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텀 죽이기
결국 박태우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페이즈 2.
칼날용신의 약점을 마냥 숨기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태우의 기자회견을 들은 사람들의 절망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란돌프 자체가 약점이라니?”
“이게 말이 돼······?”
“중간보스를 꺾어야 라스트 보스를 만날 수 있는 게 국룰 아닌가?”
“그런데 라스트 보스가 약점이라고?”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이런 게임을 만들면 제작자는 돌팔매에 맞아 죽을 것이다.
앞뒤전후가 완전히 잘못된 설계였으므로.
도저히 깨라고 만든 게임이 아니었으니까.
칼날용신은 중간 보스다.
그런데 중간 보스를 깨려면, 라스트 보스를 먼저 깨야 한단다.
하지만 라스트 보스를 만나려거든 중간 보스를 이겨야만 했다.
애초에 제대로 된 공식 자체가 성사가 안 된다.
“이걸 어떻게 깨?”
“진짜 무적이네······.”
“그래서 이세라가 약점을 못 찾은 거구나.”
“당연히 찾을 수가 없지. 란돌프가 거기 없었는데.”
“잠깐. 그럼 칼날용신이 태어난 게 란돌프의 업적이라는 거야?”
이세라의 침공 당시, 갑작스럽게 생성된 용맥.
플레이어들은 필사적으로 그 용맥을 지키며 칼날용신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용맥을 만들고 칼날용신이 태어난 게 모두 란돌프의 의지였다면 이건 결코 허투루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이다.
“··· 메인 퀘스트 10 말이야. ‘광룡 아인하사르’의 시련이 ‘용신 아인하사르’의 시련으로 바뀐 것도 그쯤이지?”
“새로운 용신의 탄생에 ‘용신 아인하사르’가 도움을 줬나?”
“그게 보상일지도 모르고.”
“최근에 용신 아인하사르의 업적 깬 사람이 있어? 한번 물어볼 수 없나?”
“아인하사르한테 물어보려면 메인퀘 10 밀고 그 보상으로 질문해야 하는데, 다른 좋은 보상들 포기하고 누가 그걸 물어봐?”
메인퀘스트 10을 클리어하면 그 보상으로 아인하사르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잘만 하면 유일등급 도안마저 찾을 수 있는 질문이었기에, 클리어한 사람들 모두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 질문하는 편이었다.
당연히 그토록 중요한 질문을 ‘칼날용신의 탄생’과 관련하여 날려먹을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만약 란돌프가 칼날용신의 주인이라면?
······ 란돌프는 그 즉시, 유일무이한 ‘지구의 수호자’로 등극한다.
란돌프.
그는 누구인가?
약점이 없다고 가만히 넋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전보다 열심히 사람들은 ‘란돌프’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를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져온 정보라는 게 이게 전부냐?”
“어떻게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어?”
······ 너무나도.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로 아는 것이 없었던 탓이다.
제아무리 란돌프가 조용하고 은밀하게 행동했다 한들, 그만한 위업을 이룬 자의 족적은 어딘가에 남아있어야만 했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너무나도 많은 신화를 달성하며 완성한 자.
그러나, 없다.
란돌프의 흔적이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가 깔끔하게 지워놓은 것처럼.
“란돌프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몰랐군······.”
“그만한 업적들을 달성했음에도 우리는 버그니, 치트이니, 운영자이니, 자기합리화 하기에 바빴으니까······.”
“본능적으로 인정하기 싫었던 거지. 란돌프와 나의 차이를.”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됐으니 말이야.”
“눈을 돌리고, 외면했다··· 우리도 영웅회의 ‘팬텀 죽이기’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셈이다.”
“사실 우리보다 영웅회가 더 란돌프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을까?”
그랬다.
항상 거짓된 정보를 퍼트린 영웅회를 욕하고, 플레이어들을 좌지우지하는 그들을 손가락질하면서도, 정작 란돌프에 대해 제대로 알아볼 생각을 안 했다.
은연중에 영웅회의 거짓 정보를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다.
빌헬름의 대원정은 처참하게 실패했고, 란돌프의 행보는 모두 거짓이며, 피도 눈물도 없는 위선자가 바로 팬텀이라는 이야기를.
