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기누설
-······.
-어린 까마귀가 꽤 하는구나!
흉의 신, 그리고 재의 신은 굉장히 흥미롭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넓은 평야.
곳곳에 널린 뼈의 산 앞에서 나는 크게 울부짖었다.
“까악!”
까악!
까아악!
내 주변을 날아다니는 더 많은 ‘까마귀’들.
까마귀의 핵을 흡수한 이후, 신이 내려준 ‘시련’을 통해 나는 기술을 연마하는 중이었다.
왜 갑자기 ‘신비의 탑’에서 겪었던 시련을 내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보다 더 쉽군.’
나로선 감사할 일이었다.
처음 시체 까마귀가 되어 크람델에 도착했을 때.
나는 신비의 탑을 오르며 해골병사들을 상대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백왕마저 이룩하지 못한 업적을 달성해 ‘영원의 란돌프’를 얻었다.
한데, 지금 나는 이곳에서 똑같은 시련을 마주하는 중이다.
‘레벨4. 하물며 그때보다 능력치도, 장비도 좋으니까.’
레벨 4의 해골병사 1만 구.
기껏해야 단일 능력치는 40에 불과하다.
능력치 총합 200, 웬만한 초보자들도 상대할 수 있는 수준.
전투 능력도, 센스도, 모두 한참 떨어지는 단순무식한 괴물.
1만 구가 모였다고 해도 10레벨을 넘어서는 능력치를 지닌 내가 상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장비도, 장비에 착용한 탈리스만마저도 처음 신비의 탑을 올랐던 때와 비교가 안 된다.
-······.
-크하하! 아주 훌륭한 까마귀로다.
흉의 신은 힐끔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재의 신은 입이 귀에 걸릴 듯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둘의 태도가 이토록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재의 일족의 핵을 먹었으니.’
나는 ‘흉의 일족’이 아닌 ‘재의 일족’을 택했다.
이미 란돌프가 ‘끔찍한 흉조’가 되어 흉 일족의 의지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저 두 신은 내 상태를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저들은 나한테 많은 게 섞여 있는 걸 이미 알고 있다.’
계속해서 나를 부르는 호칭을 다르게 한 것.
콩벌레, 하마, 코끼리, 귀뚜라미 등등.
단순히 저들이 까마귀라서, 지능이 낮아서만은 아니다.
주신의 말은 하나도 허투루 흘려들어선 안 되는 법이었다.
그들의 표현과 인간의 표현은 분명히 다르고, 그 말의 안에 담긴 무게 역시도 무척이나 다르므로.
당연히 저들이 장난식으로 표현한 호칭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 두 신은 내 상태를 꿰뚫어보고, 더 나아가 란돌프에게 닿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닿았을 것이다.
‘란돌프가 끔찍한 흉조라는 걸 투신 카라스는 보자마자 알아봤었지. 저 둘은 투신 카라스가 관찰한 것보다 더 많은 걸 알아봤을 터.’
하여, 선택에 더없이 신중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가 ‘재의 일족’을 택하자 흉의 신은 입맛을 다셨다.
-둘 다 먹을 줄 알았는데.
-재의 일족이 더 우월하다는 증명 아니겠느냐? 크하하하!
-생각보다 현명한 까마귀로군. 둘 다 먹었으면 배가 터져 죽었을 테니.
-‘다른 쪽’은 이미 흉의 일족을 택했으니, 이제야 비로소 완벽한 비교가 가능하렷다!
그런 내 생각은 둘의 대화를 통해 입증됐다.
핵을 고르는 것 역시 신의 시련 중 일부였던 셈이다.
욕심을 부려 두 개를 전부 먹으려 했다면 죽었을 것이고, ‘흉의 일족’을 택했다면 나는 ‘무력의 비교’가 불가능해져 이곳을 탈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신의 비교를 위해선 둘 다를 알아야만 한다.
‘흉의 일족에 대해선 알고 있다. 남은건 재의 일족뿐.’
