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즈 3
개미왕 페르몬.
놈은 물건이었다.
흑왕이 만들고 창조한 것 중에서도 단연코 으뜸가는 지적생명체.
오랜시간 셀 수 없이 많은 은혜를 베풀었으나, 페로몬만큼이나 강한 욕망을 지닌 개체는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다.
‘놈에게는 두 가지 본능밖에 없다.’
흑왕은 미소 지었다.
페로몬이 진화하고자 남겨둔 본능은 두 가지뿐이다.
살아남는 것.
그리고 강해지는 것!
그 두 가지 개념 외엔 모두 버렸다.
그래서일까.
무엇을 가르치든 순식간에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검기를 발현하고 검강을 발산하기까지 수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절망’의 세포를 이식받기는 했지만 말이다.
‘사흉은 모두 개성이 뚜렷하지.’
멸망이 탄생시킨 가장 강력한 네 마리의 괴수.
사흉은 그 하나하나가 전혀 다른 개성을 갖추고 있었다.
예컨대 바알은 저주의 집약체다.
그 단단하고 거대한 몸뚱이는 어마어마한 양의 저주를 저장하는 저장고에 불과하다.
집약된 저주로 말미암아 현상을 비트는 게 바알의 진정한 쓰임새였다.
지금 투신의 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그곳에서 ‘소환’된 모든 것들은 바알의 저주에 의한 것이다.
‘바알은 소환하고, 절망은 복제한다.’
사흉은 모두 개성이 넘치지만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개체를 불려나간다는 것이다.
바알은 저주를 통해 막강한 존재들을 소환하고, 절망은 자신의 세포를 이식하여 스스로를 복제한다.
사흉이 넷만으로 찬란했던 구제국 문명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다.
‘페르몬은 절망의 세포를 이식받고도 살아남았다.’
지금까지는 페르몬이 유일한 성공 개체다.
흑왕이 ‘히든 특성’의 은혜를 베풀어 개체를 강화시킨 건 오직 ‘절망의 세포’를 이식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절망의 군단’을 완성하고, 이 세계를 파멸시킨다.
그리하면······ 그리해야만.
‘······ 천상에 닿을 테니.’
거만하고 오만한 자들의 이상향.
오로지 완벽만을 추구하는 그 세계에 발을 들일 테니.
하여 흑왕은, 진심으로 페르몬이 투신의 탑 정상에 오르기를 바랐다.
‘항상 궁금했지. 사흉의 서열에 대해서.’
사흉들 간에도 서열이 있을 터.
또한, 이번 싸움은 대리자를 내세워 겨루는 바알과 절망의 1차전이다.
충분히 가늠할 수 있으리라.
누가 더 우위인지.
물론 흑왕은 절망이, 페르몬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최고와 최고가 만나 최강이 됐다.
심지어 페르몬은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성장 중인 괴물.
놈의 강해지고자 하는 열망은, 실로······.
‘페르몬은 탐욕 그 자체다.’
······ 실로 탐욕적이었으므로.
*
“퉤!”
페르몬이 살점을 뱉어냈다.
칼날용신의 어깻죽지를 물어뜯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을 씹어삼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페르몬은 상대의 진실을 알았다.
“뭐냐, 넌. 가짜냐?”
외견은 분명히 진짜인데 진짜가 아니다.
칼날용신의 격을 빌려와 저주로 빚어놓은 인형이었다.
어떻게 전혀 반대되는 격을 빌려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저 ‘저주’는 자신이 흡수할 수 없는 종류라는 것이다.
“인형인 주제에······ 이건 어떻게 한 거지?”
페르몬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양팔이, 잘려있었으니까.
칼날용신의 뼈는 모조리 잘라내어 바닥에 널브러트렸다.
더 이상 뼈를 재생할 수도 없는 상태일진대, 완벽하게 제압했다고 생각한 순간 반격을 해온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인지를 뛰어넘어서.
