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289화 (289/317)

가장 거룩한 존재

‘그것’이 등장한 순간.

라이가를 비롯한, 탑의 모든 것들이 일순간 멈췄다.

‘그것’은 악의 저주를 흩뿌리며 엄청난 속도로 탑을 장악해나갔다.

하지만 라이가는 ‘그것’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했다.

‘용신이 아니었나?’

용신의 격을 가진 두 아이.

그중 루카리아라고 불린 소녀.

오로지 신성하고 오롯이 깨끗해야할 존재!

그런 존재가 저만한 ‘악의’를 보인다는 걸 섣불리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 잘못보았을 리 없다.

저것은 ‘악의’의 집합체다.

허나 저 정도의 ‘악의’는 보통의 경우로 생기지 않는다.

‘생살을 뜯어먹힐 때의 고통. 영혼까지 울부짖으며 끝내 타락한 자.’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절망을 맛봐야만.

그것조차 넘어서는 깊은 무력감에 좌절해야만 가능하다.

물론, 그리하여 타락했더라도 여전히 의문이다.

설령 신성한 신격이 넘쳐나는 악의에 타락한들, 저것은.

감히 그 수준마저도 압도하는 악의의 집합체였기에.

마치 악의 그 자체가 형상화된 것 같지 않은가.

‘그것’을 한 단어로 비유하자면······.

“절망······?”

······ ‘절망’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용신의 격과 절망의 영혼을 함께 지닌 소녀.

그 불균형함이 낳은 ‘그것’의 형태는 실로 전율스러웠다.

마치 날개처럼.

검은 손들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와, 닿는 모든 것들을 절망으로 물들인다.

닿는 모든 것들은 ‘그것’에게 지배되는 것이다.

현혹하고, 세뇌하며, 마침내 순종시키는 힘.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먹어치운다.

“흐흐, 히히히······!”

지배된 자는 악의에 물들며 이성을 잃는다.

여신교의 아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아, 여신이시여! 저 이단자들의 목을 베어 바치겠나이다!”

아론이 양 손을 모았다.

동시에 빛의 광명이 아론에게 쏟아졌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공할 성력이.

곧이어 아론은 성전사가 되었다.

그것도 최상위계의 성전사가.

절망의 힘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강제이식.’

미친.

라이가는 그 광경을 잠시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흔히 ‘사흉’이라 불리는 것들의 진정으로 무서운 점은 개체수를 늘려가는데 있었다.

탑에서 바알이 자신의 저주를 매개체 삼아 계속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소환하듯.

절망 역시도 스스로의 세포를 이식해 복제하는 힘을 지녔다.

그리고 현재, 사흉 중 하나인 ‘절망’은 흑왕이 갖고 있다고 제국은 판단했다.

그런데 왜······ ‘절망’의 능력이 이곳에서 발현되고 있는가.

자신의 세포를 강제이식해, 그 무한한 힘을 공유하여 한계를 넘게 만든다.

게다가 바알과 다른 점은, 바알이 저주의 인형을 만들고 소환한다면, 절망은 세포가 이식된 자가 본래 지닌 힘만을 극대화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력조차도 극대화시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용신의 육체에 깃들어서인가?’

뭐가 됐든간에 저것은 정면에서 대적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등장한 순간부터 탈출은 불가능하다.

《‘긴급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탑’에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 탑의 신격과 용신의 신격이 부딪히고 있다.’

예상대로였다.

하여, 결판이 날 때까지 이 탑은 아무도 나갈 수 없다.

탑이 무너지거나, 저 괴물이 사라져야만 정상화될 터.

아아아-

아아아아아아-

마치 노랫소리 같았다.

완전히 어둠에 잠식된 루카리아는 계속해서 묘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현혹의 목소리!’

검은 손에 닿지 않는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라이가는 귀를 막았다.

모든 기운을 끌어올려, 한 치의 빈틈없이 막아섰다.

아아- 아아아-

허나, 계속해서 들려온다.

그 음성은 조금씩 감미로워지며 주변 모든 것을 현혹시킨다.

-라이가, 짐의 자랑스러운 기사여.

-황제폐하······!

-‘팔가’의 보은, 절대 잊지 않겠느니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대에게 ‘성혈’을 하사하마. 이제 그대의 ‘피’가 천하다며 야유할 자는 없으리라.

-······!

황제가 깨어나 자신을 치하하는 모습이 보인다.

들린다.

라이가가 가장 원하는 상황이 눈앞에 비춰졌다.

‘젠장할.’

이게 환상이라는 걸 알지만 현혹의 힘이 너무 강하다.

막아도 막아지지 않는다.

하지만 현혹이 끝나면 세뇌되고, 지배당하는 수순만이 남는다.

이 현상으로부터 멀어질 방법은 하나뿐이다.

“도망쳐!”

“란돌프님에게로······!”

영원의 란돌프.

놈에게 도전하는 것.

