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
처음엔 의아했다.
제국의 대회가 진행되는 곳.
왜 그 장소가 하필이면 ‘투신의 탑’이었을까.
“카라스. 대회의 장소를 이곳으로 낙점하려고 처음부터 계획한 건가?”
나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아직 카라스는 빛의 옥좌가 무엇으로 발현되었는지 모른다.
무엇을 바치고, 무엇을 불러올지 예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저 내가 발악을 하고 있다고만 여기겠지.
나는 그 ‘틈’을 이용할 생각이다.
현재 탑에서 일어나는 일의 원인을 파악하는 게 먼저였으니.
그러자 카라스가 무표정하게 답했다.
“내가 대답해야할 의무가 있나?”
“어차피 태양이 저물기 전까지 할 것도 없지 않느냐. 라이가와는 무슨 거래를 한 거지?”
“··· 웃기는 놈이로군. 그렇다면 내가 먼저 물으마. 너는 무엇이냐? 무엇인데 ‘틈새’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거지?”
내 정체가 궁금하다는 말.
지구에서 온 박현명이라고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아드리움의 ‘현’이다.”
“아드리움의 현? 대회에 참가했던?”
“아아. 갑자기 층계가 무너지며 이곳으로 빨려들어왔다.”
거짓말은 아니다.
물론 ‘천재지변’으로 층계를 붕괴시킨 건 나였지만.
내가 대회의 참가자임을 밝히자 카라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인간이 틈새로 빨려들어와 재의 종족이 됐다? 예상대로 주신들의 변덕이 시작됐나보군.”
카라스가 힐끗 흉의 신과 재의 신을 흘겨봤다.
그런데 두 주신의 태도가 묘하다.
-······.
-······.
그저, 가만히 있다.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태껏 조잘조잘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태도와는 정반대였다.
나는 빛의 옥좌에 앉은 채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자, 카라스. 이제 네가 답할 차례다.”
카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처음보는 것일진대 투신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으니.
“······ 흠. 라이가와 거래를 했다. 재개장된 투신의 탑에 도전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
“굳이 그랬어야할 필요가 있나?”
가만히 있어도 많은 전사들이 알아서 투신의 탑을 올랐을 터다.
더 높아진 층고.
더 강력해진 챔피언과 탑의 주인.
이 탑은 도전의식을 자극하는 요소밖에 없었으므로.
그럼에도 이토록 급하게 사람들을 끌어모은 이유가 무엇일까.
“처음에는 그저 많은 자들이 ‘투신의 탑’을 올라주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오롯이 내가 가꾸고 만들어놓은, 예전과는 완전하게 달라진 이곳에.”
질투의 악마에게 사로잡혔던 당시.
그때와는 완전하게 달라진 투신의 탑에 더 많은 이들이 오르고, 도전하길 바라는 순수한 마음의 발로였다.
반짝반짝하게 황금으로 빛나는 란돌프의 석상을 세워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탑의 변화를 보여주고 싶었을뿐.
다시 옛적의 찬란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을뿐이었다.
······ 처음에는 분명히 그러한 마음밖에 없었다.
“그럼 지금은 처음과 의도가 달라졌다는 말인가?”
허나 현재에 이르러선 그 순수함의 의도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뜻이다.
곧이어 투신 카라스가 입을 열었다.
“란돌프의 등장이 모든걸 바꾸어놓았다.”
“······챔피언 란돌프가 나타난 게 문제다?”
카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란돌프가 폭주한 채로 탑의 정상에 소환되었더군.”
“······?”
란돌프가 폭주한 채로 소환되었다고?
설마 나 때문인가?
영혼이 없는 빈껍데기로 소환되어서?
의아해하며 바라보자 카라스는 주신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후 탑에 소환된 란돌프는 분열하기 시작했다.”
분열했다.
그의 서사가, 존재가, 수많은 ‘이야기’들이.
지금 탑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그로 인한 것이다.
“흉의 신이 란돌프를 완전한 ‘흉왕’으로 만들기 위해 해놓은 짓거리다. 그리고 ‘재의 신’은 내가 아닌 너를 새로운 ‘재의 왕’으로 낙점한 것 같군.”
“······ 그게 무슨 소리냐?”
잠깐.
일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카라스가 아니라 저 두 주신이란 말이었다.
란돌프와 나를 흉의 왕과 재의 왕으로 추대한 뒤 둘 중 하나만을 남기겠다는 계획.
란돌프가 탑에 소환된 직후부터 그러한 흉계를 꾸몄다는 뜻일는지.
카라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열변을 토했다.
내가 아닌 주신들을 향해.
“뿐만 아니라 저 변덕스러운 주신들은 내가 지닌 왕의 자격을 박탈하고, 투신의 탑에서 제외시키겠노라고 결정했다. 이제와서, 내가 모든 걸 되찾은 이 때에! ‘멸망’에게 멸망당할 그때처럼 또······!”
