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
입을 연 빌헬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 나벨룽의 숲.’
언제, 어디서 ‘그’를 만났냐는 란돌프의 물음에 자신도 모르게 나온 대답.
조건반사처럼 흘러나온 나벨룽의 숲이라는 이름.
하지만 나벨룽의 숲은 빌헬름의 기억이 시작된 장소다.
문제는 그곳에서 빌헬름은 누군가를 만난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저 갇혀있을 뿐이었거늘.’
칠흑 같은 심상의 늪.
그곳에서 하루하루를 발악할 뿐이었다.
자신의 몸을 점거하고 마음대로 움직이는 개 같은 신을 원망하며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검을 휘둘러왔다.
허나 이해할 수 없는 건 스스로 내뱉은 대답뿐만이 아니었다.
바늘로 콕콕 찌르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두통.
《‘온전한 황금률’의 남은 강림 시간 1h 1m》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탑을 오르며 남은 시간은 어느덧 한시간 남짓.
그 안에 결판을 내지 않으면 결국 시련은 실패로 귀결되리라.
동시에 란돌프의 두 눈에 살기가 번졌다.
“······ 너는 절대로 살려두어선 안되겠군.”
스아아아아아아아!
마치 물방울처럼 떠오르는 마력의 구슬들.
수백 개에 이르는 그것들 전부가 강으로 이루어진 검환이었다.
신조차도 소멸시킬 정도의 파괴력을 지닌 그것들은 닿는 즉시 빌헬름을 지워버릴 것이었다.
하지만 란돌프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스으으으으으으으!
검환들이 하나, 둘 모이며 어떠한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검환이 뭉쳐 완성된 건 거대한 손의 모양.
“‘지고의 검’.”
쩌어어어어어어어어억!
하늘이 열린다.
허공을 찢어발긴다.
곧이어 암흑공간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그야말로 ‘거대한 검’이었다.
지고의 검이라 불리는 검.
히든 클래스 ‘지고의 검성’이 가진 유일무이한 고유 스킬이자 히든 스킬!
검성이라 불리는 것들 중에서도 감히 절대적 우위에 선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무기이며, 오로지 ‘신의 격’을 지닌 존재만이 휘두르는 게 가능한 ‘신의 검’이었다.
예전 질투의 악마 산샤가 완성되었을 때, 그를 손짓 한 번으로 짓뭉갠 그 검이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빌헬름은 가만히 소환된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태껏 마주한 그 어떠한 검 중보다도 감히 압도적이라 칭할 만 했으므로.
란돌프는 이 검으로 말미암아 빌헬름을 분쇄해버릴 작정이었다.
검환으로 이루어낸 거대한 손으로 지고의 검을 잡은 채.
“아름답지 않나? 이것은 한때 죽음의 신이 휘둘렀던 ‘운명의 검’이다. 등급을 정할 수 없는 ‘규격외’의 작품이지.”
“죽음과 삶. 두 운명이 합쳐져 만들어진 검이로군.”
“······ 보이는 것이냐? 역시, 네놈은 ‘소질’이 있나보구나!”
란돌프는 짧게 감탄했다.
지고의 검에 얽힌 이야기를 빌헬름은 단번에 꿰뚫어본 탓이다.
이 운명의 검이 어떻게 소환될 수 있었는지를 말이다.
심연미궁.
그곳의 ‘보스’로 소환된 구제국 육각의 영웅 라일리.
하지만 그는 두 가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성을 잃었을 땐 죽음이라 일컬어지던 ‘지고룡’으로 변했으며, 이성을 잃지 않았을 땐 찬란한 영웅 ‘라일리’가 되어 인류를 구원했다.
라일리는 자신의 반쪽인 지고룡을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지고의 검성’으로 완성되었다.
그러한 반대되는 운명이 합쳐져 사용할 수 있게 된 게 바로 저 검, ‘지고의 검’인 것이다.
죽음과 삶.
두 이름의 운명을 지닌 검.
‘왜 이런 게 보이는 거지?’
허나 이 역시 빌헬름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란돌프가 지나온 시련을 어떻게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인지.
게다가 심연 미궁의 시련을 돌파한 게 눈앞에 있는 란돌프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겠다.
개 같은 신.
저 운명의 검은, 그가 직접 이룩한 업적이라는 걸.
란돌프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이 검을 절대로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빌헬름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란돌프는 지금 ‘죽음’을 택했다.
말 그대로 상대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
운명의 검이 선사하는 죽음의 명제는 절대적이다.
절대로 피할 수 없고, 막을 수도 없다.
