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제왕
신비(神祕).
게임에서 캐릭터를 키울 때 일정 자격에 도달하면 획득하는 ‘이펙트(effect)’다.
비슷한 말로는 특수효과, 오라 등이 있다.
간혹 ‘위광’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며, 그 이름처럼 캐릭터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는 증명인 셈이다.
하지만 인간의 신비와 괴물의 신비는 그 중요도가 사뭇 다르다.
인간의 신비는 추가적인 능력보다 ‘외관’에 치중되어 있다.
더 휘황찬란하게 그 사람을 표현하는 데 집중됐다.
허나, 괴물의 신비는 그 괴물이 일생 간 쌓아온 ‘격’과 다름이 없다.
신비 자체가 중요한 능력과 연관되거나, 생명 혹은 무력과 연결이 된다.
심한 경우 존재의 모든 것을 신비에 담아두는 괴물도 있었다.
신비를 끄고, 켤 때 극적으로 달라지는 괴물들.
예컨대 가장 극적으로 신비를 사용하는 종족은 ‘요정’이다.
그리고.
“아, 아아······ 안 돼······!”
개미왕 페르몬의 신비.
그건 페르몬의 존재의 의의 그 자체였기에.
페르몬은 전신을 떨며 두려워했다.
“다, 다시 돌아갈 순 없다. 나는··· 나는 왕이니라······!”
개미의 왕.
그 이름과 관계된 신비일까?
허나, 그저 왕의 신비가 파괴된 것이라면 다시 쟁취하면 그만이다.
페르몬은 단순한 자격의 상실 때문에 이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
절대로 잃어선 안 되는 페르몬의 근원이 파괴된 탓이다.
꾸르르륵!
동시에 페르몬의 전신이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은혜’를······!”
신비로 입혀진 은혜.
히든 특성 돌연변이!
흑왕의 가장 위대한 능력인 ‘은혜 입히기’는 바로 신비를 주입하는 것이다.
신비에 ‘히든 특성’을 넣어 상대에게 입히는 게 그의 주능력이었다.
당연히 ‘히든 특성’을 담은 신비는 유일급으로 지정되어 절대로 파괴할 수 없다.
유일등급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이 세계에 없으니까.
······ 한데.
페르몬의 두 눈이 ‘영원의 란돌프’에게로 향한다.
란돌프.
투신의 탑에 존재하는 최종 보스이자, 다섯 개의 별을 거머쥔자.
처음에는 그가 페이즈 3으로 마침내 등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상대의 실체를 파악한 페르몬은 그제야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넌··· 넌 인간이 아니로구나. 네놈은······ ‘신비’······!”
유일등급을 뛰어넘는.
‘영원의 란돌프’라는 이름을 지닌, ‘규격외’의 신비라는 걸.
신비가 실체를 가지고 형상화한 것이다.
마치 요정처럼.
요정은 자신의 모든 격을 신비에 넣어두니까.
그러나 란돌프는 요정이 아니다.
고로, 저게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저건 란돌프······의 일부에 지나지 않다.’
덜덜덜덜!
온 몸이 떨린다.
두렵다.
무섭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페르몬은 ‘공포’를 느꼈다.
지능을 갖고 ‘절망’을 마주했을 때와는 결이 다른 공포다.
그때도 무력했으나 도리어 뛰어넘어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하지만 지금의 페르몬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미래를 향한 의지조차 피워내는 게 불가능했다.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공포.
‘신비를 파괴하는 신비라니! 저런 신비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신비는 자격이다.
일생을 일구어온 자격을 누군가가 강제로 파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그것은 분명히.
‘신비의 제왕······.’
지금, 페르몬의 눈앞에 있는 저것은 모든 신비의 위에 존재하는 지배자였다.
신비의 위에 군림하는 제왕의 신비.
오직 제왕만이 모든 자격을 파괴할 수 있을지니.
··· 자격을 부여하는 흑왕이 제왕이라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아니었던 것이다.
한데, 저 제왕의 신비조차, 유일등급의 ‘신비’를 파괴하는 것조차 란돌프의 일부일 뿐이다.
사흉 바알, 칼날용신, 그리고 신비파괴자!
이 뒤에 나타나는 건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이놈은, 란돌프는, 흑왕의 천적이다.
하늘이라 생각했던 흑왕의 능력은 란돌프의 ‘신비 파괴’ 앞에 무력할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흑왕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대비하기 위해선 전해야 하지만, 전할 수 없다.