식은땀이 흘렀다.
솔직히 긴장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리라.
핵을 둘 다 먹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 흉의 일족을 택하는 것도 모두 고려 대상이었으니까.
게다가 처음부터 더 시선이 간 것도 ‘흉의 신’이었다.
언제나 흉의 신이 먼저 말했고, 재의 신은 받아치는 형식으로 대화가 진행됐다.
당연히 주도권이 ‘흉의 신’에게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흉의 일족이 되는 길을 택했으리라.
‘전부 함정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재의 일족이 되는 길 외엔 전부 함정이었다.
저 둘은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의 시련을 연달아 내리고 있었다.
이게 필멸자와 불멸자의 차이일는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쉰 그때였다.
《‘재의 시련(2)’을 극복했습니다!》
《보상으로 신화급 신비 ‘재의 까마귀’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획득하지 않을시, 다음 시련으로 넘어갑니다.》
《갓포인트(GP) 5,000점이 수여됩니다.》
《‘갓포인트’로 ‘재의 신’이 지닌 기술을 익히거나, 익힌 기술의 레벨을 올릴 수 있습니다.》
《익힐 수 있는 기술은 ‘붉은 태양’, ‘활화산’, ‘잿더미’, ‘재의 바다’, ‘재의 하늘’, ‘붉은 죄악’이 있습니다.》
《현재 익힌 기술은 ‘재의 까마귀 소환술(5Lv)입니다.》
《갓포인트를 사용해 ‘재의 까마귀 소환술’의 레벨을 10으로 격상시킵니다.》
《‘재의 까마귀 소환술’의 레벨이 최대치(10Lv)에 도달했습니다.》
《‘재의 까마귀 소환술’ 스킬이 ‘재의 상급 까마귀 소환술(1Lv)’로 초월합니다.》
란돌프로 끔찍한 흉조가 되기 전에 걸었던 길.
시체 까마귀 소환술을 이용해 신비의 탑을 올랐던 그때와 똑같다.
‘벌써 두 번째.’
첫 번째 ‘재의 시련’은 핵을 선택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같은 레벨인 1만 구의 해골병사를 쓰러트리는 것이었다.
이제는 다음 시련을 깨부술 차례.
그리고 내 예상이 맞는다면.
-다음 시련도 마찬가지로 해골병사 1만 구를 쓰러트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나타날 해골병사는 이전의 해골병사와는 비교가 안 되게 강하지. 까악!
재의 신이 음흉하게 웃었다.
어디 이번에도 이길 수 있겠느냐는 듯이.
-그래도 도전해 보겠느냐?
내심 피식 웃고 말았다.
‘나에 대해 전부 아는 건 아니로군.’
아무래도, 내가 무슨 업적을 달성했는지까지는 재의 신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신비의 탑을 이미 끝까지 올라본 경험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면 같은 시련을 내릴 리 없으니까.
나는 자신있게 외쳤다.
“도전하겠다, 까악!”
그 순간이었다.
《도전자가 더 높은 단계의 시련에 도전합니다.》
《업적 ‘재(災)의 신화에 도전하는 무모한 도전자’를 달성했습니다!》
달그락!
달그락!
동시에 쓰러진 해골병사들이 다시 일어난다.
《‘해골병사’의 레벨은 도전자의 레벨과 같습니다.》
《‘해골병사’가 ‘허무’로 인한 상극의 속성을 갖게 됩니다.》
상극의 속성을 지닌 채로!
신비의 탑을 올라 이놈들을 처음 만났을 땐, 얼마나 당황했던가.
하지만 이제는 절로 미소가 지어질 지경이었다.
시련의 끝.
그 끝에 얻을 보상 역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달콤하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므로!
게다가 시련을 오를 때마다 갓포인트만 얻는 것도 아니었다.
신비의 탑에서 획득 가능했던 ‘신비’마저 계속해서 초월하는 중이다.
그때와 같은 시련이지만, 전혀 다른 이름으로.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다시 한번 끝을 보자.’
