 마침내 맞닿은 극의를 갈구하는 중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욕망하는 사이인 게다.
그런 주제에 너무나도 닮아서 왠지 미워 보이는 거울 안의 나와 같은 존재였다.
챙! 챙! 채엥!
어느덧 우리는 똑같은 자세와 똑같은 검로로 검을 그리고 있었다.
이제 말은 필요 없다.
그런 과정 자체가 의미가 없었다.
나의 생각이 빌헬름의 생각이고, 나의 의지가 빌헬름의 의지였으므로.
이 다음에 무엇을 행할지 자연스럽게 알았다.
‘개.’
천지개벽의 개(開).
세상을 여는 검.
상대의 공간과 모든 걸 넘어서서 마침내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권능이다.
이 단계부터는 주변 모든 만물과 소통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신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더이상 나는 더 이상 빌헬름을 따라가지 않았다.
‘··· 하나로 합친다. 기존의 것을 더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대신 더욱 깊이 나를 들여다보았다.
만물과의 소통이란 주변을 둘러보는 용도가 아니다.
내가 가진 ‘난잡한’ 것들의 표상(表象)을 읽고, 열며, 아는 용도다.
상대를 알았으니, 이제는 나를 제대로 알 차례였다.
우선······ 지금 이 몸, 란돌프를.
‘확실히 너무 많은 게 섞여있군.’
여신의 별과 멸망의 파편.
두 상반되는 힘을 품었다.
히든 특성 【허무】에 의해 어떻게든 지탱되고는 있지만, 란돌프의 성향은 확실히 【악】에 가깝다.
어둠과 끔찍한 흉조의 힘.
하물며 ‘지고의 검’ 역시 ‘죽음’을 기반하는 능력이지 않나.
바알의 저주 또한 마찬가지다.
덕분에 가파르게 강해질 순 있었으나, 이걸 제대로 분리하고 합치지 않으면 빌헬름과 같은 무극에는 닿을 수 없다.
‘란돌프의 몸으로 대천사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박현명의 몸은?
나 자신의 몸은 어떠한가.
대천사의 축복을 받기는 했으나 계속해서 난잡해지고 있다.
이대로면 머지않아 나의 몸도 란돌프처럼 변할 것이다.
온갖 것이 존재하고 혼란해지며 ‘또 다른 박현명’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처음부터 난잡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존재가 등장할 틈 자체가 없었을 터.
그게 아니더라도 이번 일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
투신의 탑에 소환된 란돌프의 허점을 흉과 재의 주신들이 파고든 것과 같은 일이 말이다.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다.’
이제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공존은 욕심이다.
빛과 어둠은 처음부터 나뉘어있도록 설계된 진리.
그것이 균형이었다.
지금 나는 균형을 잃었다.
‘나 혼자서는 모든 균형을 이룰 수 없다······.’
허나 한계가 있다.
그러나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나는 빌헬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빌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전한 황금률’에 의한 남은 강림 시간 2분》
허나, 빌헬름이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은 쉽지 않다.
너무나도 난해하고 복잡하다.
2분의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 할 수 있을까?
아니, 해야만 한다.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영원히 불가능할 테니까.
필요한 지식은 있었다.
‘진리의 문에서 흘러나온 지식이 아직 남아있다.’
또 다른 란돌프가 남겨놓은 지식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고 있었다.
물론 이 역시 시간문제일 따름이나, 어쨌든 시도해볼 수밖에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떠한 상황에 놓여서도 일단 하는 마음’이니까.
둘이 함께 힘을 합친다면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이 하나만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었다.
‘······ 빌헬름. 너는 내가 밉지 않은가?’
설령 그것이 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빌헬름의 몸을 조종했다.
빌헬름의 의지와 의식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행했다.
그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가슴 한켠에는 원망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이란 지극히 복잡한 법이니까.
자신의 감정을 배제한 채, 오롯이 순수한 감정만으로 나를 돕는 게 과연 가능할지 궁금한 게다.
나는 빌헬름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씨익!
······ 빌헬름이 웃어보였다.
그런데 그 웃음이, 미소가.
