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291화 (291/317)

빌헬름

투신의 탑. 

페이즈 1 사흉 바알을 소드마스터 락투샤가 토벌하고, 페이즈 2 칼날용신마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격퇴되자 사람들은 ‘희망’을 갖고 들떠있었다. 

-의외로 할만할지도? 

-이대로만 쭉쭉 가자! 

-탑에 오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탑 자체의 난이도가 줄어드는 건 확실한 것 같아 

-나도 곧 오르려고! 

너나 할 것 없이 ‘투신의 탑’을 올랐다. 

물론, 단순히 도전을 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그저 어렵고 힘들기만 한 일이었다면 수십만의 숫자가 동시다발적으로 탑을 오를 리가 없으니까. 

-와. 보상 장난 아니네 

-특히 20층을 넘어가면 특수한 ‘신비’를 얻을 수 있는 모양이야 

-신비만 얻겠어? 장비, 클래스, 기타 등등 전부 다 있음 

-2세대 각성자들은 메인퀘도 같이 밀면 대박이겠다 

-백성전 성좌들도 침을 질질 흘리는데? 제발 올라 달래 

-SP 주는 거 실화냐? 

-대박. 경험치 수급 미쳤다! 

투신의 탑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한도 끝도 없었다. 

시련과 비례하여 그야말로 ‘모든 걸’ 얻을 수 있는 탑. 

하물며 인간은 얻을 수 없는 특수한 ‘신비’를 얻을 수 있다는 말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오르지 않을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주변 모두가 탑을 오르도록 독려하는 지경이었다. 

특히 성장이 정체된 이들일수록 더욱 필사적으로 탑에 도전했다. 

예컨대 한계 레벨이 올랐지만 경험치를 수급하지 못하고 있던 이들, SP가 부족해 재능 테크트리를 올리지 못하고 있던 이들 등등. 

심지어 백성전의 성좌들마저 앞장서서 탑을 오르길 종용하고 있었으니 안 오르면 손해인 지경이었다. 

하지만. 

-‘영원의 란돌프’한테 전부 지배 당했다고...?-이건 진짜 못 깨겠는데...? 

-미친. 라이가까지 지배됐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25층에 올랐던 최강자들. 

그들 모두가 ‘영원의 란돌프’에게 지배됐다. 

아마도 탑의 이상현상과도 관계가 있을 터. 

탑 전체를 감싼 ‘검은 손’에 의해 도망치듯 지배된 모양새였다. 

-탑으로 입장이 안 돼 

-빠져나올 수도 없나본데? 

-설마 전부 미끼였다고? 

-그 많던 도전자들이 전원 지배된 건가? 

50만이 넘어가는 도전자들. 

그들과 최강자들이 한꺼번에 지배되었다면 칼날용신에 도전하던 때보다도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더 이상 도전할 사람 자체가 없었으니. 

-이제 이틀 남았잖아 

-이대로 2일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설마 도전자들 전부가 적으로 돌아서는 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모두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탑이 쓰러지고, 저주 받은 란돌프가 튀어나오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막을 수 없다. 

아무도, 막지 못할 것이다. 

막아야만 하는 사람들 전부가 적으로 돌아선 탓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남은시간 47시간 43분.》 

《시간이 모두 소모되면 탑이 지상으로 쓰러지며, 저주가 방출됩니다.》 

《탑이 쓰러지면 탑에 존재하는 ‘저주를 뒤집어 쓴 모든 존재’가 ‘판게니아’와 ‘지구’를 습격합니다.》 

이틀도 채 남지 않은 시간. 

-아... 

-뭐 어쩌라는 거야? 더이상 도전할 수도 없잖아! 

-어떻게, 어떻게 해야 돼...? 

-탑에서 최대한 멀어져야 되나? 

-지금이라도 사람들 대피시켜야 하는 거 아니야? 

모두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탑이 쓰러지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도전을 할 수도 없다. 

설령 도전을 하더라도, 저 최강자 연합과 란돌프를 누가 이길 수 있겠나. 

그때였다. 

《탑의 이상현상에 의해 규칙이 수정됩니다.》 

《지금부터 ‘보스룸’이 실시간으로 ‘중계’됩니다.》 

《보유한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 혹은 ‘온전한 황금률’을 사용해 도전자, 혹은 영원의 란돌프를 응원할 수 있습니다.》 

《응원의 규격이 커질수록 응원의 대상자에겐 더 강력한 축복이 부여됩니다.》 

모든 각성자의 눈 앞에. 

동시다발적으로 투명한 화면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마치 TV의 화면처럼 생생하게 ‘중계’가 되기 시작했다. 

-이게 뭔.... 

-너희도 이거 보이냐? 지금 보스룸 상황? 

