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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287화 (287/317)

첫사랑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 

라이가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저주받은 이름. 

란돌프와 만나 ‘신병’의 진실에 대해 알게되며 이자벨라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라이가. 데르시안 가문의 불법 인체 개조와 복제에 관해 알고 있었나?” 

데르시안 가문이 행하고 있는 끔찍한 인체실험. 

이자벨라는 그곳의 아홉 번째 복제품이었다. 

소노라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실험의 희생양이 되었다. 

하여 묻는 것이다. 

라이가. 

제국 최강의 기사이자, 팔가 기사단을 이끄는 제국의 반쪽인 그가 과연 데르시안 가문의 불법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그 잔악한 행위를 눈감아주고 있었는지 말이다. 

이에, 라이가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견습으로 있을 때에도 차갑긴 했으나, 그조차도 연기였다는 게 실감이 된 탓이다. 

“그게 궁금했나? 그래서 그들과 함께 있는 거냐? 빌헬름의 떨거지들과?” 

빌헬름의 떨거지들? 

이자벨라는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와 성녀 세아를 보고 지레짐작한 듯싶었다. 

둘은 빌헬름과 함께 대원정을 진행했으므로. 

라이가가 턱을 쓸며 이어서 말했다. 

“빌헬름과 나, 둘 중 누가 더 강하느냐 물었을 때 너는 빌헬름이 더 강하다고 주저 없이 답했지. 그 올곧은 믿음과 신념이 어디서 나왔나 궁금했거늘. 이제 보니······ 이유가 있었군.” 

“······.” 

“아직도 그 생각은 유효한가? 빌헬름이 더 강하다고?” 

“당연한 소리를-.”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여, 그대도 같은 생각인가?” 

라이가는 고개를 돌려 세렝게티를 바라보곤 물었다. 

오랜 시간을 빌헬름과 함께한 세렝게티라면 보다 확실한 비교가 가능할 터. 

끄덕! 

일말의 고민 없이 세렝게티는 수긍했다. 

방금 전 검을 부딪혀 보았음에도 한 치의 의심 없는 표정으로. 

하지만 이런 물음 자체가 사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애당초 이자벨라도, 세렝게티도 빌헬름 쪽의 사람. 

진정으로 확인하고자 한다면 직접 맞붙는 수밖에 없다. 

“······ 진심으로 붙어보고 싶군. 그 빌헬름이라는 자와.” 

물론, 성사될 수 없는 대결이다. 

빌헬름은 대원정에서 죽었으니까. 

만약 사후세계라는 게 있다면, 그곳에선 가능할는지. 

그렇다면 머지않았다. 

자신의 남은 생명은 기껏해야 1년. 

그것도 최근에 벽을 넘어서 겨우 수명이 연장된 덕이었다. 

“데르시안 가문에 대해서 궁금하느냐, 이자벨라? 그럼 나를 꺾어라. 그리하면 모든 걸 알려줄 터이니.” 

“-그럴 생각이다.” 

촤악! 

다시 한번 채찍을 휘두르자 라이가의 전신이 강제로 속박되었다. 

극히 짧은 시간. 

쇄에엑! 

그 찰나와 같은 순간을 노려 세렝게티가 쇄도했다. 

“너희 둘로 충분하겠나?” 

채엥! 

허나, 속박당한 라이가의 육체에 세렝게티의 검은 닿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세렝게티의 검을 튕겨냈기 때문이다. 

‘검······?’ 

순간적으로 세렝게티는 검의 형태를 보았다. 

하지만 검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력으로 형상되었다면 느껴졌을진대, 그조차도 아니었다. 

‘위험해······!’ 

다시금 느껴지는 즉사의 위협. 

세렝게티가 재빠르게 물러났다. 

허나 이번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쩌엉! 

꽈앙! 

다시금 보이지 않는 검을 쳐낸 이자벨라의 신형이 용수철처럼 튕겨졌다. 

“크흡!” 

이내 벽에 부딪힌 세렝게티가 바닥에 쓰러졌다. 

“쿨럭!” 

뭉친 피를 토해내며 손으로 바닥을 짚고 다시 일어섰다. 

입가를 털어내며 검을 쥔 세렝게티를 보곤 라이가가 감탄했다. 

격의 차이를 확실하게 느꼈을 텐데도 기세는 전혀 죽지 않았다. 

“역시 대단하군. 그걸 감지하고 막아낼 줄이야.” 

“··· 심검(心劍)?” 

“최근에 깨달았지.” 

