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제일검
“다음 시련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까악?”
흉의 신, 그리고 재의 신을 향해 나는 항의하듯 외쳤다.
운명의 역설을 힘겹게 내디디며 ‘끔찍한 흉조’마저 멸했건만, 그 뒤의 시련이 없다고 말하는 모양새가 여간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재의 신이 난감하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음, ‘끔찍한 흉조’를 소멸시킨 건 예상 외였다, 까악.
아아.
‘롱기누스의 창’을 이용해 자신들이 만들 벽을 뚫어내며 내가 끔찍한 흉조에게 닿으리란 예상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다음 시련의 준비가 늦거나, 혹은 준비를 못 했다는 의미였다.
하기야 나라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피드런을 지시했더니 경쟁하는 상대방을 죽여버린 셈이었으니.
나였어도 뭐 이딴 살벌한 놈이 다 있나 싶었겠다.
“그럼 내보내주면 되지 않냐, 까악.”
-아직이다. 아직 완전한 ‘비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까악.
“고집을 피우는구나, 까악.”
단순히 끔찍한 흉조를 잡아먹은 걸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내 딴에는 고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재의 신이 판정승인 걸로 해도 될 터인데.
이쯤되자 한 가지 의혹이 입가를 맴돈다.
“혹시 끝내기 싫은 게 아닌가, 까악?”
이 둘은 사실 싸움을 끝내기 싫은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억겁의 세월 간 싸워오며 정이 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둘의 싸움이 끝나지 않으면, 나는 이곳 ‘틈새’를 빠져나갈 수 없다.
나는 재차 말했다.
“너희 둘은 사실 사이가 좋은 게 아닌가, 까악?”
동시에.
-까아악! 개소리하지 마라!
-까아악! 어린 까마귀가 못 하는 말이 없구나!
크게 분노했다.
세상이 떨릴 정도로, 고막이 뚫릴 수준으로 육성을 내뱉었다.
극도의 혐오를 담아서.
‘싫어하는 감정만큼은 진짜다.’
확실히 둘은 서로를 싫어했다.
하지만 이 싸움을 끝내기도 싫어했다.
일종의 계륵, 혹은 애증(愛憎)이리라.
“··· 너희가 서로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알겠다. 진정해라, 까악.”
정이 들었다는 걸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하여 적당히 둘러대자 분노가 차츰 사그라들었다.
-다시 그런 헛소리를 하면 잡아먹을 것이다, 까악.
-재의 아이야, 저런 흉물과 나를 엮지 말거라, 까악.
-흉물? 네 얼굴은 재앙 그 자체다, 까악.
-웬일로 칭찬을 하는 거냐? 까악.
-말을 말자, 까악.
-흉물스런 목소리 나도 듣기 싫다, 까악.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싸움이다.
나는 가만히 듣다가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런데 한쪽이 이기면 나머지 한쪽은 어떻게 되는 거냐, 까악?”
이 싸움의 결말이 궁금해졌다.
누가 강하느냐를 겨루는 싸움.
승자와 패자가 나뉘면 서로 얻고 잃는 게 있을 터였다.
-패자는 소멸한다.
-영원히 사라진다.
······ 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기껏해야 누가 더 강하니, 약하니 으스대는 정도로 끝날 줄 알았건만.
‘이래서 끝내지 않으려고 하는 거였군.’
왜 이 싸움이 영원불멸하게 지속되고 있는지 이제는 좀 알겠다.
둘은 약속한 것이다.
패자는 소멸키로.
신의 말과 약속은 절대적인 것.
확실히 둘의 사정은 이해했다.
허나, 결판을 내지 않으면, 나 역시 이곳에 영원토록 갇혀있어야 된다.
계속되는 예상 외의 상황.
불가능한 시련을 끊임없이 깨나가는 걸 보며 저 둘은 당황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대로 계속 시련을 주었다간 진정으로 ‘결판’이 날 수도 있었으므로.
하여, 내게 줄 시련이 꺼림칙하고, 마땅한 시련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흉왕을 소환해다오, 까악.”
그 선택, 내가 대신 해줘야겠다.
*
“시답지 않은 대화는 이제 끝났나?”
툭.
적막을 깨고,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남자에게로 향했다.
아니, 처음부터 ‘그’의 행보를 모두가 주목하고 있었다.