‘퇴화한다.’
더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언어 자체를 잊었다.
시력이 감퇴되고, 점차 본능만이 남아간다.
예전의 하찮기 그지없던 개미로 돌아가는 것이다.
‘싫다.’
싫다.
싫다······!
《‘개미왕 페르몬’이 패배했습니다.》
《‘영원의 란돌프’의 남은 체력 100%》
《‘지배의 저주’가 중첩됩니다.》
《‘지배의 저주’가 발동합니다.》
《‘개미왕 페르몬’이 ‘영원의 란돌프’에게 지배됩니다.》
*
《‘개미왕 페르몬’이 ‘영원의 란돌프’에게 지배됩니다.》
“······.”
긴장상황에서 떠오른 글귀를 읽고 락투샤는 인상을 구겼다.
패배는 패배인데, 단 한 번의 패배로 지배당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단순한 저주의 지배를 넘어서, 스스로 무릎을 꿇기라도 했다는 건가?
“멍청한 놈 같으니······.”
결국 쓰게 한 마디 내뱉었다.
개미왕 페르몬.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지능 자체가 낮다.
아무리 어마어마한 재능을 지녔대도 머리가 멍청한 탓에 몸이 고생하는 부류다.
확실한 건, 놈의 독단으로 인해 난이도가 상승했다는 것.
‘다 쓸어버려야겠군.’
락투샤가 흑천검을 들었다.
아직 ‘칼날용신’에게 당한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지만,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었다.
특히 주력들이 가장 문제다.
대토룡, 궁기, 메두사······.
그리고 아리아.
저들이 제일 먼저 타겟으로 설정할 건 흑왕의 최측근인 자신과 다크엘프 로드일 게 분명했으므로.
“오주력 란돌프는 인간인가?”
그때였다.
락투샤의 예상과 달리, 주력인 ‘궁기’의 얼굴은 인간들에게로 뻗어있었다.
허드슨을 비롯한 인간들.
하지만 대답하지 않는다.
허나 상관 없다는 듯 궁기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오직 크람델에만 존재하는 신비의 탑. 오주력 란돌프가 최초로 돌파했던 신화의 시련. 그 시련이 이곳 투신의 탑에서 재현되었다.”
신화의 시련은 오직 오주력 란돌프만이 끝을 보았다.
백왕도 같은 시련을 겪었으나, 끝을 보진 못했다.
그럴진대 투신의 탑에서 같은 시련이 진행됐다.
“······ 투신의 탑은 현재 ‘챔피언 란돌프’의 경험을 ‘구현’하고 있다. 그리고 챔피언 란돌프는 인간이지.”
물론 신화의 시련을 경험한 존재는 더 있다.
그러니 비슷한 시련일 수도 있겠지만 크람델의 주력인 그들은 확신했다.
이토록 똑같이 구현해놓았다면, 남은 결론은 하나라고.
“챔피언 란돌프와 오주력 란돌프가 동일한 존재인가, 묻는 것이다.”
깊게 눌린 목소리.
허나 그 속은 배신감에 치를 떠는 감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크람델은 인간을 배척한다.
인간은 절대로 크람델에 들어올 수 없다.
주력이 되는 건 더욱 불가하다.
한데 동료라고 생각한 오주력 란돌프가 사실은 자신들을 속인 인간이었다는 게 확실시 된다면,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듯.
궁기가 시선을 옮겨, 허드슨의 뒤에 선 자들을 향해 말했다.
“특히 너희 둘은, 반룡인이었을 텐데?”
아이작과 이자벨라.
둘은 미켈라 세트를 착용한 채, ‘반룡인’으로 둔갑한 뒤 크람델에 입장했다.
하지만 지금 둘은 미켈라 세트를 착용한 상태가 아니다.
인간의 모습 그대로 마주한 것이다.
스으으으!
메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람델 전역을 살피는 눈인 메두사는 아이작과 이자벨라 역시 확인한 탓이다.
저 외형과 특유의 기운은 반룡인으로 위장하여 크람델에 들어온 자들이 맞았다.
모든 걸 보고 기억하는 메두사가 착각할 리는 없었다.
반룡인으로 변신한 인간.
그들 모두를 속이고 크람델에 위장잠입한 인간.
그리고 그 인간들과 함께했던, 오주력 란돌프.
퍼즐이 맞춰져 간다.
“감히······.”
처음에는 그저 의심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작과 이자벨라를 보고, 확신했다.