꽈드득!
카라스가 주먹을 으스러지게 움켜쥐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저 주신들은 변하지 않는다.
멸망이 출현하고, 인간들의 주신인 쌍둥이 여신은 스스로를 희생하며 그들을 구원하고자 할 때.
저 두 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서로 싸우고만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일족이 몰살을 당하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이.
이윽고 흉의 신과 재의 신이 입을 열었다.
-카라스. 너는 우리의 싸움을 멍청한 짓으로 치부하지.
-허나 걱정하지 말거라. 드디어 결판의 때가 다가왔으니.
-마침내 우리가 바라마지않던 완벽한 대적자가 등장했으니!
-······ 이 모든 게 천명이니라. 저 아집스러운 ‘천상’과 ‘멸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둘은 ‘흉왕’으로 탑의 정상에 있는 란돌프를 소환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나와 란돌프, 둘 중 하나만을 남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란돌프가 아닌 투신 카라스가 소환되었다.
-카라스. 한데 란돌프가 지닌 흉왕을 먹어치웠느냐?
-멍청한 짓이다. 자격을 박탈당한 너는 흉왕을, 란돌프의 존재를 감당할 수 없다.
-‘투신의 탑’은 이제 너의 것이 아니야.
-새로운 흉의 왕과 재의 왕. 완벽한 두 대적자의 대결만이 우리의 승패를 결정지으리라.
란돌프가 분열하며 흉왕으로 거듭나기 직전, 카라스는 란돌프에게서 발현된 흉왕의 인자를 먹어치웠다.
바알도, 칼날용신과 연결된 신격도, 끔찍한 흉조도, 영원의 란돌프도 모조리 분리된 이유는 오직 흉왕의 발현을 위함이었으므로.
두 주신의 계획을 눈치챈 카라스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재건했다. 겨우 돌아왔단 말이다. 흉의 일족도, 재의 일족도 모두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겨우 거머쥐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돌아가봤자다.
-어차피 ‘멸망’에게 멸망할 터.
-모든 탑을 다시 잃게 되겠지.
-재건하고, 수복해도, 쓰러지기 마련이다.
-그날이 머지 않았다, 카라스여.
-‘멸망’의 부활이.
-‘멸망’의 탄생이!
흉의 신과 재의 신은 우려하고 있었다.
멸망이 다시 나타날 그날을.
아무리 재건하고 복구한들 지금 이대로라면 어차피 멸종당할 따름이다.
그 전에 더 완전한 존재로 거듭나야만 한다.
그래야만 제대로된 종족을 번성시키고 멸망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카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너희 둘이 합쳐진들 더 완전한 존재가 될 것 같은가? 정녕 그렇게 생각하느냔 말이다, 겁쟁이 주신들이여!”
둘은 겁쟁이일 뿐이었다.
멸망에게 멸망당한 그때도.
어차피 막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다.
아니면 두 주신이 싸우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승자가 패자를 먹어치우고 하나가 된다고?
그리하여 완전한 존재로 거듭난다고?
멸망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보다 강력해진 주신과 일족으로?
······ 싸워보지도 않고서.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으면서!
일족들이 죽어나갈 때 마음대로 두 주신은 그리 결정지은 것이다.
“차라리 우리의 주신이 여신이었다면 자격을 박탈한다 해도 기뻐하며 받아들였으리라. 하지만 너희는 아니다. 너희는 내 주신이 아니야······!”
쌍둥이 여신은 패배가 확정된 상황에서도 몸을 던졌다.
비록 소멸했으나, 세계의 완전한 멸망만은 막았다.
패배가 확정되었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판게니아는 멸망했을 터.
저 두 겁쟁이와는 확실하게 다르다.
그러니 거역한다.
“흉왕도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시 힘을 되찾으면 너희의 변덕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래서다.
이곳, 틈새의 접근을 막은 것은.
또한 란돌프가 분열할 때, 카라스가 흉왕의 인자를 먹어치운 것도 오직 이 때문이었다.
두 주신에게 끌려다니지 않고자.
그들의 계획대로 되게 놔둘 수는 없으니까.
······ 동시에 카라스의 서슬퍼런 눈초리가 나를 향했다.
“그러니 너는 죽어야만 한다. 아드리움의 현.”
그는 다짐하듯.
더욱 크게 외쳤다.
“다시 나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선. 저 멍청한 주신들의 결정을 번복시키기 위해선!”
펄럭!
카라스의 날개가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
비정상의 정상화.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겠다는 말.
이 모든 상황의 원흉은 두 주신이 맞았다.
하지만 이 상황을 유발한 건 나였다.
나의 존재가, 두 신의 종결을 불러왔다.
란돌프와 나.
완벽하게 대비되는 우리 둘의 출현이 주신들을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 어둠이 온다.’
나는 저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태양이 저물어간다.
《‘재의 시련(6)’ - ‘투신 카라스’와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이제는 결정할 시간이었다.
