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결집
영원의 란돌프!
그 이름이 떠오른 순간 투신의 탑은 다시 한 번 소란에 휩싸였다.
“드디어······!”
“진짜 란돌프인가?”
“페이즈 3이 라스트 보스라고?”
사흉 바알, 그리고 칼날용신.
둘 다 도전자들을 압살하는 천재지벽급의 괴물임은 틀림없었다.
하여 페이즈3에 무엇이 나올지 모두가 긴장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페이즈3이 란돌프라면?
“끝! 끝이다!”
“마침내 저주를 풀 수 있는 거야!”
어쩌면, 드디어 라스트 보스의 페이즈에 진입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도전 조건’이었다.
“으음······.”
“도전 자체가 말도 안 되게 어렵군.”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사람들은 침음을 삼켰다.
《페이즈 3, ‘영원의 란돌프’가 등장합니다.》
《투신의 탑 25층에서 도전할 수 있습니다.》
《투신의 탑 25층은 ‘자유 투기장’입니다.》
《승점을 높여 도전하십시오!》
《승점이 높을수록 ‘영원의 란돌프’가 약화됩니다.》
《‘자유 투기장’에서 패배하거나, ‘영원의 란돌프’에게 패배한 자는 1층으로 돌아가며 ‘지배의 저주’에 걸립니다.》
《‘지배의 저주’가 3개 쌓이면 ‘영원의 란돌프’에게 지배를 당하게 됩니다.》
25층에서만 도전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20층 이상에 오른 도전자 자체가 극소수다.
도전자의 레벨과 같은 해골병사 1만 구.
하물며 층을 오를수록 특성이 추가되는데,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해간다고 하더라도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뿐만인가.
‘이런 빌어먹을······!’
최강남.
신의 섬 튜토리얼에서 3위에 자리했던 2세대 각성자!
영웅연합의 전폭적인 지원과 압도적인 재능으로 22층까지 어떻게든 클리어할 수는 있었지만, 그도 23층의 벽에 막혀버렸다.
‘층을 오를수록 레벨이 오른다. 레벨이 오르면 해골병사의 레벨도 오른다.’
도전자의 레벨이 오르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저레벨에서 소위 말하는 ‘템빨’로 무장한다고 해도 1만 구의 해골병사를 잡으면 당연히 레벨이 오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레벨이 오를수록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이딴 걸 깨라고 만들어 놓은 거냐?”
욕이 절로 목 끝까지 차올랐다.
최강남의 몰골은 이미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훤칠하고 수려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단번에 끌었던 그는, 쉴 새 없이 바닥을 구른 끝에 먼지와 일체가 되어버렸다.
《‘투신의 탑’ 입장자가 500,000을 돌파했습니다.》
《탑의 난이도가 하향조정됩니다.》
그나마의 희망은 투신의 탑으로 도전자가 몰리고 있다는 것.
그 숫자가 어느덧 50만이다.
탑의 난이도가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깰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이 못 깨면 그 누구도 못 깬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자신감은 단번에 부숴졌다.
‘박현명은 이걸 어떻게 깬 거야?’
박현명.
신의 섬에서 압도적인 무위로 모두를 꺾고 1등의 위업을 이룬 그 괴물.
놈은 벌써 탑의 25층에 도달했으니까.
‘대체 어느 거대 단체가 박현명을 지원하는 거지?’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영웅연합은 현재 세계적으로도 가장 유망한 곳.
자신의 재능과, 전폭적인 영웅연합의 지원이라면, 그 괴물 같은 박현명조차 넘어설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비웃듯 박현명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영웅연합 이상의 단체가 박현명을 지원하는 걸까?
이 탑은, 절대 혼자의 힘으로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그라시아’가 25층에 오릅니다.》
《‘황금률의 마법사 유니온’이 25층에 오릅니다.》
《‘이자벨라가’ 25층에 오릅니다.》
《‘다크엘프 로드’가······.》
하지만 25층에 오르는 도전자의 숫자는, 계속해서 증가추세였다.
꽈아악!
최강남이 입술을 깨물었다.
달그락!
달그락!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는, 거대한 해골병사들을 바라보며.
“내가 최강이다. 내가 최강이란 말이다······!”
검을 들었다.
*
그라시아와 유니온은 25층에 도착한 즉시 전방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한건가?”
“음, 박현명은 25층에 있을 텐데.”
넓디 넓은 투기장.
그곳에는 그라시아와 유니온뿐이었다.
먼저 도착했어야할 터인 박현명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라시아와 유니온이 이토록 빠르게 25층에 도달한 방법은 간단했다.