팬텀 죽이기.
그 진행에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조한 것과 다를 게 없다.
하여, 그들은 몰랐다.
란돌프가 어디서 시작했고 어디까지 닿았는지.
말도 안 되는 전설과 신화를 수없이 이룩했음에도 말이다.
그러자 플레이어들은 자처하며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sns를 통해, 방송을 통해, 모든 소통의 창구를 통해서.
“이 탑은 우리가 외면하여 생긴 ‘업보(業報)’다······.”
“인과응보. 우리의 영웅을 우리가 스스로 타락시킨 것이다.”
“··· 나는 침묵했다. 내 일이 아니었으니까.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한들 란돌프의 일대기가 딱히 진실이라는 게 믿기지도 않았으니까.”
“이 탑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란돌프’가 행한 모든 게 진실이었음을. 우리에게 직접 경험케 하고 있는 것이다.”
“영웅회의 말들은 모두 거짓이다! 우리의 우상을 그들은 짓밟았고, 우리는 침묵하며 결과적으로 그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다! 보아라, 저 저주받은 탑을!”
“더 이상 침묵하지 마라. 일어나라! 일어나서, 탑을 올라라! 모두 ‘란돌프 일대기’를 함께하자!”
그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
란돌프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플레이어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란돌프의 이름을 각인하게 된 순간.
지구의 2세대 각성자들도 하나, 둘 탑을 오르기 시작했으며, 판게니아에서도 더 많은 도전자가 ‘투신의 탑’을 방문했다.
《현재 투신의 탑을 오르는 도전자의 숫자가 100,000명을 넘겼습니다.》
도합 10만!그렇게 모두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 그 찰나였다.
《탑의 저주가 약화됩니다.》
《페이즈 2, ‘칼날용신’의 무력이 20% 약화되었습니다.》
약화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공략은 불가했다.
“진짜 답이 없는 거야?”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어떻게 해야 노여움을 푸실련지······!”
몇몇 플레이어는 이 현상 자체를 ‘란돌프의 분노’로 정의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탑을 올라 그의 일대기에 공감하면 분노를 풀어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답은 없었다.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좌절하던 그때였다.
《‘약점’이 해방되었습니다.》
《칼날용신의 ‘무적’ 상태가 일시적으로 풀렸습니다.》
갑자기, 난데없이.
······ 칼날용신의 무적이 풀렸다.
*
-누가 흉한놈 아니랄까 봐, 흉한 짓만 골라서 하는구나!
‘재의 신’이 대노했다.
‘흉의 신’이 대결을 위해 소환한 개체.
하필이면 ‘끔직한 흉조’를 불러들인 탓이다.
그 저주받은 흉조는 일반적인 ‘흉의 일족’이 아니다.
태양과 달처럼, 흉의 일족 이면에 존재하는 저주의 덩어리였다.
이제 막 ‘재의 일족’이 된 어린 까마귀는 절대로 상대할 수 없는 괴물!
-걱정하지마라. 충분히 ‘대등한 대결’을 펼칠 셈이니, 까악!
-어디가 대등하다는 거냐? 머리에 구멍이 났냐, 까악?
-누가 더 빠르게, 더 많은 ‘시련’을 깨는지의 대결이다. 이정도면 충분히 대등하지 않나, 까악?
-··· 오호라.
그제야 재의 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레벨의 해골병사 1만 구를 누가 더 빠르게 토벌하느냐.
하물며 더 많은 ‘히든 특성’도 추가된다.
-허무, 거인, 드루이드. 세 가지 특성이 추가된 해골병들이다.
-부족하다, 까악. 손재주와 올마스터, 웨폰마스터도 넣지.
-음, 죽을텐데?
-그래야 더 확실한 표본이 잡히지 않겠느냐? 까악.
-그것도 맞다.
재의 신은 한 술 더 떴다.
아예 여섯 개의 특성이 추가된 1만 구의 해골병사를 투입하기로.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운명의 역설’이 발동합니다.》
《‘박현명’의 존재감이 희미해집니다.》
······ 몸이, 전혀 움직이질 않는다.
끔찍한 흉조가 등장한 즉시.