*
20층을 최초로 돌파한 ‘박현명’의 이름이 뜬 즉시.
-뭐?
-박현명?
-‘신의 섬’ 튜토리얼 1등?
-저 이름이 여기서 왜 갑자기 튀어나와?
모두 당황하고 말았다.
이제 막 튜토리얼을 끝낸 2세대 각성자의 이름이 나타났으니까.
-2세대 각성자도 투신의 탑을 오를 수가 있나 근데?
-ㅇㅇ가능함
-판게니아 붕괴율이 높아질수록 던전이나 탑 같은 게 지구 곳곳에 생겼는데, 그중 투신의 탑으로 들어가는 탑도 몇 개 생기긴 했을걸?
-하긴. 2세대 각성자도 메인 퀘스트 목록은 똑같으니까
-근데 ‘투신의 탑 오르기’는 메인 퀘스트 9 아니냐? 왜 벌써 올랐대?
-그러게. 벌써 메인 퀘를 거기까지 다밀었나?
-아니, 불가능한 미션 아니었어?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박현명이 벌써 투신의 탑을 올랐는지, 올라서 어떻게 20층을 클리어했는지.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야. 깰 수는 있지. 레벨의 한계를 넘어선 무력만 갖췄다면
-그게 말이 쉽지 쉽겠냐고
-그러니까 준비가 필요하지. 기술을 연마시키고 장비를 몰아줘야하니까. 거대 길드나 연합들은 이미 눈치채고 준비중일걸?
-아아, 템빨로 몰아붙이겠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런데 박현명은 어떤 거대 세력이 뒤에서 밀어주는 걸까?
튜토리얼이 끝난 이후 박현명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무려 란돌프를 넘어서 1위를 탈환했음에도 은둔자의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데 느닷없이 투신의 탑에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은 박현명의 뒤에 어떤 ‘거대 세력’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실제로 ‘거대 세력’을 등에 업은 사람들이 하나, 둘 투신의 탑을 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확히 7일 차가 된 무렵.
동시다발적으로 대량의 20층 돌파자가 발생했다.
《‘그라시아’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루시퍼’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최강남’이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쿠에쿠’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이자벨라’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허드슨’이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세렝게티’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아이작’이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발테’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성녀 세아’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이세라’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루카리아’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
······.
《‘라이가’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산샤’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아론’이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개미왕 페르몬’이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다크엘프 로드 카산드라’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민트초코맛있어요’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아리아’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궁귀’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메두사’가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대토룡’이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정말 의외의 이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들이.
당연히 각성자들과 관련된 모든 커뮤니티는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만에 몇 명이 20층을 클리어한 거야?
-와, 최강남이랑 쿠에쿠도 올랐네. 1세대 각성자들은 뭐하냐?
-그라시아 있잖아
-민초도 있음!!!
-민초단이여 다시 일어나라!
-이세라랑 루카리아는 뭐야? 설마... 가명이겠지?
-크람델을 다스리는 괴물들도 있는데?
-그럼 페이즈 2에 대한 힌트도 얻은 건가?
-제발 누가 공유좀 해줘!
*
《투신의 탑 20층을 돌파하여 페이즈 2에 대한 ‘힌트’가 주어집니다.》
“······.”
투신의 탑 20층을 힘겹게 클리어한 이들.
그들은 주어진 힌트를 바라보며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당연한 일이다.
페이즈 2.
칼날용신의 약점에 대한 힌트가 정말 말도 안 됐으니까.
게다가 아주 단출하기 그지없는 힌트만 나타났을 뿐, 정확히 어떤 조건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만고의 준비 끝에 만신창이가 되어 겨우 도달한 곳이건만!
“지금 이딴 걸 힌트라고 준 거냐?”
“고작 이게 다야?”
“뭐 어쩌라는 거냐, 이건······.”
모두가 오만상을 찌푸린 채, 재차 눈앞에 나타난 힌트를 바라봤다.
《힌트(Hint) : 란돌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