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 ‘그것’이 온다.
그라시아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어려서부터 강박적으로 엘리트의 길을 걸어왔던 그는 단 한 번도 사랑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시간 낭비, 감정낭비라고만 생각했으니까.
그는 다른 사람과 달랐다.
달라야만 했다.
유수의 기업을 이끌며 철인이라 불리는 아버지, 항상 최고만을 누려왔던 어머니로부터 그라시아는 항상 유능한 아들이어야만 했으므로.
그런 그의 아무도 모르는 유일한 여가는 게임, ‘판게니아’였다.
극악의 난이도.
게임을 클리어하면 어떠한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는 문구에 혹했다.
‘내가 정복하지 못하는 건 이 세상에 존재치 않는다.’
그것이 게임이든, 무엇이든 간에.
한 번 손댄 것은 끝을 보며 언제나 최고의 기록을 세워온 그라시아다.
판게니아도 그럴 것으로 여겼다.
······ ‘팬텀’을 만나기 전까지는.
‘······ 나는 결국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길을, 누군가의 뒤를 따라가기만 했던가.’
현실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판게니아에는 팬텀을 좇았다.
그러니 넘을 수 없다.
뒤를 따라가기만 해서는 절대로 앞지를 수 없는 것이다.
하여, 그라시아는 자신을 바꾸고자 하였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리라.’
더이상 연기하지 않겠다고.
누군가의 뒤를 따라가지 않겠다고!
그러니 계속해서 보고 싶고, 그립다면, 그것은 사랑일 것이다.
그라시아는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여.”
“······?”
“고맙다. 너의 한 마디가 나를 깨웠다.”
“내가······ 무슨 말을 했나?”
세렝게티가 겨우 입을 열었다.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라시아에게 말을 건넨 기억이 없다.
애초에, 이렇게 가까이에서 만난 적도 없었다.
허나 그녀의 생소하단 반응에도 그라시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심연에서 나를 다그치며, 정신을 차리라며 내 얼굴에 얹었던 그 따스한 손길을. 그 미소를.”
“··· 혹시 미친 건가?”
“너의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제 내가 너를 지키마.”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다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얼굴에 손을 얹은 적도, 그라시아를 향해 미소지은 적도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그라시아는 빌헬름의 대원정을 음해한 영웅회의 소속이다.
아무리 루시퍼와 다크스타를 비롯한 다른 놈들과 결별했다고 한들, 인상을 찌푸리고 욕을 하면 했지 그릴 일이 일어날 리 만무했다.
혹, 꿈이라도 꾼 건지.
“제국제일검, 최강의 기사 라이가여.”
그라시아가 고개를 돌려 라이가를 마주했다.
그러자 라이가가 어깨를 으쓱했다.
“음. 사랑타령은 끝났나?”
“기다려줘서 고맙군.”
“아아. 나는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니 개의치 말거라.”
스릉.
그라시아가 검을 쥐었다.
“정식으로 소개하마. 나는 너희가 말하는 ‘죄인’이자, 검성(剣聖) 그라시아다.”
숨기지 않는다.
하물며 상대가 제국 최강의 기사 라이가라면.
그러자 라이가가 고개를 갸웃했다.
“검성? 처음 듣는다만.”
“······ 모른척 하지 마라. ‘사신’을 붙여놓지 않았나?”
“사신? 아, 사신교에 찍혔나보군.”
쯧쯧.
라이가가 혀를 찼다.
그리곤 독한 놈들에게 찍혀서 불쌍하다는 눈초리로 그라시아를 바라봤다.
사신교는 죄인을 죽어 마땅하다 생각하지만, 라이가는 죄인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검성이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면 그래도 한가락하는 놈일 터.
“한 번 놀아보자꾸나.”
“··· 좋다.”
지잉!
지이이이익!
그라시아의 등 뒤로 천 자루의 검이 떠오른다.
더욱 양질의, 더욱 강력한 검들이.