“이렇게? 이렇게 하는 건가?”
스르르륵.
잘려나간 양 팔이 재생한다.
재생한 팔로 말미암아 다시 검을 들고 휘저어보았다.
일견 무성의하게 휘두르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조금 전 하나가 이용한 기술의 묘리가 담겨 있었다.
순식간에 페르몬의 기세가 달라지며 공간 자체를 장악한 것이다.
하지만 페르몬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 아직은 어렵군. 공간을 비틀어서 심상으로 움직이는 검 같은··· 음?!”
촤악!
순간적으로 페르몬이 고개를 젖혔다.
그러자 더듬이 하나가 잘려나갔다.
그야말로 찰나와 같은 시간.
조금만 늦었어도 목이 잘렸으리라.
오금이 저려왔다.
아무런 살기도 없다.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오로지 본능에 의지해서 피해낸 것이다.
“인형이지만······ 넌 강하군.”
페르몬은 고개를 주억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칼날용신.
저 녀석은 인형이지만, 강하다고.
틀림없이 본체는 더 강하겠지.
역시 세상에는 강한 놈들이 많다.
그래서 즐거웠다.
아직 자신이 넘어설 것이 더 많음에.
더 강해질 수 있다는 확신에!
‘너 역시 넘어서 주마!’
*
《‘개미왕 페르몬’이 ‘칼날용신’에게 패배했습니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67%》
무적이 풀려서일까.
개미왕 페르몬의 도전으로 칼날용신의 체력이 대폭 깎여나갔다.
물론 실패했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물 밀 듯이 도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크엘프 로드’가 ‘칼날용신’에게 패배했습니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55%》
《‘대토룡’이 ‘칼날용신’에게 패배했습니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47%》
《‘궁귀’가 ‘칼날용신’에게 패배했습니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36%》
······.
······.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15%》
그렇게 반나절가량이 지나자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은 고작 15%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이후로도 끊임없이 도전이 이루어졌으나.
《‘라이가’가 ‘칼날용신’에게 패배했습니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15%》
《‘산샤’가 ‘칼날용신’에게 패배했습니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15%》
체력이, 더 이상 깎이지 않는다.
제국의 최강자인 라이가와 전 챔피언인 산샤가 도전했음에도 1%도 깎이지 않았다.
다른 괴물들도 깎은 걸 그 둘이 깎지 못할 리가 없으니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 상태로 시간이 지날수록.
《‘칼날용신’의 체력이 회복됩니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18%》
《‘칼날용신’의 체력이 회복됩니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21%》
······.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78%》
체력이, 복구되어간다.
어느덧 피해의 대부분을 수복했다.
“아, 안 돼······!”
“이러다가 100%가 되겠어!”
“끄, 끝이다······.”
사람들은 절망했다.
아무리 애를 쓰고 수를 모아봐도 결국 공략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15%에서 왜 더 안 깎인 거야?”
“또 다른 무적기라도 있는 거야 뭐야?”
“아무나 다시 도전해 봐!”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납득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위로 올라, 저주를 정화해야만 한다.
란돌프에게 닿아야만, 란돌프를 해방시켜야만 이 사태를 걷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페이즈 2에서 막혀버렸다.
이대로 며칠만 더 지나면 탑은 판게니아와 지구 전부를 파괴하리라.
그렇게 모두가 절망하던 그때였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77%》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76%》
······.
“뭐, 뭐야?”
“왜 다시 체력이 깎여?”
“지금은 도전 안 하는 중일 텐데?”
돌연히 칼날용신의 체력이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도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칼날용신에게 더는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체력은 시간이 갈수록 더 빠르게 줄어들었다.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18%》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17%》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16%》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15%》
마침내 다시금 15%가 남게되자.
“또 회복되는 거 아니야?”
“어차피 여기서 다시 안 줄어들겠지.”
그리 말하면서도, 모든 이들이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에 집중했다.