경험치를 물약으로 만들어 저장하는 수법.
그리하여 레벨을 강제로 다운 시킨 뒤, 탑을 오른 것이다.
물론 레벨이 낮아졌다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도전자가 많아지며 탑의 난이도가 몇 차례나 하향조정된 끝에 겨우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으윽!
스아아악!
그런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도전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종족과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그들 모두 각자의 방법으로 그 거대한 해골병사들을 처리했으리라.
“그라시아?”
찰나, 그라시아의 귀로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그라시아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로군.”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
아이언 왕국의 왕, 프리드릭 왕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뒤 판게니아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된 그녀를 그라시아가 모를 리 만무했다.
하지만 단순히 유명해서 아는 것만은 아니다.
둘은 직접적으로 접점이 있었다.
‘바알에게 패한 뒤 심연에서 만났었지.’
가장 마지막으로 본 게 ‘심연’에서 ‘바알’을 상대할 때다.
그때 그라시아는 세렝게티에게 추태를 보였다.
바알에게 패하고, 정신을 놔 버렸으니까.
-아름답구나.
-너 같은 천사가 있다면, 천국도 나쁘지 않겠군.
-그럼 지옥에 왜 천사가 있지?
세렝게티를 보고 한눈에 반한 듯이 행동하지 않았었나.
당시의 기억이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다.
··· 그래서일까?
‘으음.’
좀처럼 그라시아는 세렝게티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보고 있노라면 왜인지 껄끄러웠으므로.
물론, 당시 세렝게티는 ‘허드슨’이 변형물약을 통해 변신한 모습이었다는 걸 그라시아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허드슨. 그리고······ 숫자가 꽤 많군.’
게다가 나타난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동료로 보이는 자들.
특히 개중에는 ‘허드슨’도 있었다.
미궁도시의 실질적인 운영자라든가.
오주력 란돌프를 대신해서 그곳을 이끄는 인간.
허드슨과 세렝게티의 대화로 보건대, 둘의 사이가 평범한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
그 순백의 기사가 저토록 당황하는 것을 보면.
‘란돌프의 동료들인가.’
그들 모두가 바로 란돌프의 동료들이다.
이 강력한 저주를 일으킨 란돌프의 동료들이 탑을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한 명 한 명이 제법이다.
특히······ 저 아이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소년과 소녀.
두 아이들에게서 정체 모를 불길함이 느껴진다.
그라시아가 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대도, 쉽게 대할 수가 없을 듯했다.
쉬이이익!
곧이어 다른 이들이 나타났다.
“주력들이로군.”
유니온의 말에, 그라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왕을 따르는 크람델의 괴물들.
궁귀, 대토룡, 메두사, 그리고 아리아.
백왕의 딸 아리아를 비롯한 주력들이 총집합했다.
‘강해졌다.’
크람델의 괴물들.
예전 그대로라면 그라시아 혼자서 저들을 모두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력들 역시 강해졌다.
그리고 주력들이 강해졌다는 건.
‘백왕이 힘을 되찾았나?’
백왕이 온전한 힘을 되찾았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저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이전과 비교를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저 반인반수의 여자.
‘백왕과 같은 어금니를 갖고 있군.’
그라시아도 보자마자 알았다.
저 여자가, 아리아가 백왕의 자식이라는 걸.
다른 주력들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다.
흑왕이 세력을 불리며 강해지고 있을 때, 그들 역시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그들 중 한 명.
거대한 용, 대토룡이 허드슨을 발견하곤 물었다.
“넌 허드슨이로구나. 오주력은 어디있느냐?”
“······ 대토룡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허드슨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대토룡과 허드슨은 몇 차례 안면이 있었다.
균열의 탑 1층에서 쓰러진 대토룡을 성녀 세아와 함께 치료해주기도 했고,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접점이 있었다.
‘아는 사이라면 곤란하게 됐군.’
친숙한 듯한 둘을 보며 그라시아는 조심히 검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일대 일이라면 누가됐든 이길 자신이 있으나, 숫자가 너무 많다.
유니온과 자신은 고작 둘뿐이다.
또한, 저들은 숫자만 많은 것도 아니었다.
양과 질. 모두를 만족하는 그룹들.
“오주력이 어디 있냐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음. 그럴 거라 생각했다. 허나, 탑을 오르면 알게 되겠지.”
“······ 쉽지 않을 겁니다.”
다행히 두 파벌이 서로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다.
적대적으로 노려보며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그때였다.
쉬이이익!
다시 한 번 워프가 열렸고.
대토룡은 고개를 돌려, 살기를 흩뿌렸다.
“······ 락투샤.”
