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永遠)’의 시련
락투샤의 본능이 외쳤다.
이길 수 없다고.
아무런 공격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어도 지금 상태로는 이길 수 없다-.’
확신했다.
저 여자는, 칼날의 용신은, 무적이다.
무적을 상대로 싸우는 것만큼 미련한 짓은 없다.
하지만, 떠볼 수는 있을 것이다.
좌아아악!
검강이 늘어난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거대해져간다.
그리하여 하늘을 뒤덮은 검강을 락투샤가 일격에 쏟아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피할 수 없는 공격.
칼날용신은 그 공격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어 공격이 닿자.
‘강제 무효화.’
칼날용신에게 닿은 영역의 검강만이 무(無)로 돌아갔다.
검강조차도 무력화시키는 능력이라.
그렇다면 남은건 실력이다.
락투샤가 오른발을 뻗었다.
휘이익!
한달음에 달려나간 락투샤의 검이 칼날용신의 머리를 베었다.
차창!
칼날용신의 날개뼈가 길게 늘어나 락투샤의 검격을 막았다.
‘막았다.’
락투샤의 눈에 이채가 뗬다.
검강은 무효화시켰으면서, 직접 검을 휘두르는 건 막아섰다.
직접적인 타격에는 어느정도 반응한다는 뜻.
‘공격해온다.’
무적이라 하였으나, 그게 적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직 방어력 하나만 무한대라는 의미.
칼날용신도 이곳에 소환된 이상 락투샤를 쓰러트려야만 한다.
샤샥!
스아아아악!
곧이어 칼날용신의 등 뒤에서 길게 솟아난 뼈들이 락투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치 촉수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촉수가 전방에서 덮쳐온다.
쩌어어억!
그러자 락투샤의 근육들이 순식간에 팽창했다.
‘방어일변도. 공격할 생각 자체를 버린다.’
무적이긴 해도 공격력 자체가 방어력만큼 높지는 못할 것이다.
락투샤는 모든 기운을 집약해 오로지 방어에만 치중했다.
‘어디 한 번 뚫어보거라.’
절대로 뚫리지 않는 갑옷.
이 상태의 락투샤는 그야말로 무적이다.
사흉 바알의 무식하기 짝이없는 공격도 락투샤의 갑옷을 뚫지는 못했다.
서로가 무적이 된다면 과연 이 싸움의 행방은 어찌될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슈우우욱-!
‘막았······.’
푹-!
푸푸푸푹!
*
“유니온. 정신이 드나?”
황금률의 마법사 유니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그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으음······.”
눈을 뜨자 자연스럽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마치 태양처럼 란돌프의 황금 석상이 미치도록 반짝이며 시선을 강탈하는 곳.
‘탑의 입구.’
이곳은 투신의 탑 입구였다.
하지만 몸이 꿈쩍도 하질 않는다.
‘바알의 저주로군.’
이유는 뻔했다.
바알의 저주가 온몸을 잠식한 탓이다.
그나마 죽지는 않아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 그라시아.”
유니온은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남자, 그라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라시아는 여전히 무감정한 표정과 어조로 입을 열었다.
“멍청한 짓을 했더군.”
“······ 내가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기억이 안 나는 거냐?”
“무슨 기억을 말하는 거냐?”
되묻자 그라시아의 미간이 살짝 모였다.
“바알과의 전투를 말하는 거다. 탑에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도전하지 않았나? 그리고 스스로 탈출했으니 살아있겠지.”
바알과의 전투!
확실히 유니온은 투신의 탑에 입장하자마자 바알에게 도전했다.
하지만 인벤토리를 이용한 온갖 변칙적인 공격의 귀재인 그도 ‘사흉 바알’의 체력을 15% 정도 깎는 데 그쳤다.
그 괴물은 자신의 변칙성을 뛰어넘는 체력과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무서운 바알의 면모(面貌)는 따로 있었다.
“아······.”
순간 유니온이 몸을 잘게 떨었다.
그제야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가 생각난 까닭이다.
솔직히 전투의 양상 자체는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압도적인 공격력, 혹은 대비만 되어있다면 바알의 체력을 깎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 뒤다.
“저주······ 도, 도전해선 안된다. 바알을 토벌해선······!”
