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당시를 떠올려보면, 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광기’였다.
몇날며칠.
거의 십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잠도 거의 안 잔 채로 빌헬름을 플레이했으니까.
그때만 하더라도 흔히 말하는 ‘시간 빌게이츠’······ 백수였는지라 가능했던 일.
취업은 안 되고, 돈 안들이고 할 수 있는게 게임밖에 없으니 묘한 오기가 생긴 모양이다.
‘오냐. 내가 깨고 만다!’
판게니아에는 ‘포복’이라 불리는 회피 기술이 있다.
딱히 대단할 것 없이 그냥 바닥을 기는 커맨드다.
선제공격을 해오는 괴물들에게 최대한 걸리지 않고 이동하는 게 가능토록 해주는 수단.
다만, 이 ‘포복’을 제대로 사용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잘 안 쓰이는 기술이었다.
포복 상태에서 일어나는데 시간이 걸려, 괴물에게 걸렸다간 그대로 먹잇감이 되는 탓이다.
게다가 이동속도도 느리다.
포복 도중 다른 행동을 취할 수도 없다.
차라리 달려서 도망치는 게 낫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게 한 가지 있었다.
‘포복 상태로 생존하면 회피력이 오르지. 생존 포인트도 높게 받고.’
내가 노린 점이 바로 그것이다.
회피력이 높으면 선제공격형 괴물에게 잘 포착당하지 않게 된다.
또한 공격을 당할 때 ‘빗나감’이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숲을 빠져나가기 전, 동굴 주변을 포복한 채로 오가며 최대한 회피력을 올린 이유다.
강력한 괴물과의 거리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며 외줄타기를 할수록 회피력은 더 가파르게 올라, 마침내 숲을 빠져나갈 수준에 이른 것이다.
다만.
‘······ 빌헬름은 처음부터 자각하고 있었다.’
빌헬름이 캐릭터 내부에서 자각하고 있었음을 알고는 있었다.
첫 라이가와의 대결에서 검 숙련도 레벨 31을 달성했을 때, 빌헬름의 닫혀있던 기억이 개화하며 내게 한 가지 장면을 회상시킨 것이다.
바로 게임의 ‘인트로’ 부분.
나를 개 같은 신이라 부르며, 세상을 불살라버리겠다 외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빌헬름.
그의 의식은, 캐릭터를 생성한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나벨룽의 숲을 탈출하기 훨씬 이전부터 말이다.
‘그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컴컴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 심상의 늪은 너무나도 외롭고 추운 장소였다.
말을 해도 닿지 않고, 움직여도 끝이 없다.
심지어 시간의 흐름마저 이상하다.
족히 수십배 이상은 느리게 가는 것만 같다.
빌헬름이 겪은 한 시간이 내게는 하루와 같았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고.
그 정도로 이곳에서의 시간은 지옥처럼 느껴졌다.
캐릭터가 생성되고 5년 이상.
이 심상의 늪에서 빌헬름이 체감한 시간은 몇 년이었을까.
100년? 200년?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간의 흐름은 더욱 느려져만 갔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저 아득할 뿐이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전부 미쳐버렸으리라.
아니, 아니다.
빌헬름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이곳에서의 체류를 감히 감당할 수 없다.
‘······ 빌헬름은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그럼에도 그 지옥 같은 시간 동안 빌헬름은 검을 휘둘렀다.
쉬지않고 오로지 벽을 넘어 내게 닿고자 혈안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나는 듣지 못했다.
그를 인식조차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빌헬름은 내가 키운 게임 속 캐릭터였을 뿐이었으므로.
그저 초반 숙련도를 잘 쌓아놨기에 다른 캐릭터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수한 스킬을 얻거나, 특수한 기질을 발휘하는데 빌헬름이 도움을 줬으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히든 퀘스트에 도전해보고 싶어졌지.’
나벨룽의 숲을 벗어난 뒤.
반드시 달성하고 싶은 ‘히든 퀘스트’가 생겼다.
판게니아에는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히든 퀘스트’가 7개 있다.
불가능한 내용이기에 은연중 ‘7대 불가사의’라 불렸던 것들.
당연히 그동안은 도전할 엄두조차 못냈다.
농담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기에도 진짜 불가능한 내용이었으니까.
퀘스트의 내용은 솔로 플레이로 레벨 1에 피뿔산의 왕을 사냥하는 것.
레벨 1에, 무려 레이드 보스 몬스터이자 7레벨인 피뿔산의 왕을 사냥해야만 한다.
그것도 오크들이 득실대는 산을 올라, 혼자 도전하고 승리한 뒤 내려와야만 하는 게다.
‘지금이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다고 여겼으니.’
판게니아는 대부분 ‘사냥’을 통해 레벨을 올린다.