그리고 영원의 란돌프에게 지배당하는 것.

결국 둘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저 정체모를 ‘그것’에게 지배당하여 순종하느냐, 혹은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하여 패배를 자처하느냐.

아무리 라이가가 초월적인 존재라고 한들, 이 ‘현상’에 휘말려버린 이상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늪에 발을 담궜다.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깊은 늪.

“빌어먹을······.”

라이가는 이맛살을 있는대로 구기고 말았다.

예상대로 진행되고 흘러가는 게 하나도 없다.

제자를 구하고자 진행한 대회일 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됐는가.

혹시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진행하는 깜짝 파티같은 게 아닐까?

그런게 아니고서야, 도저히 지금까지의 흐름에 정상적인 게 없었으니.

슈웅!

슈우우웅!

하나, 둘 사라져간다.

눈깜빡할 사이에 이미 지배된 자들을 제외하곤 라이가 그 혼자만 남았다.

시시시시.

그런 자신을 비웃듯 다시금 들려오는 웃음소리.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저것에 지배된다면, 후일은 없다.

설령 지배되지 않고 버티더라도 저것은 자신의 죽음을 더욱 빠르게 앞으로 당겨올 것이었다.

그리 된다면 이 ‘현상’이 끝나기 전에 죽을 수도 있었다.

사실상 선택지는 처음부터 하나인 셈.

꽈드드득!

“이런 개 같은······!”

《‘라이가’가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지배의 저주’가 발동하여 지배되었습니다.》

*

보스룸.

페이즈 3, 영원의 란돌프가 존재하는 곳.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영원의 란돌프’의 지배를 받습니다.》

《지배당한 이들은 서로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침입자를 격퇴하십시오.》

《‘영원의 란돌프’가 패배하면 ‘지배의 저주’는 ‘죽음의 저주’로 변화합니다.》

몇 줄의 글귀가 눈앞에 떠올랐다.

주변에는 이미 도전했다가 패배를 자처한 이들로 넘쳐났다.

“페르몬······ 멍청한 놈 같으니.”

그 중에는 페르몬도 있었다.

개미왕 페르몬.

그는 일전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락투샤는 쓰게 혀를 찼다.

상대를 안 가리고 달려드는 습성이 놈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시기가 너무나 빨랐던 탓이다.

‘‘영원의 란돌프’는 어디있지?’

라이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영원의 란돌프’로 보이는 녀석이 없다.

대신.

“그가··· 그분이 ‘영원의 란돌프’다.”

“······ 아리아?”

누군가가 나타났다.

란돌프의 정체를 확인하겠다며 도전했던 백왕의 딸, 아리아.

돌연히 나타난 그녀는 가만히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에 거친 숨을 헐떡이며 궁귀가 물었다.

“··· 개미왕 페르몬이 ‘영원의 란돌프’라니?”

“현재 개미왕은 탈피중이다.”

그러고보니 이상했다.

개미왕 페르몬의 움직임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몸을 웅크린 채로 가만히 있었다.

“‘영원의 란돌프’는 탈피중인 개미왕에게 깃들었다. 이제 곧 탈피를 끝내겠지.”

“깃들었다? 그럼 ‘영원의 란돌프’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냐?”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물론 아리아는 란돌프의 모습을 보았다.

······ 그 ‘검사’의 모습을 말이다.

하지만 구태여 말하진 않았다.

어찌됐든 ‘검사’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으므로.

무엇보다 란돌프의 상태가 무언가 이상했다.

그때였다.

쿠릉!

쿠르르릉!

“뭐지?”

“왜··· 흔들리는 거지?”

보스룸이 흔들린다.

허나 영원의 란돌프는 현재 개미왕의 육체에서 탈피중이다.

그렇다면 이 난데없는 현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곧, 그들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 따라왔다고?”

그 메시지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따라온 것이다.

‘그것’이.

절망으로 점칠된 공포스러운 존재가!

슈웅!

슈우웅!

슈우우우웅!

그것도 어마어마한 숫자의 ‘도전자’와 함께 나타났다.

탑을 오르던 수십만의 인원이 ‘그것’에 지배당한 채, 그들의 눈앞에 동시다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나는 소환된 ‘흉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저 바라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 나를 소환했나?”

내 눈앞에 있는 것.

그건 ‘흉왕’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놈의 이름을 말했다.

“투신 카라스······?”

왜 투신 카라스가 소환되었나.

투신 카라스는 투신의 탑을 지배하는 신격이며, 동시에 ‘재의 왕’이다.

흉의 왕이 아니라.

이것도 두 신이 의도한 것일까?

-까악?

-까악?

······ 아닌 것 같았다.

흉의 신과 재의 신 모두 고개를 갸웃하는 중이다.

하여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라스. 지금 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너는······ 누구냐? 왜 ‘틈새’에 들어와 마음대로 시련을 진행 중인 것이지?”