“그게 무슨 소리냐?”
“바알은··· 저주를 모으기 위한 제물일 뿐이다.”
“저주를 모은다? 무엇을 위해?”
“더욱 무섭고 두려운 것들을 이 탑으로 ‘소환’하기 위해!”
유니온의 안색이 하얘졌다.
그가 스스로 탈출한 이유.
바알은 단순히 체력만 높은 고깃덩어리였다.
원한다면 더 많은 체력을 깎을 수 있었을 터이나, 그러지 않고 빠져나온 것은 바알이 ‘미끼’임을 알아봐서다.
이곳에 소환된 사흉 바알은 저주의 집약체.
더 크고 무서운 저주를 행하고자 스스로 준비된 제물이다.
얼마나 큰 ‘저주’를 행하려고 바알 정도의 제물을 준비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탑을 올라, 저주를 정화하지 않고 바알을 토벌하면, 걷잡을 수 없는 ‘대재앙의 저주’가 시작될 것이다.
하여 유니온은 전투를 중단하고 탈출을 마음먹었다.
고작 바알의 토벌은 이 뒤에 일어날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았으니까.
그라시아가 더욱 진중한 눈빛으로 물었다.
“뒤에 뭐가 소환된다는 거지?”
“··· 모르겠다. 확실한 건 아무 생각 없이 바알을 토벌했다간 존재하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모든게 한데 뒤섞여 소환될 것이라는 거다. 모든 게 뒤틀리고 종국에는 ‘재앙’ 그 자체가 탑을 잠식하며 세계를 뒤덮겠지.”
유니온.
그는 오랜 세월을 살며, 제국의 초대 황궁마법사로서 수많은 마법의 극을 본 자다.
그중에는 ‘저주계열’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이곳, ‘투신의 탑’에서 행해지고 있는 저주는 그조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규모의 저주였다.
먼 옛날 신화시대에나 일어날 법한 저주가 왜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건지도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제물로 바쳐진 건 바알만이 아니다.’
이곳엔 온갖 저주의 형태들이 모여있다.
그걸 바알을 공격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거대하고, 강력해서, 황금률의 마법사인 그조차도 인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설마 4대 악신을 소환하려는 건가?’
발락가스, 앙그라 마이뉴, 가즈, 디아블로.
그중 하나의 악신 그 자체를 소환하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판게니아는 다시 한 번 또 다른 형태의 ‘멸망’을 마주하게 되리라.
여신을 잃은 판게니아는 절대로 그 악신에 대처하지 못할 터.
“바알은 이미 토벌되었다.”
“······ 뭐?”
찰나, 유니온의 두 눈가가 거칠게 떨렸다.
“소드마스터 락투샤라는 놈이 토벌했다는군.”
“제대로 저주를 정화하지 않고 말이냐?”
“그렇겠지.”
“아······.”
유니온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제물의 공양이 끝나버렸다.
왜 바알을 1층에서도 손쉽게 공략할 수 있게끔 만들어 놨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함정이라는 게 너무 뻔한데도.
공략을 해버린 것이다.
유니온이 입술을 깨물곤 물었다.
“다음으로 소환된 건······ 뭐냐.”
“칼날용신.”
“지구에서 새로 태어난 그 용신?”
“그런 것 같다.”
“······ 이세라도 찾지 못한 무적의 조건을 찾아야만 토벌할 수 있겠군.”
마왕군의 두 번째 사령관.
다른 두 용신을 먹어치운 이세라도 칼날용신의 약점을 찾지 못했다.
그랬을진대, 탑에 오르는 자들이 어떻게 그 약점을 찾을 수 있겠는가.
모두가 머리를 모으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설령 머리를 모으더라도 과연 공략이 가능할는지.
태어날 때부터 이세라를 상대로 어느정도 우위를 점했던 용신이다.
지금은 그 당시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을 것이다.
감히 예측마저 되지 않을 만큼.
“유니온. 왜 칼날용신이 소환됐는지 짐작가는 바가 있나?”
그때였다.
그라시아가 심각한 눈빛으로 물었다.
도저히 그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흉 바알, 그리고 칼날용신.
그 둘이 무슨 관계가 있어서 소환된 건지.