라이가.
제국 제일검이라 불리며 판게니아 전역에서 이름이 드높은 또 다른 기사왕!
‘이곳에는 없군.’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고는 있지만, 라이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란돌프의 정체가 뭐가 됐든 간에 그와는 별 상관 없는 일.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어딘가에 있을 ‘아드리움의 현’이다.
팔가의 비원, 생사록을 보자마자 복구해낸 천재.
그 천재가 이 탑에 있다.
라이가는 반드시 아드리움의 현을 찾아내야만 했다.
물론, 란돌프의 이야기가 흥미롭지 않았던 건 아니다.
정체를 숨기고 괴물의 도시 크람델에 잠입하여 오주력의 자리까지 올랐다는 게 퍽 재미는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다.
크람델에서 뭐 주워먹을 게 있다고.
그 척박한 북부의 땅은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제국 또한 마찬가지.
“대화가 끝났다면 슬슬 덤비거라. 지루해 죽겠으니.”
하아암!
라이가가 진심으로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했다.
이곳에 모인 존재들은 능히 왕국 몇 개쯤은 멸할 수 있는 전력이다.
그럼에도 라이가는 모두를 도발하는 걸 아랑곳하지 않았다.
비록 그의 생명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하나, 일평생을 쌓아온 무력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하물며 그 정도 되는 격의 소유자라면 진짜 죽을 때까진 죽은 게 아니다.
고로.
“덤비지 않겠다면, 내가 가마.”
라이가는 몸을 풀었다.
가장 먼저 박살 낼 대상을 찾고자 고개를 돌려 좌중을 살펴보았다.
이윽고 그의 눈에 한 여자가 들어왔다.
‘세렝게티. 기사왕 빌헬름의 최측근이자 순백의 기사라.’
최근 아이언 왕국의 패자인 프리드릭 왕과의 대결에서 승리했다지.
그리고 프리드릭 왕은 교만의 악마다.
‘교만을 뒤로 물렸다. 그만한 저력은 갖췄다는 의미일 터.’
교만.
그 장난을 좋아하고, 지기 싫어하는 악마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왜일까?
단순히 상대가 강하다고 쉽게 물러날 놈은 아닐진대.
‘저 아이들, 용신이로군.’
과연.
순식간에 라이가는 상대의 전력을 파악했다.
두 아이는 용신의 격을 갖춘 괴물이다.
다른 용신들처럼 약점을 찾아내지 않으면 무적이리라.
칼날용신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교만의 악마와는 상극이다.
그것도 극상극이었다.
천적을 눈앞에 두었으니 교만도 쉽게 욕심을 부리진 못했겠지.
라이가가 작게 미소 지었다.
진짜 재밌는 조합이었으니까.
다른 괴물들보다, 저 모호한 군집이 훨씬 흥미가 인다.
그래서.
스윽!
라이가는 몸을 움직였다.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
그 위명만큼이나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을는지.
순식간에 세렝게티의 정면에 선 라이가가 가볍게 검을 뻗었다.
채엥-!
막는다.
막아냈다.
쉐에엑!
반동으로 라이가의 몸이 뒤로 젖히자 그 틈을 노려왔다.
세렝게티의 검에 치솟은 오라.
‘검강이라.’
역시 재밌다.
검강이 이처럼 흔한 것이었나?
빌헬름의 최측근이라더니, 과연 제대로 배운 듯했다.
‘허나.’
꽈아앙!
강은 강으로만 쳐낼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올곧고 강력한 강이 상대의 강을 잡아먹기 마련이다.
“흐읍···!”
머금은 호흡을 내뱉은 세렝게티가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적으로 몸을 옆으로 돌려 타격을 분산하지 않았다면 몸 전체가 찌그러졌을 것이다.
단 한 번의 합으로 만들어낸 검강이 부서졌으니까.
“강의 경지에 이제 막 들어섰나보구나. 그래도 제법 훌륭했다.”
훌륭은 했다.
하지만 살짝 실망이었다.
이게 빌헬름의 최측근이라는 자가 가진 무력인가?
한 번 검을 나눈 것만으로도 라이가는 세렝게티의 전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인간치고는 강하긴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마왕을 상대로 진격할 정도로 느껴지진 않았다.
