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지변 <11권 끝>
‘내 이름을 불러주셨어!’
아론이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격한 감정이 솟구치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두 여신을 목도한 이후.
아론의 사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으니까.
썩어가던 사지가 다시 붙고, 말라버린 신성력이 돌아온 게 부가적으로 보일 만큼 아론의 인생에서 그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은 단언하건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선택받았다!’
이것이 신의 계시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비록 천덕꾸러기, 악동의 취급을 받았으나 어찌 됐든 아론은 태어날 때부터 여신을 따르는 신도였다.
하지만 직접 여신을 마주한 적 없었다.
그 누구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심지어 여신과 직접 소통한다는 교황 성하마저도 거짓이라 생각했다.
여신교가 행하는 건 여신 비즈니스.
여신 사업과 다를 게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분께선, 오직 저분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여신의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저분의 선택은 여신의 선택과 다를 게 없어. 나는 구원받았다···!’
죄를 사하고,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 순간 두 여신이 자신을 향해 미소 지었다.
진정한 구원이다.
이게 구원이 아니라면, 무엇이 구원이겠는가!
그러니, 마땅히 그에 걸맞은 응답을 보여야만 한다.
추앙의 기도문?
저분께서 곧 여신이실진대 외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기뻐하며 외치리라.
오히려 부족하다.
자신의 헌신을 보이려거든.
아론은 목숨을 바쳐 다시금 자신을 버렸다.
그 순간.
“기적이다···!”
아론은 기적을 마주했다.
*
쿠릉! 콰르르릉!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전을 말하자마자.
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산샤는 인상을 구겼다.
‘탑 자체를 뒤흔드는 힘. 카라스는 아닐진대······.’
투신 카라스에 의한 현상은 아니다.
이 모든 흔들림의 근원은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산샤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대체 뭘 하려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무엇이 됐든 소용없다.
무슨 짓을 해도, 지금 이곳에 있는 자신을 움직이는 건 불가능할 테니.
‘위치고정. 이 자리에 있는한 나는 무적이다.’
애초에 실패를 염두에 둔 시련이다.
또한, 이는 산샤가 직접 도전자들을 상대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는 시련치고는 너무나도 강했고, 직접 도전자들과 싸우는 건 격이 맞지 않다.
하여 탑 자체가 그가 도전자들과 부딪히지 못하게끔 제약을 걸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우회하면 그만이었다.
제법 그럴싸한 시련을 던져주고, 실패하면 자신이 직접 나설 수 있게끔.
백만분의 일의 성공확률이라도 있으면 시련으로 인정되니까.
‘신의 방패 이지스(Aegis).’
그것을 위한 방패다.
산샤는 한계를 넘어섰고 초월하며 한 가지 권능을 거머쥐었다.
죽음에서 돌아온 그가 얻은 절대적인 방패, 이지스!
고정된 위치에 있으면 모든 능력치를 방어로 전환할 수 있다.
절대로 뚫리지 않는다.
무너지지 않는다.
무적(無敵)이다.
‘느껴보거라. 벽을.’
도전자들이 결코 넘어서지 못하는 벽.
16층에서 자신을 당황케 했을지는 몰라도 이번엔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자신이 느꼈던 그 기분을, 녀석도 맛보았으면 했다.
이후 시련이 실패하면 직접 녀석을 상대해줄 생각이었다.
모든 도전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
‘란돌프.’
······ 산샤는 그에게 다시 도전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
탑에서 되살아나 ‘시련’이 된 건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였다.
다시 한 번, 제대로 싸우고 싶다.
그때의 벅찬 기분을 재차 맛보고 싶다.
질투의 악마가 아닌 지금의 상태로 란돌프를, 빌헬름을 마주하고 싶었다.
“음······?”
하지만.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한 탑은, 더 크게 균열을 만들기 시작했다.
쩌적!
쩌저적!
바닥이 갈라지고, 모든 게 ‘붕괴’해간다.
이상하다.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붕괴한 것들이 다시 재생되지 않았다.
하지만 탑은 자동적으로 수복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이곳엔 투신 카라스가 온전한 신격을 되찾고 주인으로 있지 않은가.