오주력 란돌프는 인간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들과 함께하는 자.
더 변명의 여지도 없다.
그르르르.
궁기가 어금니를 드러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속였고, 속았다.
남은건 처절한 응징뿐.
저 인간들을 모조리 물어죽이고, 란돌프마저 죽일 것이다.
“멈춰라.”
궁기가 공격하려던 찰나.
그의 앞을, 아리아가 막아섰다.
“비켜라, 아리아. 아니면 우리 모두를 배신한 놈의 동료를 감쌀 셈이냐?”
“······ 나는 지금 백왕님의 대행이다. 말을 삼가라.”
“대행은 대행일뿐이다. 넌 백왕님이 아니야. 비켜라, 함께 물어죽이기 전에.”
궁기의 분노는 이미 한계치를 넘었다.
고오오오오오.
궁기의 모습이 바뀌어간다.
순식간에 호랑이 같은 얼굴과 갈고리 모양의 발톱, 앞다리에 날개가 돋아있는 흉악한 존재로 탈바꿈했다.
이전보다 더욱 커지고, 마력의 농도는 비교할 바가 안 된다.
그야말로 야수왕이라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아리아는 비킬 수가 없었다.
‘란돌프가······.’
투신의 탑을 입장할 때부터.
아리아는,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수련자의 산에서 보았던 그분이······ 오주력 란돌프라니.’
자신을 구했던, 자신을 넘어섰던, 바로 그 검사.
그 검사의 모습이 석상이 되어 탑의 입구에 우뚝 서있었으니까.
*
처음에는 잘못 본건 줄 알았다.
챔피언 란돌프의 석상.
눈이 부실 정도로 번쩍이며 존재감을 드러낸 그 석상의 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란돌프······?”
아리아는 석상의 아래 적힌 이름을 읽었다.
란돌프.
오주력 란돌프와 같은 이름이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수련자의 산에서 보았던 그 검사는, 분명히 오주력이 아니었으므로.
-······ 마음에 둔 자가 있습니다.
-잊어라.
-그는 락투샤를 뛰어넘는 강자입니다. ······락투샤에게서 저를 살렸으며, 어쩌면 사흉조차 제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백왕이 오주력을 소개할 때 아리아는 수련자의 산에서 만났던 그를 떠올리며 선을 그었다.
그를 마음에 두었다고 했다.
검강을 발현하고, 비석을 반으로 갈랐던 그 검사의 인상은 아리아의 뇌리에 깊숙하게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탑을 오를수록 조금씩 의문이 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25층에 도달했을 땐.
‘창술사 발테가 왜 저곳에 있는 거지?’
허드슨과 인간들, 그 뒤에 숨어있는 창술사 발테를 보고 절망하고 말았다.
모두의 뒤에 숨어있는 듯 조용히 창을 쥔 자.
수련자의 산, 혼돈영역에서 숱하게 자신이 몰아붙였던 창술사 아닌가.
재능이 없으니 포기하라고.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창술사다.
왜 저자가 허드슨의 무리에 함께 있을까.
이유는 하나뿐일 것이다.
그 검사가 창술사 발테를 구하고, 동료가 된 것이리라.
허드슨은 오주력의 도시인 미궁도시를 관리하는 인간.
그러니, 만약 수련자의 산에서 만난 그 검사가 오주력 란돌프라면······.
‘대체, 왜······.’
란돌프는 왜.
크람델에 들어와, 그들 모두를 속인걸까.
자신을, 주력들을, 백왕마저도.
모두를 속인 채······ 왜 시체 까마귀의 연기를 해왔단 말인가.
심지어 백왕이 소개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후 북천빙검을 소유하고, 함께 사막도시 파이살메르를 향할 때도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진정으로 처음 본 듯이 자신을 대했다.
설마, 처음부터 자신들을 이용하기 위해서였을까?
“··· 내가 확인해보고 오겠다. 그때까지, 우리의 목적을 떠올리는 게 좋을 거다 궁기.”
그래서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확인을 해봐야겠다.
영원의 란돌프.
그의 모습을 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테지.
그런 아리아의 발언에, 궁기를 비롯한 주력들 모두가 당황하고 말았다.
“아리아. 그가 맞다면 도전하지 않는게······.”
대토룡이 급히 말렸다.
오주력의 두려운 점은 ‘신비 파괴’에 있었다.
만약 도전했다가, 아리아의 신비가 파괴당한다면 걷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리아’가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