그라시아가 직접 얻은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 유니온의 인벤토리에서 가져온 것이다.
유니온의 인벤토리에 있는 무기들은 그 하나하나가 웬만한 신화등급 저리가라였으므로.
그라시아와 유니온은 상성이 좋았다.
뿐만인가.
‘지금의 나는, 강하다.’
그라시아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누군가를 따라가겠다는 욕망을, 열망을, 열등감마저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한 순간 변화가 찾아왔다.
-천벌(天伐)
치직!
치지지직!
천 자루의 검에서 청색의 검기(劍氣)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그라시아의 두 눈에서도 마치 번개와 같은 안광이 넘실댔다.
그라시아가 가진 최강의 스킬, 천벌(天伐).
천 개의 벼락을 꽂혀 상대를 소멸시키는 압도적인 공격!
촤르륵!
촤르르르륵!
단 한 번의 공격에 모든 마력과 체력을 소모하는 필살기다.
준비시간이 길다는 단점과 한 번 사용하면 근 일주일은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기에, 거의 사용하지 않는 최후의 비기였다.
-만개(滿開)
허나, 그라시아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천벌의 너머에 있는 영역에 마침내 발을 디뎠다.
검이 복제된다.
모든 검이 서로를 투영하고 증가하여 2천개의 검이 허공을 수놓았다.
그리고 2천 자루의 검은 다시 한 번 더 분열해 4천 자루가 되었다.
환영의 별을 먹고, 한단계 더 초월하며, 각고의 노력 끝에 거머쥔 또 다른 천벌의 형태.
최강에게 최강이 전부를 쏟아낸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공격을, 죽음을!
쉬익!
콰콰콰콰콰콰콰콰쾅!
*
그 광경은, 분명히 압도적이었다.
4천자루의 검이 허공에서 빗발치듯 쏟아지는 광경은.
하지만, 아무리 쏟아내고 또 쏟아낸다 한들.
“······ 진짜 괴물이 따로없군.”
닿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것이다.
전투를 지켜보던 유니온은 경악하고 말았다.
제국의 초대 궁중마법사로서 오랜세월을 지내왔으나.
라이가와 같은 괴물은 그도 본 적이 없었다.
역대 팔가의 전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더 강하다.
본래 이 정도는 아니었을진대, 그 사이에 더 강해진 걸까?
“꽤 재밌는 놀이였다. 죄인··· 음, 이름이 뭐라고 했지?”
“······.”
천벌 만개가 끝난 뒤.
멀쩡한 라이가의 모습을 보며, 그라시아의 두 눈이 격하게 떨렸다.
분명히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정한 최강에는 미치지 못했던 게다.
라이가.
저 인외의 괴물에게는 말이다.
모든 것을 쏟아냈기에 더는 싸울 체력도 남지 않았다.
촤악!
순간, 그라시아의 양 팔이 잘렸다.
푹!
“큽······!”
이어 라이가는 세렝게티의 복부를 깊숙하게 찔렀다.
쫘악!
검을 비틀자 피가 줄줄이 흘러내린다.
“대답해라, 이자벨라.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이냐?”
그날.
심연영역에 들어간 날.
라이가는 팔가 기사단원들을 잃고, 기억을 잃었으며, 죽음의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자신과 같은 격을 지닌 존재의 기억을 지울 정도의 일이다.
필시 엄청난 일이 그곳에서 일어났을 터.
“대답하지 않으면 너희는 전부 죽는다. 이자벨라, 너로 인해.”
책임을 전가하며 대답을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
신의 섬에서 발생했던, 괴물들과의 전투.
신의 살갗 혼종, 영원군주의 등장, 진리의 문, 그리고 또 다른 란돌프.
그 모든걸 이야기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다만, 한 가지만은 말할 수 있다.
“··· 너는 패배했다.”
“······? 내가, 패배했다고?”
“5문을 개방해 전투에 나섰지만 결국 패배한 패자다.”
“········· 5문을 개방하고도 내가 졌단 말이냐?”