‘진짜 어색하군.’
너무 어색해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생각해보니 내 기억 속의 빌헬름은 누구의 앞에서 웃어보인 적이 없다.
어찌됐든 내가 게임에서 로그아웃 했을 때 빌헬름은 잠시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음에도, 오직 내가 바라는 길만을 걸어왔다.
철저하게 기사왕을 연기했고, 절대로 본인의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다.
웃기는커녕 항상 굳어만 있었다.
······ 누군가의 앞에서 웃어 보인 것 자체가 빌헬름에겐 처음인 것이다.
그것은 곧 용서였고,
나의 구원이었다.
모르겠다.
그냥, 구원받은 기분이 들었다.
빌헬름의 미소를 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서 아쉬웠다.
미안했다.
이 남은 시간을 나를 위해 사용해도 되는 걸까?
내가 아닌 너를 위해, 너의 구원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건 아닌가?
그러자 빌헬름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듯이.
이윽고.
“······ 나는.”
그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동화한 상태에서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도리어 빌헬름은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듯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이미 구원받았다.”
······ 이미 구원 받았다고?
무엇을?
··· 어떻게?
그의 구원은 자유다.
구속을 풀고 자유를 얻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대원정에서 그는 죽었다.
죽음은 자유가, 해방이 아니다.
그러한 죽음을 그가 원했을 리 없었으므로.
그럼에도 구원받았다고 한다.
더 이상의 원은 없다고 말한다.
“집중하거라. ‘개’ 같은 신이여.”
그의 목소리가 잡념을 지웠다.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무심하게 말하며 그는 내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마지막 가르침이자, 마지막 선물을 주고 있었다.
후우웁.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모든 상념을 떨치고 빌헬름의 호흡에 맞춰 나를 완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벽.’
천지개벽의 벽(闢).
다시금, 세상을 창조한다.
나를, 우리를, 새롭게 만든다.
《‘검 숙련도’ 레벨이 상승합니다.》
《검 숙련도가 34Lv을 달성했습니다.》
《‘검 숙련도’ 레벨이 상승합니다.》
《검 숙련도가 35Lv을 달성했습니다.》
《‘수련자의 산의 주인’으로부터 발생한 히든 퀘스트 ‘숙련도 레벨 초월’을 완성했습니다!》
《더 이상의 퀘스트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칭호 ‘규격 외의 수련자’를 획득합니다.》
《히든 특성 ‘무신(武神) 빌헬름’이 추가됩니다.》
《규격 외의 신비 ‘무신(武神)’을 획득합니다.
《‘위대한 위상’에 따라 명예를 두 배(10,000)로 획득합니다.》
《‘명예’가 50,000을 돌파했습니다.》
《명예의 성소에서 ‘최초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메인 퀘스트 5, ‘신비 얻기’를 클리어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
《‘투신의 탑’ 챔피언이 ‘란돌프’에서 ‘빌헬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투신의 탑’의 모든 저주가 정화됩니다.》
《‘흉과 재’의 주신이 새로운 길을 제시한 당신을 인정합니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 그리하여 새롭게 창조하는 것.》
《저주와 원망으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지고한 영역임을.》
《두 주신이 합치(合致)의 의미로, 그리고 모든 시련을 달성한 당신에게 ‘흉신의 장갑(태고)’과 ‘재신의 장갑(태고)’을 선물합니다.》
《두 장갑이 모여 한 쌍으로 완성되며, 두 장갑은 각기 다른 주신의 격을 담고 있습니다.》
《업적 ‘두 주신에게 최초로 인정받은 자’를 달성합니다.》
《‘위대한 위상’에 따라 명예를 두 배(10,000)로 획득합니다.》
《‘명예’가 60,000을 돌파했습니다.》
《명예의 성소에서 ‘최초의 자격(2)’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
······.
《비우고, 채우며, 새로이 쌓아 올립니다.》
《두 번째 ‘탈각(脫殼)’이 시작됩니다.》
······.
《‘온전한 황금률’이 모두 소모되었습니다.》
《‘빌헬름’의 강림이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