확실한 사망선고를 받은 셈이다.
“제법 즐거웠다, 빌헬름.”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지고의 검이 바닥으로 처박히기 시작했다.
빌헬름은 검을 들었다.
곧이어 지고의 검이 빌헬름을 삼켰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이곳에 계십시오, 황자님. 제가 병사들을 유인해보겠습니다.”
“가, 가지마. 이런 어두운 곳에서 나 혼자 어떻게 있어?”
“며칠만 견디십시오.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반드시!”
어두운 동굴 속이었다.
나벨룽의 숲.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주인 없는 동굴.
그곳에서 늙은 기사가 한 소년을 토닥이며, 이내 어딘가로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몸도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이 옷도 걸치지 않은 채 괴물이 득실대는 숲에서 몇날며칠을 버티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배, 배고파, 목말라······ 추워······.”
고작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소년은 괴로워했다.
왜 자신이 이런 수모를 겪어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르혼 제국.
판게니아에서 가장 강성하며 거대한 그 제국 황제의 아들이 바로 자신이건만.
“내가 진짠데······ 내가 진짜라고······.”
쫓겨난 것이다.
가짜에게.
소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교하게 자신을 본 따 만들어진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고 있었다.
한데, 아무도 소년을 믿어주지 않는다.
도리어 소년을 가짜 취급하며 죽이려고 들었다.
만약 노기사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으리라.
하지만 겨우 살아서 도망쳤다고 한들, 과연 이게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아무것도 하기 싫어.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돼?”
소년은 동굴의 벽면에 기대어 늘어진 채 자포자기했다.
애초에 소년은 황자다.
노력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고, 가만히만 있어도 빛이 나는 존재였다.
이런 더럽고 습한 곳에서 발가벗은 채 있는 모습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발에 물집이 잡히고, 몸 전체에는 땟자국이 만연하다.
이런건 노예들이나 하는 모습이다.
‘꿈이야. 지독한 꿈.’
소년은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있기를.
제국의 품에서 예전과 같은 영광을 영위하기를.
······ 하지만 현실은 참혹했다.
눈을 뜨자, 여전히 동굴의 안이었으니까.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야?”
게다가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노기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결국, 병사들을 유인한 끝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리라.
부르르르!
소년은 몸을 떨었다.
춥다. 괴롭다.
하지만 동굴 바깥은 위험하다.
바깥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럴 용기조차 없는 겁쟁이.
무언가를 이룩해내는 근성조차 없다시피했다.
그제야 소년은 자신이 혼자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깨달음뿐이었다.
단순히 깨닫는다고 모두가 변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
소년은 죽어가고 있었다.
죽음을 은연중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차피 살 수 없다는 무력감이 전신을 지배한 상태.
‘죽자.’
죽는거다.
살 의지도, 필요도 없다.
어쩌면 자신이 진짜 가짜일 수도 있었다.
기억도, 육체도 전부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곳을 나가봤자 지옥뿐이다.
단순히 숲을 헤쳐나간다고 끝나지 않는다.
제국의 추격은 집요하므로.
어차피 죽을 것이다.
짹.
짹짹!
그때였다.
파랑새가 동굴 안으로 들어온 건.
죽어가는 와중, 소년은 겨우 눈꺼풀을 들었다.
어째서 파랑새가 동굴 안으로 들어온 걸까.
소년이 힘겹게 손을 내밀자, 파랑새가 손가락 위에 앉았다.
“살고싶니?”
“······?”
환청인가?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새가 말을 했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새가 계속해서 지저겼다.
“모든 걸 잊고, 잃어도, 한 가지 소원을 이룰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도전해보고 싶지 않니?”
소원을 이뤄?
내가 황제라도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허.
죽음이 다가오자 헛것이 보이는 게다.
“너는 아주 훌륭한 자질을 지니고 있단다. ‘성혈’을 말이야. 이대로 죽기엔 아깝지 않니?”
그럼에도 파랑새는 포기하지 않았다.
갈라진 입술을 겨우 열어서 물었다.
“넌······ 뭐··· 냐.”
그러자 파랑새가 말했다.
“나는 이 세계의 운영자란다.”
“운··· 영··· 자······?”
운영자.
무언가를 운영하는 사람.
하지만 파랑새가 무엇을 운영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게임마스터. 세계의 뒤에서 지워진 채 존재하는 자란다.”
동시에 파랑새의 두 눈이 보석처럼 새파랗게 빛났다.
“나와 함께 ‘천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니?”
*
지고의 검이 빌헬름을 삼키기 직전.
찰나와 같은 순간에.
‘아아.’