-미쳤네 

-전쟁? 

-도전자 전부가 보스룸에 있는데? 

척 보기에도 수십만에 다다르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물결. 

거대한 평원에 두 세력이 서로를 바라보는 상황. 

아직 탑을 오르지 않은 각성자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화면을 예의주시했다. 

-...압도적인 양이냐, 질이냐의 싸움이네 

-그런데 누굴 응원해야 돼? 

-루카리아? 

-두쪽 다 깨름칙한데 

-우리가 응원하면 지배의 저주가 풀리는 거 아닐까? 축복이 부여된다잖아. 그럼 저주도 풀 수 있다는 말 같은데? 

-맞네. 저주랑 축복은 완전히 반대되는 힘이니까 

-그럼... 라이가? 

-라이가는 탑에서 대회를 연 주최자잖아. 탑이 이렇게 되는데 일조했을 수도 있지 

-세렝게티는? 

-강하긴 하지만, 안 될 거 같은데... 

-그냥 영원의 란돌프를 응원하면? 

-미쳤냐? 

-가능성이 있기야 한데... 어지간한 황금률의 조각으로는 티도 안 날듯 

플레이어 톡을 비롯한 수많은 각성자 커뮤니티에서 설왕설레가 오갔다. 

하지만 좀처럼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다. 

확실하게 이렇다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어 

-부딪힌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했다. 

두 진영은 서서히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다. 

이대로 부딪히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으리라. 

··· 그 찰나였다. 

-? 

-??? 

-?????????????????? 

‘그’의 이름이 등장한 즉시. 

달려들던 두 진영은 거짓말처럼 모두 멈춰섰다. 

곧이어 그들의 중앙부에 나타난 남자를 보며 모두 물음표를 띄울 수밖에 없었다. 

-...뭐? 

-...빌헬름? 

-이름만 같은 거 아니야? 

-아니, 진짜 빌헬름 맞는 거 같은데.... 

······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으니까. 

단순히 이름만 보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동명이인으로 취급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난 그 남자는. 

분명히, 기사왕 빌헬름이 맞았다. 

-하지만 빌헬름은 대원정에서 죽었다고... 

-황금률 상점에 빌헬름 장비 다 분해돼서 나왔잖아? 

-맞아. 분명히 그랬는데... 

-아니, 잠깐만. 란돌프랑 빌헬름 둘 다 팬텀 아니었어? 

-어... 그러니까. 뭐지? 

-어떻게 둘 다 같이 존재할 수 있는 거지? 

-죽은 줄 알았던 빌헬름이 살아있고, 빌헬름은 사실 팬텀의 주캐가 아니었다? 

-란돌프랑 빌헬름이 별개의 캐릭터라고??? 

-와 씨 소름 

빌헬름은 죽었다. 

대원정에서. 

세렝게티가 공언하며 빌헬름의 정확한 서사가 밝혀진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그가 부활이라도 한 듯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빌헬름은 팬텀의 ‘주캐’로 예상되던 존재다. 

판게니아에 소환되는 조건은 게이머가 보유한 가장 강력한 캐릭터, ‘주캐릭터’가 사망할시였고, 실제로 빌헬름이 죽자 란돌프가 나타났다. 

빌헬름이 보유한 장비는 모두 황금률의 상점에서 분해된 채 등장했으니, 누가봐도 빌헬름이 팬텀의 주캐였음은 확실했다. 

··· 확실했을 터였다. 

-가짜 아니야? 

-그러기엔 세렝게티의 반응이.... 

-성녀 세아도... 

-최측근인 저 둘이 진짜랑 가짜를 구분 못할 리가 없잖아 

-만약 빌헬름이 죽은 게 아니라면 아직 팬텀은 소환 안 됐다는 뜻이야? 

-그럼 란돌프가 팬텀이 아니라는 건데? 

-란돌프는 누구야? 

-혹시 빌헬름도 저주로 소환된 거 아닐까? 

-그럼 보스로 등장해야지 왜 도전을 해? 

-진짜 맞다니까. 저 반응들 안보여? 

-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혼돈이고 혼란이었다. 

그동안 그들이 여겼던 모든 개념이, 사실이 복잡하게 뒤얽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확한 진실은 존재했다. 

어찌됐든 빌헬름이 등장했고, 란돌프에게 그가 도전하고 있다는 것. 

또한 곧이어 이어진 장면에. 

-아...! 

-아아...! 

그들은 더 이상 혼란해 하지 않았다. 

혼란해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고민, 상념 따위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 누군가가 빌헬름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 가십시오. 앞으로 계속 가십시오. 제 목숨을 바쳐 축복하겠습니다! 

-허나! 