하지만 한참이나 15%에서 줄어들지 않았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던 그때.
《‘칼날용신’의 남은 체력 0%》
《페이즈 2, ‘칼날용신’이 토벌되었습니다!》
“······!”
“······!”
모두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뜰 수밖에 없었다.
15%에서 한꺼번에 남은 체력이 0%가 되며, 토벌이 완료된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누가 도전을 하고, 토벌을 했는지, 아무런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됐든 칼날용신은 토벌되었다.
그리고 토벌되었다면.
“다음은······.”
“뭐가 나타나는 거야?”
··· 페이즈 3으로 나타날 건 무엇인가.
탑을 오르는 이들, 오르지 않는 이들 모두가 다음으로 출현할 존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쿠웅!
쓰러진다.
거인의 해골 1만 구가.
하지만 해골병사들이 쓰러지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보다 더욱이 중요한 건.
까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끔찍한 흉조’가 타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씩 타오르다가, 이내 완전히 재가 되어버렸다.
그것을 보며 흉의 신과 재의 신이 소리를 내질렀다.
-사기다, 까악!
-사기다, 까악!
······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기라고.
나 역시 이런 일이 가능할 줄은 몰랐으니까.
아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파격적일 줄은 몰랐다.
‘운명의 역설은 내게만 작동하는 게 아닌가 보군.’
운명의 역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존재감이 희미해진다는 것.
그건 비단 나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닌 듯싶었다.
란돌프 또한 ‘운명의 역설’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 증거가 바로 ‘끔찍한 흉조’가 타올라 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끔찍한 흉조’의 옆에 있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 내가, 신들이 세워놓은 투명한 벽을 뚫고 끔찍한 흉조를 죽일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롱기누스의 창으로 벽을 뚫다니!
-그런 활용은 생각도 못했는데!
사지가 전부 경직되기 직전에, 롱기누스의 창을 냅다 끔찍한 흉조를 향해 던졌다.
도저히 그것 외엔 방법이 안 떠올랐기 때문이다.
차원을 강제로 통과시키는 힘이라면 ‘보이지 않는 벽’ 정도는 뚫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 생각은 다행히 적중했다.
‘존재의 대결.’
롱기누스의 창으로 벽을 뚫은 즉시, ‘재앙의 까마귀’를 소환해 나는 끔찍한 흉조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함께 타오르며 ‘존재의 대결’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끔찍한 흉조는 란돌프가 만들어낸 허상.
단순한 존재의 대결로 간다면 내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
스르르르.
곧이어 재가 된 ‘끔찍한 흉조’가 이내 내게 깃들었다.
오른팔이 마치 암흑물질 마냥 완전히 까맣게 잠식됐다.
‘······ 이런 식이었군.’
이건 끔찍한 흉조의 존재, 란돌프의 일부다.
탑을 올라, 계속해서 ‘존재의 대결’을 벌이며, 하나가 되는 것.
아무래도 이게 내게 주어진 진정한 시련인 듯싶었다.
《‘재의 시련(5)’를 극복했습니다!》
《보상으로 초월유일급 신비 ‘끔찍한 흉재’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획득하지 않을시, 다음 시련으로 넘어갑니다.》
《갓포인트(GP) 30,000점이 수여됩니다.》
《갓포인트를 사용해 ‘재앙의 까마귀’의 레벨을 10으로 격상시킵니다.》
《‘재앙의 까마귀’의 레벨이 최대치(10Lv)에 도달했습니다.》
《‘재앙의 까마귀’ 스킬이 ‘대재앙의 까마귀(1Lv)’로 진화합니다.》
해골병사 1만 구를 누가 더 빠르게 퇴치하느냐.
그런 건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상대를 제거하면 결국 내가 1등이니까.
어깨를 으쓱하며, 나는 두 신을 향해 말했다.
“다음은 뭐지?”
*
《페이즈 3, ‘영원의 란돌프’가 등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