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최강인가
보이지 않았다.
느껴지지도 않았다.
언제 산샤의 목이 잘렸는지.
분명한 건 산샤 정도로는 저 기사왕의 시선을 끌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샤가 누구던가.
“전 챔피언이······.”
“저 괴물이 한칼에······!”
산샤를 경험했던 자들이라면 모두가 경악할 대목이었다.
그의 움직임과 기술은 모두 완벽에 가까웠으니까.
별을 먹고 초월한 이들조차도 산샤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버거웠으니까.
한데, 모두에게 벽으로 작용했던 산샤가 허망할 정도로 쉽게 목이 잘린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다.
‘완벽에 가까우나, 완전하진 않다.’
라이가는 산샤를 짧게 평했다.
투신의 탑에서 오랜 시간 군림해온 산샤.
그에 대한 소문은 숱하게 접해보았다.
수많은 기술을 원본에 가깝게 사용한다고.
놈은 분명히 강하지만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다.
투신의 탑에 얽매어 최강을 자처한들 한계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보아하니 자신보다 강한 자와의 싸움이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떠한가.
만약 산샤가 아니라 라이가 본인이었다면?
‘검을 휘두르자 공간이 장악됐다.’
일정 공간 안의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빌헬름의 검술은 공간이 자연스레 공간을 장악한 것이다.
뿐만인가?
‘산샤의 힘을 그대로 반사했다.’
산샤가 만들어낸 황금의 용.
그 무력은 제법 대단한 것이었다.
어지간한 성 하나쯤은 간단히 날릴 위력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빌헬름은 산샤의 힘을 부드럽게 휘감고 튕겨내 반대로 타격을 입혔다.
손가락 하나로 호숫가에 거대한 파장을 만들 듯.
그야말로 최대의 효율을 자랑하는 극상승의 무공임을 라이가는 단번에 알아봤다.
‘··· 기사왕의 명성이 헛되진 않았던가.’
판게니아에 존재하는 두 기사왕.
빌헬름, 그리고 라이가.
하지만 둘은 만난 적이 없다.
간혹 무력의 비교가 이루어지곤 했지만 정확한 대조는 불가능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어찌 확실하게 비교할 수 있겠나.
만난 적도 없고, 검을 맞대어본 적은 더더욱 없는 둘의 강함을 단순한 내뇌망상만으로 우열을 가리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럴진대.
‘죽은 자가 살아돌아왔다.’
모두가 죽었다고 확신했던 자.
그의 유품마저도 세상에 돌아다니고 있다.
당장 제국도 빌헬름의 유품 중 두 개를 지니고 있었다.
이번 대회의 우승 상품으로 내건 ‘빛의 길’과 ‘거룩한 길’ 말이다.
상식 밖의 일.
하지만 산샤의 목을 벤 걸 보면 틀림없이 저 녀석은 기사왕 빌헬름이 맞았다.
후우우웁.
숨이 가빠지고, 손에 절로 땀이 쥔다.
당장이라도 겨루고 싶다.
검을 나누고 싶다!
“저의 검을··· 받아주시겠습니까?”
허나 앞으로 나선건 다른이였다.
······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
그녀는 격정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이 따르던 기사왕에게 검을 겨눴다.
그러자 산샤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빌헬름이 말했다.
“너의 검이라면 언제든지.”
세렝게티의 눈빛이 일순간 더욱 흔들렸다.
인자하다.
예의 그때처럼.
언제나 자신의 검을 받아주던, 그 당시의 빌헬름을 보는 것만 같았다.
수많은 의문과 의혹이 있지만 구태여 입에 담진 않았다.
기사는 검으로 말하는 법.
“······ 그럼, 갑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쉬이이익!
세렝게티는 몸을 활처럼 휘게 한 후, 일순간 탄력을 이용해 쏘아져나갔다.
채엥!
검과 검이 부딪힌다.
초근거리에서 세렝게티는 있는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채엥! 채엥! 채에엥!
한참이나.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고,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허억! 허억! 허억!”
세렝게티는 격하게 숨을 내쉬었다.
닿지 않는다.
하기야 닿을 리가 없었지만.
“검에 감정을 담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을 터인데?”
“······.”
“여전히 말썽꾸러기로구나, 너는.”