-멈추면 안 됩니다! 절대로 뒤를 돌아보셔선 안 됩니다! 이 구간은 ‘파리 지옥’! 마왕의 마기가 가장 강렬한 곳! 뒤를 도는 자들을 모두 썩게 만듭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 지옥이었다. 

성녀 세아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사왕 빌헬름을 인도했던, 바로 그곳의 기억이었다. 

“아······.” 

잊었던, 잊고 있던 기억들이 마치 홍수처럼 쏟아진다. 

성녀 세아는 그동안 기억을 잃고 있었다. 

마왕에 의해 강제로 잊게 되었다. 

하지만 ‘그’를 본 순간. 

빌헬름이 나타난 그때부터. 

“아아······.” 

······ 떠오르고 있다. 

빌헬름과 함께한 원정. 

시작과 끝, 그 외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기억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나는······.’ 

그녀는 계속해서 기사들이 마기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희생문을 외우고 있었다. 

깨끗하고 아름다웠던 얼굴과 몸에는 온갖 마기를 품은 종기가 자라났고, 두 눈은 악마의 그것처럼 검은자위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성녀 세아. 그녀는 자신의 몸이 썩어가는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로지 마왕의 격퇴를 위해 모든 걸 내던졌다. 

하지만 그녀가 바란 건 그런 게 아니다. 

진정으로 그녀가 절망했던 이유는. 

모든 걸 잊게 된 계기는. 

“기사왕, 빌헬름이시여······.” 

··· 바로 빌헬름의 죽음이었다. 

그의 육체가 마왕에게 지배되었음을 깨닫고 모든걸 포기했다. 

그러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명히 그 육체는 마왕에게 빼앗겼을진대. 

“진정 그분이십니까?” 

“······ 맞다. 그분이.” 

세렝게티가 온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오만하기 짝이 없는 기세. 

여유와 표정 하나까지도. 

그녀가 오랜시간 옆에서 지켜보았던 그분이, 빌헬름이 분명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를 따라할 순 없었다. 

빌헬름만이 가진 고유의 분위기는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여, 세렝게티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사왕을 뵙습니다.” 

“··· 나의 유일무이한 분이시여.” 

성녀 세아도 마찬가지였다. 

세아는 곧이어 저 육체가 빌헬름의 것이 아님을 알아보았지만, 분명한건 빌헬름이 ‘강림’했다는 사실이다. 

저 영혼과 격은 틀림없이 빌헬름이었다. 

육체는 마왕에게 빼앗겼으나, 그 찬란한 영혼까지 빼앗긴 건 아니었던 것이다. 

“빌! 헬! 르으으음!!”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빌헬름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전 챔피언 산샤. 

투신의 탑에서 오랜시간 군림했던 최강자!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너와의 대결을!!” 

빌헬름. 

그는 한 번, 투신의 탑을 오른 적이 있다. 

하지만 산샤와의 대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산샤는 빌헬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으나 빌헬름이 탑의 정상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 

질투의 악마가 둘의 대결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데, 그 기회가 느닷없이 찾아온 것이다. 

“너도 나와의 대결을 고대하고 또 고대했을 터!” 

빌헬름. 너도 나와의 대결을 기대하지 않았더냐? 

일전 란돌프를 빌헬름의 전인, 혹은 본인으로 여겼으나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 진짜 빌헬름이 있으니까. 

이제 방해꾼은 없다. 

온전한 둘의 대결만이 있을 따름이다. 

스릉! 

산샤가 검을 쥐었다. 

동시에 산샤의 전신으로 강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모든 고유 기술을 사용했다. 

청룡각, 사룡의 검, 신검합일, 파이널 스트라이크, 파천무, 스톰 윈드, 피의 살육자······. 

100개의 기술을 합쳐 완성한 단 하나의 고유 기술. 

산샤의 스킬로 승화된 완전체의 공격. 

더 퍼펙트! 

스으으으으으! 

강이 하나로 집약되어 푸른 환을 만들었다. 

산샤의 검에 송골송곳 맺힌 강환들은 이내 각기 다른 색깔로 변하며 모든 원소를 품기 시작했다. 

수, 풍, 지, 화의 4원소를 품고 다시 하나로 합쳐지며. 

구오오오오오오! 

굉음과 함께 거대한 황금 용의 형상이 완성됐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닿는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치명적인 공격이 빌헬름을 덮쳤다. 

이내 자욱한 연기가 조금씩 걷혀가자. 

“······!!!” 

“······!!!” 

그곳엔 한 남자만이 서 있었다. 

산샤는 아니다. 

공격을 가했던 산샤는 어느덧 목이 잘린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 빌헬름은 그런 산샤를 쳐다도 안 본 채로 그들을 향해 말했다. 

“다음.”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