마음의 검. 

마음을 형상화하는 검. 

그것이 심검이다. 

단순히 검을 띄우거나, 검강을 씌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형태의 무력이었다. 

베고, 찌르는 걸 떠나, 원한다면 상대의 심장을 터트릴 수도 있고, 내장을 짓뭉개는 것도 가능한 게 심검의 경지였다. 

그것을 알아본 세렝게티의 이마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반신반인. 괴물이 따로없군.’ 

심검 사용자.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서 반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었으므로. 

지금 라이가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이다. 

촤악! 

······ 이자벨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3중첩. 

‘뱀의 속박’이 5중첩에 이르면 요르문간드가 라이가를 잡아먹는다. 

아무리 라이가가 괴물이라 해도 요르문간드의 영향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터. 

“저 사람······ 무, 무서워······.” 

“루카리아. 제발 진정해. 제발.” 

두 아이. 

이세라는 몸을 웅크리고 떠는 루카리아를 보듬어주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필사적으로 말이다. 

도와줄 여력은 없어 보인다. 

‘젠장할.’ 

그리고 그건 아이작도 마찬가지였다. 

투신의 탑을 오를 때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투신의 탑을 오르며 보게된 진실에 정신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그 이름이······.’ 

아이작은 다시금 자신이 본 것을 떠올렸다. 

박현명. 

그 이름 세 글자를. 

그 이름은······ 자신을 조종한 ‘죄인’의 이름이었으니까. 

목 잘린 자의 별. 

그 별을 먹고 초월할 때, 아이작은 박현명의 이름을 들었다. 

이자벨라는 박현명의 얼굴을 보았다고 했다. 

박현명은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조종해 광산 도시를 무너트리고, 평생을 도망자로 살게 만든 장본인이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 

한데, 그 이름이 왜 이곳에서 나타난단 말인가. 

‘죽여야 한다.’ 

죽인다. 죽일 것이다. 

초월하며 그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아이작은 다짐했다. 

박현명이라는 자를 찾아내어 반드시 죽이기로. 

하지만, 최근 다시 만난 이자벨라는 죄인에 대한 ‘분노’가 없었다. 

그토록 분노하며 ‘신병’에 걸린 자신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데르시안 가문으로 떠났던 게 이자벨라이건만. 

대체 왜? 

그곳에서 무슨 일을 겪었기에? 

무엇보다 이자벨라도 박현명의 이름을 알고 있다. 

자신이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자벨라. 넌··· 괜찮은 거냐?’ 

하여 묻고 싶었다. 

이자벨라. 

넌 죄인의 이름을 보았는데도 어떻게 괜찮은 거냐고.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고! 

자신은 도저히 맨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는데 말이다. 

“큽······!” 

“세렝게티!” 

허드슨이 몸을 날려 허공에 떠오른 세렝게티를 겨우 받아냈다. 

세렝게티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상처가 없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촤악! 

5중첩. 

“요르문간드!” 

쩌어어어억! 

이자벨라의 뒤에서 거대한 흰색의 뱀이 떠오른다. 

세계를 집어삼킨 뱀, 요르문간드. 

“··· 호오?” 

그 모습을 라이가가 감탄하며 바라봤다. 

그러나 요르문간드의 권능은 절대적인 것. 

콰득! 

요르문간드가 먹어치운 자리에, 라이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해치웠나······?” 

아이작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키아아아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소리. 

치이이익! 

무언가가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균열이 생긴다. 

툭! 

“크흑!” 

검 한 자루가 날아들어, 이자벨라의 복부를 찔렀다. 

곧이어 한 남자가 허공에 발을 내디디며 모습을 드러냈다. 

“재밌구나. 요르문간드의 아공간이라.” 

······ 라이가. 

초록색 피를 뒤집어쓴 그의 모습은 흉신악살이 따로 없었다. 

“아직 새끼인 주제에 날 잡어먹으려 하다니, 정말 욕심이 많은 녀석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이자벨라?” 

“······.” 

이자벨라가 이를 악물었다. 

회심의 일격. 

5중첩의 뱀의 속박도 라이가에겐 통하지 않았다. 

이제 세렝게티도, 이자벨라도 더는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터벅. 

라이가가 한 발자국 더 다가가자, 허드슨이 그 앞을 막았다. 

“멈춰.” 

“음? 아, 너무 약해서 있는 줄도 몰랐군.” 

약자에겐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허드슨은 라이가에게 지나가는 개미만도 못한 약자였다. 

