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296화 (296/317)

내 전부를 다해

게임 ‘판게니아’를 시작하고 캐릭터 빌헬름을 생성했을 때. 

나는 시작하자마자 진지하게 빌헬름의 삭제를 고려했다. 

“······ 난이도 미쳤네. 접을까?” 

깨어난 빌헬름의 상황과 상태가 너무나도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동굴의 안. 

며칠을 제대로 못 먹었는지 ‘허기’와 ‘쇠약’ 그리고 ‘탈수’ 증상을 갖고 있었다. 

캐릭터를 만들다 보면 간혹 그런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몸을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중증인 경우는 처음이었다. 

뿐만인가. 

“스타팅포인트가··· ‘나벨룽의 숲’? 최소 9레벨 사냥터잖아?” 

이보다 더 최악의 상황은 없었다. 

나벨룽의 숲은 인간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는 곳. 

온갖 종류의 괴물들이 설치는 고레벨 사냥터다. 

제대로 육성한 최소 9레벨 이상의 전사만이 겨우 이곳에서 사냥할 수 있지만, 괴물의 종류가 워낙에 많고 변수도 많은 탓에 아무도 오지 않는다. 

이곳에서 생존하라니. 

동굴을 나가면 5분도 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변변찮은 무기도 없었다. 

가진 거라곤 악과 깡밖에 없는 상황. 

“··· 그나마 내가 나벨룽의 숲 지리를 잘 알아서 다행이지.” 

광활한 숲. 

이곳은 적응만 되면 꽤 괜찮은 사냥터였다. 

좋은 사냥터는 경쟁이 심한 법이고, 단일 종류의 괴물만 출현해서 재미가 없다. 

반면에 이곳은 경쟁도 없고,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하기에 쉴 틈이 없었다. 

하여 내게는 제법 괜찮은 사냥터였지만. 

‘진짜 삭제할까?’ 

문제는 캐릭터의 레벨이 1이라는 것. 

차라리 삭제하고 새로 키우는 게 나을 정도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낭비였다. 

어떻게든 산다고 해도 사냥 자체가 불가능하며, 나벨룽의 숲을 빠져나가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될지 모른다. 

내가 아무리 신적인 컨트롤의 소유자라한들 1레벨의 캐릭터로 9레벨 이상의 괴물을 사냥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어떻게 할까. 

지울까, 말까. 

나는 잠시간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흠. 어떻게든 되겠지.” 

우선 해보기로. 

바닥을 기어 동굴을 빠져나온 뒤, 주변에서 자생하는 풀을 뜯어먹었다. 

대부분 독초지만 먹어도 되는 풀의 종류가 몇 있었던 덕이다. 

풀잎에 맺혀있는 이슬을 핥아먹고, 기어다니는 벌레 따위를 주워먹으며 몸상태를 회복하는데 전념했다. 

가끔 운이 좋게 괴물이 먹다남긴 사체를 발견하면 한 입이라도 베어물었다. 

그렇게 3일. 

몸을 회복하는 데에만 무려 3일이 소요됐다. 

이것도 기적같은 일이었다. 

만약 게임이 1인칭 시점에서 진행됐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판게니아는 인칭전환이 자유로운 게임이었고, 나는 3인칭으로 진행하며 멀리서 출현한 괴물의 움직임을 일일이 계산한 뒤 움직여왔다. 

나벨룽의 숲에 출현하는 괴물은 모두 ‘선제공격’을 하는 성질이 나쁜 놈들 뿐이지만, 시야각이 좁아서 움직이는 패턴만 어느정도 숙지하면 어떻게든 피하는 것 자체는 가능한 것이다. 

“진짜 헬 난이도네······.” 

하지만 몸을 회복했다한들 여전히 상황은 최악이었다. 

우선 숲을 빠져나갈 수가 없다. 

다른 캐릭터로 원조를 해보는 것도 진지하게 생각해봤지만, 지금 이 캐릭터가 있는 구역은 ‘나벨룽 숲의 왕’이 있는 곳이었다. 

판게니아가 시작되고 단 한 번도 정복된 적 없는 레이드 보스 몬스터. 

자칫 잘못 들어왔다간 그대로 죽는다. 

이딴 똥망캐를 위해 겨우 키운 고레벨 캐릭터를 위험으로 몰아넣을 순 없는 노릇. 

최소한 이 구역이라도 벗어나면 모를까. 