퀘스트로 경험치를 얻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사냥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당연히 피뿔산을 오르다보면 오크를 사냥해야하고, 오크를 사냥하면 경험치가 쌓여 레벨이 오를 터.
히든 퀘스트의 달성은 그 순간 요원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포복’이 중요했다.
나벨룽의 숲을 탈출할 때도 빌헬름의 레벨은 1이었다.
하지만 회피력이 높은 상태라 오크들의 시선에 안 걸릴 자신이 있었다.
‘남은 건 피뿔산의 왕과 1:1의 대결을 펼치는 것.’
그러나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피뿔산의 왕이다.
전사의 대결을 통해 1:1의 싸움을 유도해야만 그나마의 가능성이 있는 상태.
전사의 대결은 오크를 한 마리도 사냥하지 않은 캐릭터만 가능했으니, 지금이 아니면 평생토록 도전은 불가할 것이었다.
그래서다.
무턱대고 도전한 것은.
‘빌헬름이 아니었다면 졌다.’
피뿔산의 왕과 대결하던 도중 생성된 스킬.
그 스킬은 단순히 회피력이 높아서 생긴 것이 아니다.
빌헬름의 의지가 닿아 만들어진 스킬이었다.
만약 그 순간 ‘검 흘리기’ 스킬이 없었다면, 대결은 패배했겠지.
‘······ 서로가 무모했군.’
빌헤름의 기억을 바라보며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빌헬름이 나를 보며 생각했던 감정이, 지금의 나와 같았으므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혀 검만 휘두른다는 것.
아무도 봐주지 않고, 알아주지 않으며, 바깥으로 나갈 가능성조차 없는 상태에서 억겁의 세월동안 검만 휘두른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 긴 시간을, 노력을.
······ 나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네가 있었기에 내가 있을 수 있었다.”
어차피 닿지 않으리라는 걸 알지만 나는 그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열심히 했구나, 빌헬름.”
그의 노력을 칭찬했다.
“그런데 ‘개 같은 신’이 아니라 ‘개’ 같은 신으로 나를 바라본 건 좀 심하지 않나? 다 살려고 한 일인데.”
푸념도 늘어놓았다.
‘개 같은 신’이라는 말이, 단순히 원망섞인 욕설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정말 바닥을 개처럼 기어서 생긴 별명일 줄은.
어이가 없기는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진즉에 미쳐버렸으리라.
“··· ‘개’ 같은 신이 응원하마. 실컷 날뛰어봐라.”
빌헬름의 전부.
그가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
확실히, 그는 강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단순히 게임 캐릭터였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전부가 아니었다.
모든 기억을 되찾고, 자신을 알게 된 빌헬름은.
“······.”
······ 그를 보며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전율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빌헬름.
그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었으므로.
천지개벽의 완성.
내가 알고 휘두르던 검과는 전혀 달랐으니까.
하지만 도무지 감히 잡히지 않는다.
분명히 같은 것을 익혔을진대, 너무나도 궤가 다르다.
더 이상 그는 내게 외치지 않았다.
내게 닿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 이제 내 차례라는 말이냐?’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발악할 차례라고.
닿을 수 없는, 아무리 노력해도 닿지 못할.
“하하하!”
녀석의 방식을 보며 나는 대소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빌헬름이 내게 보여주려는 것들, 그리하여 내게 느끼게 하고자 하는 감정들이 무엇인지 알겠다.
그건 그야말로.
“진짜 개 같은 놈이로군.”
실로 개 같은 놈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
란돌프는 작전을 변경했다.
운명을 결정짓는 지고의 검으로도 죽일 수 없다면, 또 다른 방식을 사용해 누르면 그만이었다.
‘신비 파괴.’
빌헬름의 신비를 파괴한다.
지금 그가 두른 신비는 평범한 인간들이 두르는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스스로 격을 올리며, 그가 착용한 모든 것들의 규격이 올라갔다.
그렇다면 하나하나 없애버리면 그만.
《‘규격외’의 신비는 파괴할 수 없습니다.》
······ 하지만, 파괴되지 않는다.
‘겨울.’
휘이이이이이잉!
지고의 유일등급 무기.
‘겨울(최후의 황혼)’이 지닌 고유스킬을 사용했다.
극한의 추위로 상대를 얼려버리는 것.
하지만, 이 역시 통하지 않는다.
빌헬름에게 이 정도의 추위는 심상에서 느꼈던 추위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스으으으으!
란돌프의 전신이 어둠으로 물든다.
‘끔찍한 흉조의 눈.’
어둠의 영역을 넓힌다.
그리하여 상대에게 ‘끔찍한 흉조의 눈’을 박아넣고 강제로 조종하는 힘.
곧이어 빌헬름의 가슴팍에 ‘흉조의 눈’이 돋아났다.
하지만,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빌헬름의 육체와 정신은 이미 누군가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그릇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이미 오랜시간 조종당해왔다.