카라스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게다가 되려 화를 내고 있었다.

“이 멍청한 주신들의 싸움을 끝내려고? 아서라. 절대로 그렇게 놔둘 순 없노라.”

펄럭!

카라스가 날개를 펼쳤다.

“한쪽이 패하면 패한 쪽은 소멸한다. 주신을 잃은 까마귀들은 작아지고, 멍청해질 것이며, 탑의 권한을 잃게 되겠지. 그것을 알고 들어온 거냐?”

그래서 둘은 영원토록 싸우고만 있는 것이다.

멍청한 약속에 의해 패한 자는 소멸키로 했으니까.

그것이 흉의 종족이 되었든, 재의 종족이 되었든, 어느 한쪽이 완전히 사라지면 세계의 균형은 가파르게 무너진다.

그래서 ‘탑의 틈새’로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흉왕과 재왕이 모두 동의한 절대적인 규칙.

그 규칙을 깨고 웬 이상한 놈이 들어와있으니 화가 나는 것도 당연지사.

“······ 답해라. 너는 왜 소환된 거지? ”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흉왕을 소환했는데 카라스가 소환된 사실을.

하여, 재차 말했다.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재의 왕, 투신 카라스.”

“······ 비정상의 정상화. 모든걸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함이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확실한건 지금 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투신 카라스에 의한 일이라는 것이다.

“멍청한 신들의 싸움에 더는 휘둘리지 않겠다. 종족을 버린 신은 더이상 주신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 내가 주도권을 갖겠다.”

구아아아아아아!

투신 카라스의 전신에 신성이 맺혀간다.

······ 강하다.

더 강해졌다.

투신의 탑을 올라, 패배했을 때보다도 더욱 더.

란돌프의 몸으로도 졌는데 지금 상태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설마?’

그제야 드는 최악의 생각.

-흉왕의 인자와 섞였군.

-음.

내 생각을 뒷받침하듯 주신들이 입을 열었다.

섞였다.

흉왕의 인자.

그것을 갖고 있는 자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 명뿐이었다.

‘란돌프를 흡수했다?’

란돌프.

끔찍한 흉조, 그리고 흉왕의 의지를 이은 존재는 그 외엔 없었으므로.

······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한들, 전부를 흡수한 건 아닐 테다.

카라스가 앞에 있는데도 ‘운명의 역설’이 발동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사라져라.”

쿠릉!

꽈아아아아앙!

마른 하늘에서 신성을 머금은 벼락이 떨어진다.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죽음을 전제로한 벼락이.

“······ 그건 뭐냐?”

허나, 닿지 않는다.

소환된 건 ‘투신 카라스’만이 아니었다.

“설마 그건······ ‘태양신의 옥좌’인가?”

태양신이 앉았다고 전해지는 옥좌.

‘빛의 옥좌’도 함께 소환되었다.

왜 빛의 옥좌가 함께 나타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빛의 옥좌’에 앉아 있으면 모든 공격을 무효화시킨다.

카라스의 공격마저도 말이다.

하지만 카라스는 비웃었다.

“그 옥좌도 영원하진 않다. 태양이 저물면 무적도 풀리게 되어있지.”

하늘 위에 떠오른 태양.

태양은 조금씩 져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태양의 빛이 완전히 사라지면 빛의 옥좌도 힘을 잃을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택해야한다.

“무엇을 바쳐, 무엇이 되려고 하느냐? 그래봤자 결과는 달라질 게 없을 터인데.”

빛의 옥좌.

그것은 동시에 무한하게 ‘제물’을 먹어치워 무언가를 강림시키는 의자다.

육각의 검성 라일리도, 끔찍한 흉조도 모두 빛의 옥좌에 의해 소환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바칠 수 있는 제물에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바친다고 한들, 더 강해진 카라스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고민했다.

‘바칠 제물이 없다고?’

없기야 없다.

내가 가진 장비들로는 한없이 부족하다.

태고의 갑옷이나 롱기누스의 창은 불멸하는 것, 제물로 삼을 수 없는 종류의 물건이었으니.

‘확실한 제물이 하나 있다.’

허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즉시 생각한 것을 제물로 삼았다.

《‘빛의 옥좌’를 제물로 삼습니다.》

《‘빛의 옥좌’가 한순간 ‘가장 거룩한 빛의 옥좌’로 발현합니다.》

《‘거룩한 광명(50Lv)’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장 거룩했던, 영광스러운 자의 혼을 옥좌로 불러옵니다.》

《불러온 혼의 규격에 따라 ‘온전한 황금률’이 소모됩니다.》

무엇을 강림시켜야, 지금의 상황을 역전할 수 있을까.

빛의 옥좌로 삼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구제국 육각의 영웅이고 지고의 용이자 검성이었던 라일리.

혹은 끔찍한 흉조를 소환했을 때보다도 더욱 강력한 존재가 필요하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강한 존재를 부른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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