“··· 진짜 안 죽었었군.”
오크로드이자 소드마스터인 락투샤도 인상을 구겼다.
균열의 탑.
그곳에서 만난 대토룡을 죽였다고 생각하고 흑왕에게 보고했는데, 흑왕은 대토룡이 살아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데, 진짜로 살아있는 것이다.
막상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 어이가 없었다.
그 상처를 입고 어떻게 살아있는 걸까?
“살아돌아갈 생각은 버리거라, 락투샤.”
“내가 할 말이다.”
예견된 난투극이다.
하지만 나타난 건 락투샤만이 아니다.
‘개미왕 페르몬.’
놈은 본 즉시, 그라시아의 전신에서 소름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불쾌하다고 해야 할까?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도 싫을 만큼 역겹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허나 락투샤도, 개미왕 페르몬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이미 한 번 ‘칼날여왕’에게 패한 뒤 막대한 데미지를 입은 것이다.
그나마 멀쩡한 건 세 번째 나타난 자였다.
‘다크엘프 로드······.’
얼굴과 전신을 검은 천으로 가린 정체불명의 존재.
이 역시 까다롭다.
“난 먼저 도전하겠다.”
“······ 페르몬, 또 독단으로 행동하겠다는 거냐?”
“이런 허접한 놈들과 싸우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난 더 강한 놈과 싸울 거다. 분명히 ‘영원의 란돌프’라는 놈은 칼날여왕보다 강할 테지.”
그 말을 끝으로.
《‘개미왕 페르몬’이 ‘영원의 란돌프’에게 도전합니다.》
슈욱!
멋대로 도전을 시작했다.
개미왕 페르몬이 사라지자, 락투샤가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락투샤가 눈을 떴을 때.
“······.”
“······.”
적막이 흘렀다.
하지만, 모두가 더없이 긴장하고 있었다.
란돌프의 동료들, 그라시아와 유니온, 백왕 산하의 주력들, 그리고 흑왕의 최측근들.
이들이 한데 뭉쳐 싸우면 격변이 일어날 건 자명했으니.
그러나,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재밌는 놈들이 모여있군.”
“으음, 정말 투신의 탑이 이상해지고 있구나······.”
제국 최강의 검, 라이가.
전 챔피언 산샤.
다시금 분위기가 뒤바뀌었다.
이제는 진짜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다.
그라시아의 손에 식은땀이 맺혔다.
저 둘의 존재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들 모두를 긴장케 했다.
그리고.
슈우욱!
“아아아, 여신이시여! 여신의 인도를 받는 분이시여! 여신의 총애를 받는 분이시여! 어디 계십니까?! 저 아론이 왔습니다!!!”
······ 저놈은 또 뭐냐.
*
개미왕 페르몬은 다른 이들과 경쟁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저, 보고 싶은 것이다.
더 강한 자들을 마주하고 싸우고 싶은 것이었다.
비록 칼날여왕을 이길 수는 없었으나.
‘나는 그 한 번의 싸움으로 더 강해졌다.’
페르몬은 강해졌다.
더욱이 강한 상대와 싸울수록 페르몬은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져 갔다.
이대로면 충분히 칼날여왕과 다시 싸운대도 5할의 승률은 가져갈 수 있으리라.
이길 수 있다.
계속해서 강해지기만 한다면, 그 누구라도 꺾을 수 있다!
“······? 네가 란돌프냐?”
곧이어, 개미왕 페르몬의 앞으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인간이었다.
딱히 강해 보이진 않는다.
도리어 칼날여왕이 더 강할 것 같았다.
‘별로 배울 것도 없겠군.’
페르몬은 내심 실망했다.
칼날여왕에 비하면 란돌프는 진정으로 볼품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페르몬은 단말마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어?”
콰드득!
무언가가, 깨지고 있다.
부서지고 있다.
파괴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물질적인 게 아니다.
자신의 육체나, 기운 따위도 아니었다.
쩌어어억!
그런데도 확실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육체나 마력보다도 더욱 중요한 게.
존재의 격을 나타내는 지표이자, 자신의 증명과도 같은 것이.
“어어어?”
페르몬은 당황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던 탓이다.
란돌프가 행하고 있는 것은 페르몬에게 그야말로 불가해 그 자체였다.
하지만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도, 파괴행위는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리고 머지않아.
“뭐, 뭐냐······!”
사라졌다.
완전하게, 모습을 감췄다.
이처럼 무력했던 적이 또 있을까.
이에 페르몬은 온몸을 움츠리며, 란돌프를 향해 두려운 목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
“내, 내 ‘신비’를 어떻게 파괴한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