유니온이 반 자포자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라. 대체 왜 소환에 응했는지.”
칼날용신은 지구의 수호자다.
신성한 존재라는 뜻이다.
왜 저주를 매개로 한 소환에 응했는지는 칼날용신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다.
차라리 심연의 주인들이라면 모를까.
완전히 상반되는 격을 지닌 칼날용신이 소환된 건 확실히 이례적이었으므로.
“무적이라 하지 않았나?”
“그라시아. 그렇게 궁금하면 탑을 올라라. 어쩌면 조건을 알려줄지도 모르니.”
모든 열쇠는 탑에 있다.
탑을 오르지 않고 도전하는 자들은 절대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다른 탑의 시련들도 뒤섞이고 있다.’
바알의 죽음으로 인해 탑의 시련마저 요동치는 중이다.
난이도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하여, 유니온은 탑을 오르는 걸 포기했다.
물론 다른 탑의 시련이 뒤섞여도 결국 시련은 시련.
도전자가 포기하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가능성이 생긴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왜 하필이면 그 탑의 시련이······.’
하필이면 ‘그 탑’의 시련이 뒤섞였다.
절대로 깨는 게 불가능한, ‘영원(永遠)’의 시련이.
*
전 챔피언 산샤.
그는 탑의 변화를 보고, 작심했다.
‘탑의 끝에 올라 란돌프에게 다시 도전하리라!’
이건 하늘이 준 기회였다.
다시 란돌프와 대결을 치루라는.
란돌프처럼, 탑의 끝까지 올라 도전자의 자격으로 그에게 재차 도전해 챔피언의 자리를 탈환하리라!
“음······?”
그렇게 탑의 20층에 도달한 산샤는 눈앞에 펼쳐진 시련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해골병사’ 1만 구의 레벨은 도전자의 레벨과 같습니다.》
《착용한 장비를 제외한 모든 도구의 사용이 금지됩니다.》
《모든 가호와 수호의 작용이 벗겨집니다.》
달그락!
달그락!
눈앞에 놓인 1만 구의 해골병사들.
문제는 일반적인 해골병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마주한 산샤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대체 이 시련이 왜 투신의 탑에······?”
강해질수록 어려워지는 신비의 탑.
오로지 크람델의 괴물들만 도전해왔던 그 탑의 시련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
시간은 흐른다.
속절없이 계속해서 흘러만 갔다.
《48시간이 경과했습니다.》
《‘투신의 탑’을 공략하십시오!》
《13일이 더 흐르면 ‘투신의 탑’이 쓰러지며 저주가 방출됩니다.》
《탑의 20층을 클리어하면 ‘페이즈 2’를 공략할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층을 올라갈 때마다 힌트는 더욱 구체화됩니다.》
계속해서 추가되는 공지사항.
점점 상황은 위험해지고 있었다.
탑의 더 높은 곳에 올라야만 공략의 힌트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페이즈 2가 시작되고, 모두가 도전하는 것을 포기했다.
-용신은 약점을 못 찾으면 공략할 수 없다매?
-신비의 탑 시련은 뭐야? 저거 크람델에 있던 거 아니었어?
-20층 이상 오르는 건 불가능함
-저거 신비의 탑에서도 최악의 난이도로 분류되는 거임. 신화난이도였던가...
-아니, 나랑 같은 레벨의 해골병사 1만 구를 어떻게 상대해?
-아무리 템빨이 좋아도 1만 구는 좀...
단순히 칼날용신의 문제가 아니다.
20층 이상에서 발생하고 있는 ‘탑의 시련이 바뀌는’ 현상 자체가 문제였다.
신비의 탑.
괴물들조차 오르기 힘들다는 그 탑의 시련 중에서도 최악으로 분류되는 난이도!
‘플레이어 톡’의 분위기는 한층 더 심각해졌다.
하지만 모두가 내린 결론은 똑같았다.
-답이 없네...
도저히, 답이 없다.
3일이 지나고, 4일이 지나도, 칼날용신의 체력은 여전히 100%였다.
사람들의 표정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5일 차가 되던 날 하나의 새로운 메시지가 떠오르기 전까진 말이다.
《‘박현명’이 투신의 탑 20층을 클리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