“······.”
아아.
세렝게티는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아냈다.
검을 마주하자 이제는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이 자는, 이 남자는······.
언제나 든든하게 그들을 지탱해주고, 그늘을 만들어주던 거목(巨木)이자.
한결같은 충성을 맹세했던 기사왕 빌헬름임이 분명했으므로!
또한, 세렝게티를 ‘말썽꾸러기’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더불어 한 가지 더 알게 되었다.
“그 몸은······.”
혹여나 마왕이 차지한 육체인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이 몸은 빌헬름의 몸이 아니다.
빌헬름의 격과 외형을 지니고 있으나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마치 누군가의 몸을 빌려쓴 듯한.
오랜시간 수도없이 보고, 대련을 해본 세렝게티만이 알 수 있는 차이.
“‘신’과 내기를 했노라.”
······ 신과 내기를 했다?
빌헬름은 신을 싫어한다.
여신의 기사라고 떠받들어지지만, 빌헬름은 지독한 불신자였다.
이 역시 그의 최측근이었던 기사들만이 알고 있던 사실.
하여 세렝게티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내기를······?”
“10시간 이내로 이 탑을 내가 정복할 수 있는가, 없는가.”
“······!”
“그리고 이건 나의 ‘신’이었던 자의 몸이니라.”
“예······?”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과의 내기, 그리고 자신의 ‘신’이었던 자의 몸이라니.
신의 육체를 빌어 잠시 소환되었다는 말일는지.
더 묻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한숨 자거라. 많이 피로해보이는구나.”
툭!
실 끊긴 인형처럼, 세렝게티의 육체가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아, 안 돼······!’
세렝게티가 급히 빌헬름을 올려다보았으나 어느덧 정신이 멀어졌다.
빌헬름은 그런 세렝게티를 바라보곤,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짓더니 이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을 굳히며 시선을 옮겼다.
“······ 그대와는 오래전부터 한 번 겨뤄보고 싶었지.”
시선의 끝에, 라이가가 있었다.
제국제일검이자.
25층에서 모두를 압도했던 괴물!
인간의 정점이자, 판게니아 최강자라 불리는 존재.
그가 검을 들어 빌헬름을 겨누었다.
*
‘강해졌군. 여전히 올곧고.’
빌헬름은 방금 전 나눈 세렝게티와의 검격을 떠올리며 내심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세렝게티.
그 말썽꾸러기가 여전히 살아남아 자신의 의지를 잇고 있었다.
기사단에서 함께할땐 언제나 사고만 쳤다.
기사단의 홍일점이자 막내이기도 했거니와 유독 자신에게만 말이 많아서 곤혹스러웠던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특히 검에 대해서 떠들면 하루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하여 조금 더 놀아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다.
빌헬름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개 같은 신이여! 네가 만든 모든 세계를 불살라주마!
개 같은 신.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점거하고 움직이던 빌어먹을 신!
그 신의 육체가 현재 자신의 몸이었다.
태양신의 옥좌와 막대한 황금률로 인해 잠시 빌헬름의 영혼이 이 몸에 정착한 것이다.
‘피나. 네가 내 영혼을 보듬어주고 있었구나.’
쌍둥이 여신 레아와 피나.
레아는 멸망과의 싸움에서 패배해 32개의 별로 나뉘었다.
그리고 피나는 마왕에게서 빌헬름의 영혼을 지키고자 스스로를 던졌다.
덕분에 빌헬름의 영혼은 피나의 의지 속에 남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잠시나마 강림할 수 있었으나, 내키지는 않았다.
왜 자신이 개 같은 신의 시련을 대신해주어야 하는가?
-너는 란돌프를 이길 수 없다. 내가 가장 심혈을 다해 키웠으니.
······ 뻔히 보이는 도발에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현명.
한때 자신의 몸을 움직이던 신.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게 자신이 아니라, 란돌프라는 말에 왜인지 짜증이 솟구쳤다.
하지만 부족했다.
박현명의 육체는 아직 미완성이었고 빌헬름이 움직이기엔 형편없었다.
제아무리 황금률로 보완되었다한들 마찬가지다.
-너라면······ 믿고 맡길 수 있지. 부디 우리를 도와다오, 빌헬름.
카라스.