떠올랐다.
기억이.
가려져있던 장막이 마침내 벗겨졌다.
‘나는 분명히.’
그곳에서.
나벨룽의 숲에서.
‘파랑새’를 만났다.
스스로를 세계의 운영자라고 칭하던 이름없는 존재.
지워진 자.
하지만 빌헬름의 기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본래라면 빌헬름의 기억은 완전하게 지워졌어야만 한다.
기억과 의식, 영혼은 잠식당한 채 잠겨있는 상태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갖고 있었던 것이다.
기억을. 의지를.
완전하게 지워진 게 아니라, 0에서부터 새로 시작했을 따름이다.
‘나는 분명히······.’
동굴의 소년은 빌헬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빌헬름과는 모든 게 달랐다.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쉽게 포기하고, 아무런 용기도 없는 겁쟁이에 불과했다.
그랬는데.
그랬을 텐데.
‘내가 아닌, 너를 닮고 싶었던 거라고 말하고 싶은 게냐?’
출렁!
순간 세상이 출렁인다.
다시금, 빌헬름은 기억의 늪에 빠졌다.
*
무엇을 하는 걸까.
내 몸으로, 이놈은.
바닥을 기어 동굴을 나가더니 잎에 맺힌 이슬을 핥는다.
개미를 주워먹질 않나, 생초를 뜯어먹어 배탈이 나질 않나.
그렇게 장장 3일 동안 온갖 해괴한 짓은 다 하더니 난데없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체력낭비 같은데.’
답답하다.
자신의 몸임이 분명한데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아침이면 모든걸 피하고, 도망치며, 악착같이 먹을걸 구해온다.
그리곤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는 게 일과의 전부다.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내가 더 잘 휘두르겠군.’
심상의 늪에서 검을 휘두른다.
동작을 따라하다보니 군더더기가 많은 것 같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렇게 휘두르기만 해서는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히리라는 걸.
빌헬름은 단점을 보완하듯 검술을 수정하며 계속해서 휘둘러댔다.
어쩌면 경쟁심의 발로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심상의 늪은 무저갱과 같아서,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으니까.
‘질 수 없다.’
놈이 한다면, 나도 한다.
아니, 나는 놈이 하는 것 이상을 달성할 테다.
나보다 못한 놈에게 언제까지고 주도권을 내줄 수는 없으니.
‘··· 진짜 징글징글한 놈이로군.’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느정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빌헬름이 보기에도 자신의 몸을 점거한 놈은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보통 남의 몸을 이 정도로 근성있게 굴리나?
게다가 지루하기 그지없는 일상을 필사적으로 영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의문이었다.
이렇게 한다고 과연 숲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나벨룽의 숲.
이 숲은 온갖 괴물의 천국이다.
수십, 어쩌면 수백종의 괴물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놈들의 방식을 전부 터득하고 있다고 해도 불가하다.
고작해야 엎드린 채 바닥을 기어다니는 게 전부인 상황.
동굴의 앞을 수십 미터 전진하는데도 몇시간이 걸리는데 이 광활한 숲을 언제 빠져나간단 말인가.
미친 짓이다.
‘······ 허.’
그런데 그 미친 짓을, 어느 순간 ‘놈’이 하기 시작했다.
포복한 채로 그간 모은 식량과 생수를 가지고 엉금엉금 동굴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어느정도 하다가 포기할 줄 알았다.
숲을 빠져나온 것 자체가 시련의 연속이다.
실제로 연거푸 죽을뻔한 위기가 찾아왔다.
3일이 지났을 땐 보유한 식량과 식수도 전부 떨어졌다.
하지만 빌헬름은 계속해서 감탄하고 있었다.
틈을 보고, 기다리며, 기회를 찾는 능력은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었다.
‘여기까지인가?’
허나, 그것도 여기까지다.
물자가 전부 떨어졌고, 거점과도 너무 멀어졌다.
아무리 대단한 초능력을 지녔다고한들 이제는 빌헬름이 보기에도 한계인 듯싶었다.
그럼에도 ‘놈’은 포기하지 않았다.
장장 10일 동안, 잠도 거의 자지 않은 채로.
엉금엉금 기어서 숲을 탈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미쳤군.’
빌헬름이 처음으로 ‘놈’에게 경외감을 느낀 순간이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어땠을까.
숲을 탈출할 수 있었을까?
빌헬름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몸을 점거하고 있는 이놈은 숲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반면 자신은 모른다.
도전하면 백중 백 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몸을 점거한 이놈은.
‘······ 이놈은 신인가?’
······ 진정 ‘개 같은 신’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