그래도 자신을 막아서는 의기만큼은 인정해줄 법 하지만, 그러기에도 너무 약했다. 

라이가가 손을 휘저었다. 

쿠웅! 

“커헉!” 

그러자 저 멀리 날아가 허드슨은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으으으······!” 

두려움에 몸을 떨던 창술사 발테. 

발테가 갑자기 발작을 하더니, 두 눈이 돌아가며 ‘버서커 모드’로 전환됐다. 

“과연, 저주받은 버서커 세트라.” 

이번엔 약간의 관심을 가졌다. 

버서커 세트는 착용자를 죽이는 저주받은 무구다. 

오로지 광전사에 합당한 재능을 지닌 자만이 저 상태가 될 수 있다. 

보통 저 상태가 되면 정신이 있을 때보다 수배는 더 강해지기 마련이었다. 

쉬이익! 

광속으로 휘둘러지는 창.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내며 라이가가 가만히 발테의 모습을 살폈다. 

“꽤 탐나는 재능이다. 허나··· ‘팔가’와는 안 맞군.” 

정신을 잃고 오로지 피를 탐하는 상태. 

저래서야 팔가의 의지를 이을 수 없다. 

심연에 도전했다가, 도리어 심연이 되어버릴 놈이었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상당히 탐나는 재능의 소유자임은 분명했다. 

‘앞으로 5년 정도만 갈고 닦으면 능히 대륙제일의 창술사로 이름을 날릴진대.’ 

이 창술사는 원석이다. 

버서커 상태임에도 균형을 잃지 않고 창을 휘두르는 능력. 

창술을 더욱 끌어올리는 이 재능은, 밑바탕이 충분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창술사가 엄청난 노력가라는 의미다. 

포기하지 않는 집념의 사나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 준비된 밑바탕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더 개화할 것이다. 

······ 이곳에서 자신에게 죽지만 않는다면. 

“아쉽구나.” 

촤악! 

촤르르륵! 

라이가의 검이 고속으로 움직이며 발테의 힘줄을 전부 끊었다. 

버서커를 잠재우려면 이 수밖에 없다. 

아니면 죽을 때까지 덤벼들 터이므로. 

세렝게티도, 허드슨도, 발테도, 모두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다. 

남은건 두 어린 용신들과 아이작. 

그러나 라이가는 걱정하지 않았다. 

‘용신의 힘은 다른 신의 영역에서 약해지는 법.’ 

이곳은 투신의 탑이다. 

다른 신격이 주인으로 있는 다른 세계다. 

괜히 용신의 힘을 발휘했다간 두 세계의 신격이 충돌하며 자멸할 가능성이 높다. 

“이자벨라. 이들을 살리고 싶다면, 말해야 할 것이다. ‘황금 염소’는 어디로 갔는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하지만, 아직 죽이진 않는다. 

들어야할 게 있으니까. 

그곳. 

심연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들어야겠다. 

알아야겠다. 

자신의 지워진 기억과, 왜 자신은 5문을 개방하여 절대적인 죽음의 상태에 놓였는지. 

이자벨라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 

이자벨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라이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우선 세렝게티부터 죽여야겠군.” 

하나씩 죽여나가면 결국 입을 열게 되겠지. 

그렇게 세렝게티의 앞에 라이가가 섰을 때였다. 

꽈앙! 

칼 한 자루가 그 사이에 박혔다. 

“음?” 

라이가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리자, 

“한 발자국만 더 다가가면 다음은 네놈의 목을 따주마.” 

“넌 누구냐?” 

“······ 그라시아다. 제국 최강의 기사여.” 

그곳엔, 그라시아가 있었다. 

세렝게티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저도 모르게 발이 나간 것이다. 

일전, 심연 영역에서 그라시아는 바알에게 패배하고 정신을 놓았다. 

그리고 세렝게티를 만나 첫눈에 반했다. 

물론 그건 허드슨이 제국에서 변신 물약을 통해 세렝게티로 변한 모습이었지만, 그라시아가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 여전히 아름답군.’ 

두근! 두근! 

다만, 심장이 요동칠 뿐이었다. 

그라시아의 앞에, 천사가 있었다. 

순백의 천사, 세렝게티. 

그녀를 심연에서 본 그라시아는 생전 처음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태어나서 정신을 차리라며 자신의 뺨을 때린 여자도 생전 처음이었거니와. 

그런데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 

평생 다시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다시 만나도 단순히 착각이라고, 다시 심장이 뛸 일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이게······ 이것이, 사랑이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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