그 멍청한 까마귀가 자신이 지닌 모든걸 내놓은 것이다.
그래달라고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음에도.
제멋대로 맡기고, 제멋대로 기대한다.
-이놈들, 까악!
-여신들······ 또 방해하는구나, 까악!
흉의 신과 재의 신.
두 까마귀의 신들은 빌헬름의 출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빌헬름도 그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기를 수락했다.
온전히 움직일 수 있는 10시간.
그 안으로 탑을 돌파해보겠노라고.
그렇게 빌헬름은 여신들의 의지를 이용해 ‘틈새’를 빠져나와 이곳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군.’
덕분에 말썽꾸러기와 다시 재회할 수 있었다.
말썽꾸러기 세렝게티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허드슨이라는 자도 이곳에 있었다.
‘저자가 네가 선택한 자냐, 세렝게티?’
솔직히 그다지 믿음직해보이진 않지만.
남자라면 자고로 강해야하는데 허드슨은 굉장히 유약해 보였으니까.
그래도 세렝게티가 선택한 남자다.
다른 면모로 강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 세아. 여전히 아름답군.’
성녀 세아도 그대로였다.
여전히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외면만이 아닌 내면이 더욱 아름다운 여자였다.
많은 게 변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자신이 지켜왔던, 지키고자 했던 가치들.
‘······ 개 같은 신이여.’
이걸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그러니 화해라도 하자고?
아서라.
빌헬름은 단지 개 같은 신에게 같은 경험을 공유하게끔 하고싶을 뿐이었다.
스스로의 몸이 누군가에 의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경험은 결코 달갑지 않을 터이므로.
‘지켜보아라. 그저 지켜만 보아야 할 것이다. 너의 몸이 어떻게 사용되고, 너의 의지가 어떤 식으로 뭉게지는지.’
그건 정말 지독한 경험이 될 테니.
그리고 보여주마.
빌헬름.
그 자체를.
*
라이가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수많은 심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셀 수 없이 많은 심상 속, 무의식의 영역에 존재하는 검 한 자루를 꺼내쥐었다.
그것이 그가 최근에 깨달은 심검영역.
곧이어 그의 심상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지배한다.
촤앙!
하지만, 막혔다.
빌헬름은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을 터인 심검을 쳐냈다.
허나 이미 예상했던 바다.
라이가는 오로지 죽일 생각으로 심검을 더욱 전개해나갔다.
상대를 죽이고자하는 의지 자체가 검이 되어 심장을 벤다.
촤르르륵!
······ 그럼에도 튕겨나간다.
아니, 튕기는 게 아니라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심검이 녹아내리고 사라졌다.
심장에 채 닿기도 전에.
‘순환이라.’
순환은 곧 자연이다.
빌헬름은 자연적이지 않은 것들을 모조리 배제시키는 힘을 지닌 게다.
설령 그것이 심검이라 할지라도.
직접 닿지 않으면, 저 순환의 방벽을 뚫는 건 불가하다.
하기야 이제 막 깨달은 심상 따위에 당했다면 도리어 실망했을 터.
‘일문(一門).’
라이가는 전력을 내기로 다짐했다.
인간을 상대로 팔가의 비기를 사용하는 건 본래 불문율이다.
제국에서 황금 염소를 상대할 때조차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미 죽은 자인 빌헬름은 예외였다.
화아아아악!
라이가의 전신이 붉게 물들며 봉인해둔 첫 번째 문이 열렸다.
꽈릉!
발을 내딛자 땅이 움푹 파인다.
이어 번개처럼 달려나간 라이가의 검이 빌헬름의 어깻죽지를 베었다.
촤악!
허나, 베여나간 건 자신의 오른팔이었다.
미리 대비했음에도 반격을 당했다.
검을 쳐내고 반격한 게 아니라, 검격을 흡수하듯 부드럽게 순환시켜 역으로 공격한 것이다.
“··· 허.”
어이가 없었다.
이토록 부드러운 검은 처음이다.
일문을 개방한 라이가의 힘은 압도적이다. 거인조차도 당해낼 수 없다.
그 강력하며 단단한 힘이 부드러움에 제압당했다.
하지만, 덕분에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라이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내가 이겼다.’
······ 이 싸움, 절대로 질 수가 없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