라이가가 인상을 찌푸렸다.
5문 개방은 죽음을 명제로 하기에 무적이다.
그 상태의 자신은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
그런데 패배했다고 한다.
“대체 누구에게?”
“그건······.”
······ 자신의 주인, 란돌프에게.
또 다른 란돌프에게 패했다.
그때였다.
촤앙!
라이가가 급히 몸을 틀어 검면으로 달려드는 상대를 쳐냈다.
궁기다.
쿠우우우우웅!
동시에 지면이 진동한다.
대토룡.
그 거대한 용이 마력을 모으고 있다.
라이가를 공격하기 위해.
주력들이 왜 인간을 돕는 거지?
아니면, 힘이 빠졌다 판단하고 자신을 견제하는 건가?
“······ 슬슬 귀찮아지는군.”
멍청한 놈들 같으니.
라이가는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방해꾼이 많다.
이래서야, 제대로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을 듯싶었다.
도저히 5문을 개방한 자신이 패했다는 말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마침 잘 됐다.
“다 죽이면 덜 귀찮아지겠지.”
*
쓰러진다.
궁기와 대토룡이.
아이작과 성녀 세아마저도.
도저히 라이가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절대자였다.
피를 흩뿌리고, 내장이 바닥을 저미며, 그들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절대자의 앞을 막은 말로.
저런 괴물을 대체 누가 패배시켰단 말인가?
“너희도 나를 막을 셈이냐?”
“······ 아니.”
락투샤가 답했다.
다크엘프 로드도 고개를 저었다.
전 챔피언 산샤 역시 라이가와의 싸움에는 별반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는 오직 현 챔피언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라이가는 피가 잔뜩 묻은 검을 한 차례 털어냈다.
“자, 이제······.”
“으으, 으으으······.”
“······?”
“으아아아앙!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다시금 이자벨라에게 향하려던 찰나.
웬 아이의 울음소리가 25층을 가득 채웠다.
용신, 루카리아.
그 작은 소녀가 두려움에 뚝뚝 눈물을 떨어트리면서 울기 시작한 것이다.
“아, 안 돼······.”
우는 루카리아를 바라보며 이세라가 당황했다.
심지어 일어나 한 발 물러나기까지 하였다.
여태껏 두려움에 떨던 루카리아를 보듬던 태도와는 명백하게 다르다.
세상 무서울 것 없어보이던 이세라가 당황하고, 겁마저 먹고 있었다.
시시시시.
무언가가 웃는 것만 같은 소리와 함께.
루카리아의 전신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쳤다.
이윽고 루카리아의 얼굴에 모자이크가 쳐지듯 새까만 어둠이 덮어씌워졌다.
그런 루카리아의 변화에 이세라가 다급하게 외쳤다.
“도, 도망쳐! ‘그것’이 온다······!”
*
쿠르르르릉!
탑이 흔들린다.
진원지는 탑의 상층부.
위태롭게 흔들리는 탑의 위에서, 검은 연기가 미친 듯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는 손의 형태로 만들어지며 탑 전체를 감싸갔다.
까악!
까아악!
커다란 까마귀들이 악을 지르며 다급하게 탑을 빠져나왔다.
탑의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것도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뭐, 뭐야?”
“저 검은색 연기는 뭐야?”
“투신의 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탑을 바라보던 모두가 몸을 떨며 말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쳐지는 지독한 저주.
저런건 여태껏 본 적이 없으니까.
저주 자체가 마치 형상화 된 듯싶었다.
거대한 저주의 인형.
아니, 저주의 신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허나, 더욱이 의아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세렝게티’가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지배의 저주’가 발동하여 지배되었습니다.》
《‘이자벨라’가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지배의 저주’가 발동하여 지배되었습니다.》
《‘락투샤’가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지배의 저주’가 발동하여 지배되었습니다.》
《‘유니온’이······.》
······.
······.
······.
《‘라이가’가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지배의 저주’가 발동하여 지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