마치 정지라도 해놓은 듯 꿈쩍하지 않았다.
그제야 알았다.
저건 끔찍한 흉조이며, 동시에.
《‘끔찍한 흉조(凶兆), 란돌프’》
··· 란돌프다.
정확히 말하자면 ‘란돌프’로 직접 변신했던, 심연에서 바알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형태의 하나였다.
란돌프의 형태 중 하나가 형상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저건 가짜이되 가짜가 아니다.
이 탑에서 구현된, 란돌프의 일부였다.
‘탑 자체가 란돌프의 손과 발이 되었다.’
투신의 탑.
탑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란돌프의 일부다.
그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저 ‘끔찍한 흉조’는 가히 란돌프의 손이나 발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래서 운명의 역설이 발동한 것이다.
-자, 시작하거라.
-재의 아이야, 해낼 것이라 믿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둘은 천하태평하기 그지없었다.
꽈아앙!
동시에 세상의 중심부에 투명한 벽 하나가 세워졌다.
그 벽은 정확히 나와 끔찍한 흉조를 나눠놓았다.
곧이어.
달그락!
달그락!
내가 있는 곳, 그리고 끔찍한 흉조가 있는 곳에 거대한 해골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가 각각 1만 구.
게다가 이번엔 쓰러지지 않는다.
무려 여섯 개의 히든 특성을 지녔으니, 거구를 지탱하기 위한 능력치가 부족해도 충분히 만회가 되는 거겠지.
각종 무기를 들고, 정령을 소환하며, 수많은 클래스로 압도한다.
신비의 탑, 신화의 관을 끝까지 오를 때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때도 6개의 히든 특성이 추가된 해골병사가 등장하진 않았다.
‘더이상 요행은 통하지 않는다.’
그런 뜻인가?
이제야 제대로 된 시련이 시작된 느낌이다.
지금까지 행해온 시련은 모두 애들 장난이라 여겨질 정도.
까아아아아악-!
반대편에서 끔찍한 흉조가 울부짖었다.
까악!
까아악!
동시에 검은 태양이 떠오르며 수많은 ‘도사 까마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태양’에선 피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떨어진 피가 바닥을 적시자.
쩌적!
쿵! 쿠우웅!
해골병사들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한다.
절대적인 죽음.
저 죽음을 피하고자 바알도 ‘멸망의 파편’을 드러낼 정도였다.
멸망의 파편이 아니었다면, 바알은 저 검은태양 앞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터.
이길 수 없다.
아니, 이대로 있다간······.
‘죽는다.’
······ 확실하게, 죽을 것이다.
*
칼날용신 하나.
그녀를 정면에서 마주한 누군가가 작게 감탄했다.
“굉장한 신격이로군.”
새로운 도전자다.
하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도전자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인간과 비슷한 크기의 ‘개미’가 있었다.
변종, 혹은 돌연변이.
그러나 느껴지는 기세는 결코 개미라고 할 수 없다.
그 기운은 일전에 도전한 도전자보다도 훨씬 더 드셌다.
하지만 이곳에 오른 이상 멸해야 할 적일 뿐.
스릉.
하나를 상대로 검을 뽑아 든 개미가 말했다.
“내 이름은 페르몬. 개미의 왕이다.”
개미의 왕 페르몬!
흑왕에 의해 만들어진 변종.
돌연변이 히든 특성을 부여한 수많은 벌레들을 고독처럼 가둬두고, 그곳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괴물이다.
한데, 페르몬이 들고 있는 검은 무척 특이한 검이었다.
붉은 기운이 호수처럼 흐르는, 추악하기 그지없는 저주가 깃들어있는 검.
성검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마검(魔劍)이었다.
하나의 시선이 검에 닿자 페르몬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설명했다.
“참고로 이 검은 악마를 봉인한 검이다. 음. 뭐였더라, 무슨 죄악이었는데.”
페르몬이 더듬이를 마구 움직였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아무렴 별 상관은 없었다.
“그런데 너는 검에 가두기엔 아깝다. 그래서 너를 잡아먹을 거다.”
결정을 내린 페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이어서 말했다.
“내가 사흉 ‘절망’을 먹어치운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