허나 조심에 또 조심을 한다고 한들, 한 마리의 괴물도 사냥하지 않고서 벗어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할 수 있는게 동굴에서 검 휘두르는 것밖에 없잖아.’ 

게다가 무기라곤 조잡하게 만든 나무로 된 검 한자루뿐. 

이 동굴조차도 언제 괴물이 침입해올지 모른다. 

그런데, 왜일까. 

이런 최악의 상황이 도리어 내 도전욕구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휙! 휘익! 

나는 검을 휘둘렀다. 

몇날며칠을 계속해서. 

휘두르고,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 나벨룽의 숲을 빠져나온 건 그로부터 장장 한 달이 지난 뒤였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가 이 캐릭터, ‘빌헬름’에 애착을 갖게 된 건. 

욕심이 났다. 

제대로 키워보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명예로우며 불굴의 의지를 가진 기사로.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상징으로.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기본기가 탄탄했기에 성장속도도 빨랐다. 

하여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의 시련들을 연거푸 깨나갔다. 

어느덧 기사왕이라 불리며, 수많은 이들의 희망이 되었을 때. 

나는 또 다른 욕심이 생겼다. 

‘대원정.’ 

마왕을 잡고 싶다고. 

마왕 사냥은 게임 판게니아의 최종목표. 

놈을 잡는 순간 게임은 종료되고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된다. 

그러기 위해 기사단을 키우고, 각국을 돌며 병사를 모았다. 

모든 캐릭터의 좋은 장비란 장비는 모조리 몰아와 완전무장도 시켰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버그’로 인해 빌헬름은 사망하고 말았다. 

분했다. 화가 났다. 

완벽했을 터인 대원정이 고작 버그 때문에 실패하다니! 

‘사실 내가 부족했던 게 아닐까?’ 

······ 완벽하다 자부했으나. 

빌헬름의 검을 본 순간부터. 

빌헬름이 휘두르는 검을 직접 마주했을 때부터. 

나는 생각을 달리했다. 

사실은 내가 부족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고. 

투신의 탑을 오르기 시작한 빌헬름의 모습은 내가 직접 플레이했던 캐릭터와는 모든 게 달랐으므로. 

나는 어둠 속에 잠긴 채 검을 들었다. 

휘익! 

휘둘러본다. 

하지만, 빌헬름의 검에는 미치지 못한다. 

검 숙련도 32레벨. 

검강을 피워내고, 그 이상의 무위에도 도달했지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빌헬름의 검은 틀림없이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빌헬름을 플레이했을 때보다도 더 상위의 경지다. 

이는 곧 빌헬름이 홀로 이룩한 경지라는 뜻이다. 

이곳,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늪과 같은 어둠 속에서 빌헬름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둘러왔던 것이다. 

휘익!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 

무겁게, 더욱 무겁게. 

하지만 한없이 부드럽게. 

빌헬름은 이곳에서 오롯이 자신만의 검을 만들어냈다. 

천지개벽. 

하늘과 땅을 열고, 다시 만드는 검을. 

새로운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싶었던 빌헬름의 소망이 담긴 검. 

나 역시 제대로 사용했다고 자부했으나 천지개벽의 진정한 묘리는 담지 못했다. 

그가 사용하는 천지개벽은 내가 사용하던 천지개벽과는 그 격이 달랐으니. 

‘하늘을 열고.’ 

천(天). 

상단전을 연다. 

보통의 무인은 배꼽에 위치한 하단전을 열고 단련하며 내공을 쌓는다. 

머리에 존재하는 상단전은 초능력과 같은 능력에 기반하며, 이를 연 인간은 신선과도 같은 힘을 발휘하나 수명이 극도로 짧아지는 등의 부작용이 생긴다. 

하여 하단전을 연마한 뒤 상단전을 여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빌헬름은 달랐다. 

그의 검은 먼저 하늘을, 상단전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땅을 연다.’ 

지(地). 

땅은 받아들인다. 

하늘의 기운을 하단전에 담는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이치를 본다. 

보고, 느끼며, 마침내 한 걸음 내딛는 것. 

그렇게 세상으로 나아가면. 

‘세상을 연다.’ 

개(開). 

비로소 세상을 알게된다. 

빌헬름은 검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고,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벽(闢)에는 이르지 못한다. 

‘나를 연다······.’ 

세상 전부를 알아도. 