‘왜 빛의 옥좌가 같이 소환되었는지 알겠군.’
이것이야말로 흉왕의, 란돌프의 의지가 아니었을까.
투신 카라스가 자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 보낸 마지막 안배.
주신을 거역한 카라스의 말로는 너무나도 뻔했으니.
또한, 이 모든 시련의 돌파구는 이것 하나뿐이었으므로.
‘내가 이 탑을 오른 순간부터 모든 건 시작됐다.’
탑의 정상에 란돌프가 소환되고, 내가 탑을 오를 때부터 이 모든 상황은 예견된 것이었다.
허나.
‘계획대로 흘러가게 놔둘 수는 없지.’
흉의 신과 재의 신이 짜놓은 흉계에 휘둘리지는 않을 것이다.
뻔뻔하게 모른척했지만 둘은 이미 모든 것을 설계해놓았다.
란돌프가 흉의 왕이 되도록.
내가 재의 왕이 되도록.
설령 ‘천재지변’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어떻게든 이곳 ‘틈새’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재의 왕이 되는 시련을 계속해서 이어갔겠지.
마침내 나와 란돌프가 만나면 둘 중 하나가 소멸하게끔.
나는 두 주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결국 이 모든 혼돈을 가져온 건 두 겁쟁이들이다.
“이제 슬슬 끝을 내야겠군.”
“아드리움의 현.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못했나?”
“왜 버려야하지?”
“······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럼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도리어 당당하게 되받아치자 카라스가 눈을 빛냈다.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부딪히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의 격차.
재의 힘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녀석이 투신인 자신을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하건만.
이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오만하군.”
“허, 오만이라. 그렇다면 반대로 물으마. 패배가 확정됐다 하여 포기한다면 저 겁쟁이들과 다를 게 뭐지?”
“······!”
카라스의 눈이 찰나 흔들린다.
이길 수 없는 싸움.
승리하지 못할 거라 지레짐작하여 포기한다면 두 주신과 다를 게 없었으므로.
은연중 카라스는 그들과 같은 논리를 펼친 것이다.
어차피 이길 수 없으니 포기하라고!
“여전히 어리석구나, 투신 카라스여.”
녀석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어떠한 역경이 찾아와도, 불가해한 시련이 들이닥쳐도 포기한 적이 없다.
동시에 나를 바라보는 카라스의 눈이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넌······ 넌 누구냐?”
카라스는 재차 물을 수밖에 없었다.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기세가, 존재감이.
그의 모든 것들이.
“아직도 모르겠느냐?”
······ 전혀 다른 사람 같았으니까.
아드리움의 현이 아니다.
그 모습은 마치······.
존재만으로도 모든 이를 압도하며 따르게 만들던.
모든 역경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정점에 선 자.
한없이 오만하지만 그 오만함이 누구보다도 어울리던 남자.
“내가 너의 희망이다, 멍청한 까마귀.”
-멍청한 까마귀. 내가 너를 구원해주마.
······ 마치 ‘그 녀석’ 같았으니까.
*
“······ 혼돈이군.”
라이가는 짧게 이 상황을 평가했다.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으니까.
이보다 더한 혼란을 그는 본 적이 없다.
‘이제 지긋지긋하다.’
란돌프.
그와 엮인 모든 게 지긋지긋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하는 놈이기에 이 정도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뭐 하나 정상적인 게 없고, 별 일 아닌 게 없다.
하나같이 머리가 아파오는 진행들밖에 없었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대로 엮이고 싶지 않은 이름이다.
허나 엮여서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있었다.
‘···현혹되지 않는다. 지배당하지 않는다.’
저 절망이 가진 강력한 세뇌의 힘이 통하지 않았다.
아마도 ‘영원의 란돌프’에게 이미 지배되었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답은 있다.
“흐흐흐!”
“키히히히!”
절망에 미쳐버린 자들.
하지만 그들의 힘은 진짜였다.
절망과 마력을 공유하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들은 우리를 가만히 둘 생각이 없어보이는구나.”
“그나저나······ 엄청난 숫자로군.”
주력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빠르게 상황을 인지했다.
어차피 싸워야만 한다.
어느 쪽이 살아남느냐의 대결일 따름.
꿀꺽!
일촉즉발의 상황.
허나 전례 없는 규모였다.
이만한 전쟁은 여태껏 판게니아에 없었다.
이만한 규모의, 수많은 세력이 뒤얽힌 전쟁은.
그렇게 양쪽의 거대한 무력이 서로 부딪히기 직전.
“······?!”
“뭐······?”
“거, 거짓말이지······?”
모두가, 멈춰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믿기지 않는 눈초리로, 경악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은 모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부에.
양 측의 세력이 부딪히려는 그 중간에.
펄럭!
······ 누군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찬란한 광명과 함께.
은빛의 갑주를 입고,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빌헬름’이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 그가 등장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