‘아니면 내가 너무 강해진 것이겠지.’
죽음의 경계에 이른 뒤.
라이가는 한단계 더 진일보 할 수 있었다.
막혀있던 벽을 부쉈다.
물론, 그럼에도 죽음을 극복할 수는 없었지만.
쉬익!
쩌엉!
다시 한 번 세렝게티의 전신이 흔들렸다.
아무런 소리와 기척없이, 인간의 인지를 뛰어넘어 도달한 검을 세렝게티가 다시 한 번 막아선 것이다.
채엥-!
채채채챙!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보이지 않는다.
잔상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빨라진다.
‘강해······!’
세렝게티가 이를 악물었다.
어디까지 막아낼 수 있는지 라이가는 자신을 시험하고 있을뿐이었다.
과연 제국제일검.
대륙 최강자라 불릴만 하였다.
위치를 바꾸는 별의 능력도 먹히지 않았다.
아예 발동을 안 한다.
‘별의 능력을 막고 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라이가는 별의 능력을 막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아예 다른 괴물들과도 위치변환이 되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세렝게티도 전장을 구를대로 구른 기사다.
쉽게 라이가의 검에 목을 내어주진 않는다.
‘위험······!’
찰나지간.
세렝게티는 위험을 감지하고, 급히 물러섰다.
“오호라.”
그걸 본 라이가가 미소 지었다.
지금, 세렝게티가 물러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죽었다.
“감지하는 능력 하나는 발군이로구나. 그것도 빌헬름이 가르친 건가?”
“······.”
세렝게티는 답할 수 없었다.
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방금 전 느껴진 ‘즉사’의 위험.
그게 정확히 뭔지 지금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이대로는 라이가를 당할 수 없다는 것.
촤악!
그때였다.
새하얀 채찍을 휘두르자 라이가의 전신이 순간적으로 구속되었다.
‘뱀의 속박.’
강제로 상대를 속박하는 별의 권능.
그것도 일반적인 별이 아닌 네임드, 요르문간드의 능력이다.
하지만 라이가는 당황하긴커녕 더욱 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게 너의 원래 모습인가?”
······ 처음부터.
25층에 입장할 때부터, 라이가는 이자벨라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왜 저들과 같이 있는지.
어찌하여 심연에서 염소와 함께 사라진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
실로 궁금했으나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너에겐 듣고싶은 게 많다.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
어차피 알아서 불게 될 터이므로.
*
아리아.
영원의 란돌프와 대결에 돌입한 그녀는, 입장한 즉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란돌프의 정체를 확인해서가 아니다.
그녀의 바로 앞에 있는 ‘무언가’ 때문이다.
툭.
투투툭.
그건 개미였다.
하지만 평범한 개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개미는 거대했으며, 진흙과도 같은 것이 전신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 진흙과도 같은 게 무엇인지 아리아는 본 즉시 알았다.
‘허물을······ 벗고 있어?’
개미는 지금 허물을 벗고 있다.
더 강력한 존재로 발돋움하고자 탈피하는 중이다.
하지만 탈피를 위해선 영양분이 필요하다.
스윽.
개미의 눈이, 아리아에게로 향했다.
“······!”
순간 아리아의 심장이 가라앉았다.
숨을 쉴 수도, 몸을 떨 수조차도 없었다.
고작 개미 따위에 아리아는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개미는 단순히 종으로서 규격할 수 없는 존재다.
저건······ 괴물이다.
끊임없이 먹어치우고 진화하는 괴물이었다.
개미왕 페르몬의 진정한 모습!
어찌하여 저런 모습으로 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털썩!
아리아는 떨리는 무릎을 지탱하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주력들에게 알려야······.’
알려야한다.
도전해선 안 된다고!
저것은 너무나도 절망적인 존재다.
도전자를 잡아먹고 계속해서 진화하는 괴수였다.
하지만 머릿속이 하얘졌다.
탈출을 해야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쩌억.
개미가 입을 벌렸다.
아리아의 정신도 함께 흐릿해졌다.
그 순간.
툭!
무언가가 개미의 옆구리를 때렸다.
그러자 개미의 움직임이 멎었다.
개미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개미를 멈춰세운 존재.
아리아는 정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에, 그를 바라보며 경악한 표정으로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다,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