탑을 관리하는 관리자도 있을진대, 어떻게 탑을 무너트린단 말인가!
신격이 있는 탑은 무너트릴 수 없다.
설령 신격을 죽여도 ‘시련’의 일부로서 자체 작동하는 게 탑이었다.
그런 탑을 무너트린다고?
‘탑 전체가 무너지는 게 아니다.’
산샤는 문제점을 정확히 포착했다.
탑이 아니다.
이 층이, 정확히 17층의 ‘시련’이 붕괴하고 있다.
“무슨 짓을······!”
산샤는 이 현상을 일으킨 게 다름 아닌 자신을 마주한 ‘남자’라고 확신했다.
16층에서도 알 수 없는 ‘즉사의 공포’를 일으키더니, 이번에도 제대로 시련을 마주하지 않고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모든 도전자 중 유일하게 속을 알 수 없는 놈.
시련을 내줬더니 층 전체를 박살 내 버릴 줄이야!
“어, 어어!”
“무, 무너진다!”
“갑자기 이게 뭔······!”
쿠르르릉!
무너진다.
꺼지고, 떨어진다.
어이가 없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와중.
‘녀석’이 미소 짓는 걸 바라보며, 산샤는 말했다.
“··· 합격이다.”
이제는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도리어.
······ 도저히 무슨 짓을 할지 예상을 할 수가 없어서, 다음엔 어떤 기현상을 보여줄지 기대마저 될 지경이었다.
*
‘됐다.’
떨어지는 산샤를 바라보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움직이게 만들거나, 원 밖으로 나오게 하는 산샤의 시련.
즉, 원 자체를 사라지게 만들면 그만이다.
히든 등급 탈리스만 ‘천재지변’은 주변의 모든 영역을 ‘절대붕괴’시킨다.
설령 그것이 시련으로 고정된 던전이나 탑이라 할지라도.
‘황금률 상점을 싹 쓸어서 히든 탈리스만 큐브로 조합했지.’
저 조합을 만든 건 우연이었다.
무한 새로고침과 함께 황금률 상점에서 쓸만한 탈리스만을 싹쓸이하고, 큐브에 넣던 도중 갑자기 큐브가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혹시 몰라 조합한 게 히든 등급으로 완성됐다.
【천재지변 탈리스만(히든)】
-태고의 갑옷에 장착되어 능력이 1.5배 증폭된 상태
-불가피한 현상
-절대적인 영역 붕괴
-붕괴의 범위는 마력에 비례
-재충전 시간 15일
옵션은 이게 전부다.
하지만 이만한 설명이면 충분했다.
절대 영역을 부수는 힘.
설령 그게 성역일지라도, 권능에 의해 펼쳐진 영역일지라도, 던전이나 탑이라 할지라도 파괴하고 부숴버린다.
농담이 아니라 이건 진짜 엄청난 것이다.
신비 파괴와 비슷한 능력이다.
하지만 비슷하면서도 약간은 달랐다.
‘성도의 결계를 파괴하면 란돌프를 막아서는 모든 게 상쇄되겠지.’
성도 아드리움에 걸린 여신의 결계.
신비 파괴로도 그 결계를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천재지변’ 탈리스만이 있으면 인간이 아닌 자를 잡아내는 그 무적의 결계조차 파괴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파괴되는 순간 눈치채긴 하겠지만,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어떠한 영역에 펼쳐진 결계도 다 부숴버릴 수 있는 능력.
잘만 이용하면 결계로 숨겨진 보물 던전 따위를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닐 터.
뿐만인가.
‘··· 엄청나군.’
그 위력을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나조차도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17층 전체가 무너지고 있다.
만약 적진에서 사용하면 그 순간 적들은 궤멸을 면치 못하리라.
이 정도면 웬만한 전술핵 못지않다.
······ 문제는 나도 같이 빨려들어간다는 건데.
‘어디까지 빨려들어가는 거지?’
이건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17층에서 떨어지면 16층 아닌가?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떨어지고 있다.
합격했으니 자동으로 18층에 이동될 줄 알았건만.
휘잉!
휘이이잉!
그런 내 생각에 반응하듯 곳곳에 워프가 나타났다.