“······ 마혈종의 신으로서 명한다. 나를 지켜라.”
마혈종의 신이 지닌 자격.
칼날용신 하나와 두 아이들을 소환하고자 했다.
그러나 소환되지 않는다.
《‘칼날용신’이 소환에 응하지 않습니다.》
《‘이세라’가 소환에 응하지 않습니다.》
《‘루카리아’가 소환에 응하지 않습니다.》
··· 애초에 처음부터 소환된 적이 없다.
그들은 현재의 란돌프가 그들이 모시던 신이 아님을 처음부터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하여 가짜의 인형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만약 소환에 응했다면, 페이즈 2에서 ‘진짜’로 나타났을 터이니.
빠드득!
“나를 거부하는 거냐? 내가 진짜다. 내가 진짜 란돌프란 말이다!”
란돌프가 이를 갈았다.
응하지 않는건 그들만이 아니다.
‘별의 계승자’와 관련된 스킬들도 사용이 불가했다.
동시에.
란돌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렇게도 원한다면.
“······ 오냐, 보여주마. 내가 왜 ‘최강’인지.”
증명해주마.
신의 섬에서 어떻게 심연의 주인들과 태고의 존재들을 학살했는지.
란돌프가 검을 들었다.
푸욱!
그리곤 스스로 심장을 찔렀다.
그러자.
푸아아아아아악!
심장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치며 수많은 ‘눈’이 피부 위로 떠올랐다.
“너도 아직 본 적이 없겠지. ‘멸망의 파편’을 제대로 사용한 모습은.”
영원의 란돌프.
죽으면 한 차례 ‘생명의 힘’을 사용해 부활할 수 있으나.
또 다른 방식도 존재했다.
멸망의 파편, 그 안에 담긴 ‘죽음의 힘’을 이용하는 것.
오직 지금의 ‘란돌프’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이다.
신의 섬에서 학살을 일으켰던 진정한 원동력.
란돌프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의 ‘멸망’이다, 빌헬름!”
*
검을 휘두른다.
쿠아아아앙!
세상이 베어진다.
조각나며 소멸한다.
란돌프의 움직임은 모든 존재를 멸했다.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가히 스스로 ‘버그’가 되어버린 모습.
쩌어어어어엉!
콰르르르릉!
탑이 무너진다.
세계가 파괴되는 것만 같다.
하지만 검을 휘두르며, 맞대며, 빌헬름은 깨달았다.
-나와 함께 ‘천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니?
파랑새의 진의를.
지금 ‘멸망의 파편’의 힘을 그대로 발휘하고 있는 란돌프를 보자,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멸망은 천상에서 보내온 병기다.’
그것은 지상을 멸절하는 병기다.
오로지 세계를 멸하기 위해 존재하는 무기였다.
갑자기 태어나며 판게니아를 지옥으로 만든 게 아니라, ‘천상’에서 판게니아를 부수고자 보낸 것이었다.
판게니아만이 아니다.
수많은 세계들을 그렇게 불태웠다.
그래서 알겠다.
지금의 란돌프는 확실하게 ‘천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개 같은 신은 그것을 알고 란돌프와 자신을 맞붙힌 걸까.
‘감히······.’
하여, 빌헬름은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개 같은 신이 왜 자신을 응원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이곳은 나의 세계다.’
너희들이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우리의 세계다.’
그러니 보여주마.
무(武)의 극치(極致)를.
‘천지창조(天地創造).’
여태껏 경험한 적 없을 무한의 세계를.
빌헬름은 검을 휘둘렀다.
*
구오오오오오오오오-!
세계가 흔들린다.
투신의 탑을 중심으로 모든 게 먹혀간다.
그리하여 투신의 탑 전체가 ‘어둠’에 먹혔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
“여긴······ 어디냐?”
란돌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빌헬름이 휘두른 검.
그 안에 담긴 무수한 묘리와 극의에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다.
진리의 문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검이었으니까.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 이곳이었다.
어둠으로 물든 심상의 늪.
춥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움직일 수도 없다.
란돌프는 그 상태로 무수한 세월을 겪었다.
멸망의 힘으로 세계를 파괴했으나, 또 다시 생성되어 란돌프를 집어삼켰다.
무수하게 이어지는 세계.
‘아아······.’
괴롭다. 괴롭다. 괴롭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아서.
영원토록 갇힌 것만 같아서.
그렇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툭!
그의 눈앞에 검 한 자루가 떨어졌다.
스릉.
떨어진 검을 쥐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이제 사라져라, 가짜여.”
······ 박현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
《‘영원의 신 란돌프’를 격퇴했습니다.》
《히든 페이즈.》
《‘???’가 등장합니다.》
《‘온전한 황금률’의 남은 시간 8분》
무의 극의를 펼친 빌헬름이, 이내 다시금 나타난 란돌프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 ‘개 같은 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