오직 하나, ‘나’를 아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은 없었다. 

휘익! 

나는 검을 휘둘렀다. 

빌헬름을 좇아서. 

그의 궤적을 그리면서. 

닿고 싶었으니까. 

그가 내게 바랐던 것처럼. 

어느덧 나도 그에게 바라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검 숙련도’ 레벨이 상승합니다.》 

《검 숙련도가 33Lv을 달성했습니다.》 

《‘수련자의 산의 주인’으로부터 발생한 히든 퀘스트 ‘숙련도 레벨 초월(9)’을 완성했습니다!》 

《이곳은 자아의 무저갱. 그렇기에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 

《아무도 감탄하지 않습니다.》 

《달성하고 이룩했으나, 남은 것은 오로지 공허함뿐입니다.》 

《보상 ‘알 수 없음’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그 누구도 봐주지 않는다. 

성과를 이뤘음에도.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영역에 발을 디뎠음에도! 

그럼에도 빌헬름은 그저 계속해서 나아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빌헬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너를 응원한다.’ 

진심으로 나는 빌헬름을 응원했다. 

그가 역경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며 감탄하고, 갈채를 쳤다. 

하지만 30층에 도달하여 란돌프와 마주한 빌헬름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마치 ‘나벨룽의 숲’에 막 떨어졌을 때처럼. 

꿈도 희망도 없는 최악의 상황. 

하지만 적어도 그때의 한달만큼은 빌헬름과 내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빌헬름과 하나가 되어 검을 휘두른 유일한 순간이 아니었을는지. 

후아아앙. 

그 당시의 마음을 상기하자 내 주변으로 ‘황금률’이 떠올랐다. 

그렇게 나로부터 발생한 황금률의 실선은 빌헬름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게 무엇인지 본 순간 알았다. 

‘내 전부를 다해, 오직 너만을 응원하마.’ 

《모든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6,000h)’을 사용해 ‘빌헬름’을 응원합니다.》 

실선이 더욱 환하게 빛난다. 

나와 빌헬름이 연결되었다는 증거. 

하지만 부족하다. 

모두 사용했음에도 아직 완전하게 닿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모든 황금률의 조각을 사용한 상황. 

물론, 방법이 없진 않았다. 

《‘메인 퀘스트 2, 클래스 얻기’가 완료되었습니다.》 

《‘메인 퀘스트 3, 탑 오르기’가 완료되었습니다.》 

《‘메인 퀘스트 4, 암흑공간의 틈새를 메워라’가 완료되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메인 퀘스트’의 완료를 한꺼번에 진행했다. 

클래스를 얻고, 투신의 탑을 오르는 것. 

하지만 ‘암흑공간의 틈새’를 메우는 것도 함께 진행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내가 서있는 이곳을 ‘암흑공간’으로 판명한 걸까? 

《레벨이 올랐습니다!》 

《보상으로 얻은 모든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14,000h)’을 사용해 ‘빌헬름’을 응원합니다.》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도리어 좋았다. 

메인 퀘스트 달성 점수에 의해 받은 황금률의 조각. 

그리고 모든 보상을 황금률의 조각으로 전환해 나는 빌헬름을 응원했다. 

내 진심을 녀석에게 전하기 위해서. 

······ 상처가 치유된다. 

절대로 낫지 않을 저주들이, 심지어 두 주신들에 의해 당한 것들마저도 상상을 초월하는 축복에 의해 지워진다. 

지금껏 수많은 이들에 의해 받은 응원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슈우우욱- 

무기와 갑옷, 투구 등의, 생전 착용했던 모든 장비들이 생성되었다. 

전성기의 자신. 

모든 무력을 회복하여 마침내 휘두를 수 있는 상태. 

마왕을 상대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 

허나, 빌헬름은 가만히 그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비로소 모든 것을 되찾았음에도 딱히 기뻐하는 기색은 없었다. 

“··· 어이가 없군. 다시 나를 ‘문’에서 꺼낸 이유가 너인가?” 

다만 천천히 시선을 돌려, 상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영원의 신 란돌프. 

그러나 본래라면 빈 껍데기여야 할 그것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진리의 문에 바쳐져 사라졌던 또 다른 란돌프다. 

홀로 신의 섬에서 심연의 주인들과 태고의 존재들을 학살했던 자. 

멸망으로 불리었던 그 괴물이 빌헬름을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