“워프다!”
“살았어!”
떨어지던 이들이 하나, 둘 워프로 들어가며 강제 이동 처리 되었다.
무너지던 균열도 천천히 채워지는 중이었다.
탑이 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시련에 합격한 이들이 18층으로 이동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주변의 모든 이가 워프로 이동됐다.
이제 내 차례인가 싶었건만.
······ 아무리 기다려도, 워프가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계속해서 떨어지고만 있었다.
밑으로.
끝없이 밑으로.
*
까악?
까악!
꺼지는 17층을 바라보며 까마귀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재의 일족들.
투신 카라스를 신으로 모시는 까마귀들!
흉의 일족과 달리, 재의 일족은 탑을 관리하는 권한과 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재앙과 죽음, 그리고 시련을 관장하는 까마귀들.
까악!
까아악!!
하여 재의 일족은 이내 안절부절못했다.
어떡하지?
투신 카라스는 자리를 비웠다.
의아함을 느끼고 30층으로 향한 카라스는 한참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17층이 무너지게 놔뒀다간 탑 전체에 영향이 갈 것이다.
“까악! 까악!”
그때였다.
뒤뚱! 뒤뚱!
뒤룩뒤룩 살이 찐, 인간의 아이만 한 커다란 까마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까악!
까악!
까아아아악!
재의 일족들은 그 까마귀를 보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왔구나!
흉의 일족.
바로 이 탑을 관리하는 관리자였으니!
아마도 챔피언인 란돌프가 소환될 때 흉의 일족도 같이 소환된 모양이었다.
“까악!”
내게 맡겨라!
흉의 일족 까마귀가 날개로 가슴을 쳤다.
이어 자신감 있게 무너지는 17층을 수복시켰다.
슈웅!
슈아아앙!
균열을 메꾸고, 천장을 복원한다.
빠르게 17층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짝짝짝!
재의 일족들이 손뼉을 쳤다.
역시 흉의 일족.
탑의 관리는 흉의 일족이 최고다.
까악?
그때 한 재의 일족 까마귀가 의문을 던졌다.
떨어진 탑의 도전자 중에 한 명이 없는데?
“까악?”
흉의 일족은 눈을 깜빡거렸다.
수복하며 분명히 도전자들도 원상복구 시켰다.
그런데 한 명이 없다고?
까악!
까악!
까아아악!
그 순간 재의 일족 까마귀들이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큰일 났다!
진짜 큰일이야!
층의 ‘틈’ 사이로 들어갔나 봐!
순간 흉의 일족 까마귀가 돌처럼 굳어버렸다.
층의 ‘틈’ 사이.
심연도, 지상도, 천상조차도 아닌 완전히 다른 세계가 바로 그곳이었으니까.
허나 층의 ‘틈’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는 오직 ‘흉왕’만이 알고 있었다.
-‘층의 틈’은 오직 우리 흉의 일족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관리자는 절대로 ‘층의 틈’을 들여다봐선 안 된다.
-당연히 들어가서도 안 되고, 누군가를 들여서도 안 된다.
-이는 흉의 일족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대 규율이다!
-세계가 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안 돼!
탑의 관리자가 지켜야 할 절대 규율.
역대 모든 흉왕들이 신신당부한 약속!
만약 도전자 중 한 명이 그 ‘틈’으로 들어간 것이라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관리자의 규율을 자신이 깬 것이다.
···큰일 났다.
일생일대의 위기.
“까, 까악······?”
어, 어떡하지?
흉의 일족 까마귀가 사색이 된 채 몸을 벌벌 떨었다.
*
얼마나 떨어진 걸까.
하루? 이틀?
······ 모르겠다.
확실한 건 시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17층에서 16층으로 떨어지는 것치곤 너무나도 긴 시간 나는 추락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시간의 개념마저 모호해질 때 즈음.
화아악!
갑자기 빛이 번져갔다.
영역 전체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나도 강렬한 빛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여긴 또 어디야?’
세상은 모든 게 바뀌어 있었고.
-고오오오오.
눈앞엔, 하늘 끝에 닿을 듯이 거대한 두 마리의 까마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