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신도
아드리움의 현.
그가 17층으로 이동한 직후.
“··· 신검합일이라며? 검은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합격이라고?”
모두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합격이라니?
“······.”
하지만 산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의 궁금증을 해결해줘야하는 의무도 없거니와, 산샤 또한 이러한 상황을 상정하지 못한 탓이다.
신검합일이 발동되고, 검을 겨눈 순간.
산샤는 알았다.
‘휘두르면 죽는다.’
이 검이 휘둘러짐과 동시에 자신도 죽으리라는 걸.
신검합일은 상대를 ‘반드시’ 타격하는 기술이다.
거기에 무조건 ‘치명상’을 입힌다.
검이 맞지 않아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게 가능한 고유기술.
한 마디로 신검합일은 강화된 의념을 실체화하는 것이다.
검을 뻗어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힌다는 생각 그 자체가 검기로 발현되게끔 만드는 일종의 ‘심검(心劍)’인 셈이었다.
그런데······ 심검합일을 펼치자, 산샤의 사고는 순간 정지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오로지 한 가지뿐이었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그에게 검을 뻗어 치명상을 입히면, 그 타격은 배가 되어 돌아와 자신을 즉사시킬 것이다.
‘물리적인 피해를 배로 반사하는 능력······ 그런게 이 세상에 존재한단 말인가?’
반사의 개념을 가진 기술이나 장비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결단코 ‘입은 피해’ 이상의 반사를 시킬 수는 없다.
애초에 반사라고 이름 붙였지만 ‘공유’에 가까운 것이다.
기껏해야 고통을 공유하고, 피해를 공유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달랐다.
하여, 산샤는 움직일 수 없었다.
공격은커녕 합격을 말하며 검을 회수한 이유다.
······ 그리고 어쩌면 이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건 빌헬름과 란돌프를 상대했을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다······.’
산샤는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두 손이, 흐느끼듯 잘게 떨리고 있다.
본능적으로 더없이 강렬한 죽음의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빌헬름과 란돌프를 상대할 때도 경외감은 느꼈으나 이런 ‘즉사의 공포’를 느껴본 적은 없건만.
산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이게 살아있다는 감각인가.’
··· 미소를 지으며, 산샤는 흥분했다.
살아있다.
질투의 악마에게 지배받았을 때와는 다르다.
그때는 살아도 죽어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역시 ‘탑의 시련’으로 되살아난 게 정답인 모양이다.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재밌는 놈을 만나게 될 줄이야.
‘나는 더 강해질 수 있다.’
비로소 확신했다.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는 건 자신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란돌프에게 도전하리라.
도전해서 승리하리라!
고로, 아직 끝이 아니다.
진정한 시련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
파멸의 왕.
앞선 히든 클래스의 전승들이 합쳐지고 격상하며 만들어진 완전히 새로운 이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고의 검성 클래스를 얻을 때와 비슷하군.’
심연미궁에서 모든 시련을 얻어낸 결과 나는 히든 클래스 ‘지고의 검성’을 거머쥘 수 있었다.
육각의 용사 라일리와, 지고룡의 시련 모두를 이겨내면서 말이다.
계속해서 클래스의 격상을 이뤄내며 마침내 완성한 히든 클래스였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시작점이지.’
당시엔 일반 클래스를 끊임없이 격상시켜 겨우 히든 클래스로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히든 클래스부터 시작한다.
게다가 그 이상의 진화마저 가능하다.
만약 천마나 다른 클래스를 그냥 계승했다면 땅을 치고 후회했으리라.
‘어차피 올라야한다면.’
나는 시선을 위로 올렸다.
탑의 끝.
한 번 오르기 시작한 이상, 멈출 수 없다.
《‘란돌프’의 존재가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박현명’의 존재감이 흐릿해집니다.》
······ 비록 탑을 오를수록 몸이 더 움직이지 않게 되더라도.
육신 전체가 마비되는 한이 있더라도.
‘끝을 본다.’
항상 그래왔으니까.
중간에 멈출 것이라면 시작도 안했을 테니까.
물론 당장이라도 얻고 싶다.
탐나지 않는다면 거짓일 것이다.
파멸의 왕.
이름부터 전율스럽지 않은가.
클래스의 이름은 곧 증명이다.
그리고 그 증명의 이름은 일반적이지 않을수록 격이 높은 법이었다.
별의 계승자, 지고의 검성처럼.
그러할진대 ‘파멸의 왕’이라.
클래스에 ‘파멸’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부터가 심상치 않다.
그런 단어가 붙어있는 클래스는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결코 이게 ‘끝’은 아닐 터.
‘파멸의 왕은 시작일 뿐이지.’
진화할 수 있다는 걸 안 이상,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시작부터 이 정도의 이름이라면, 과연 끝에 도달했을 때 어떤 이름이 튀어나올지 심장이 아플 정도로 기대됐다.
휘이이잉!
그때였다.
바로 옆에서 워프가 열리며 한 남자가 나타났다.
유심히 지켜보자, 워프에서 튀어나온 인물이 왜인지 낯이 익었다.
“아아, 여신이시여!”
······ 광신도 아론.
대체 어떻게 통과한 거지?
그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힘줄이란 힘줄은 죄다 잘리고, 몸은 움직이지 못할 만큼 쇄약해져 있다.
말 그대로 죽기 직전의 상태.
그래서일까.
아론은 워프를 넘어오자마자 기절했다.
‘자기희생 기도문을 외웠군.’
기절한 아론을 보며 생각했다.
산샤의 기술을 막거나 피하는 방법.
그중 하나는 스스로를 약화시켜 산샤도 똑같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아론은 죽음을 각오하고 자기희생주문을 외웠다.
그 결과, 산샤의 시련을 통과할 수 있었다.
······ 말이 쉽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휘잉!
휘이이잉!
이후로도 하나, 둘 합격자가 워프를 타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 속도가 점차 가속화되더니 순식간에 100명을 채웠다.
“투신의 탑 17층에 온걸 환영한다.”
101번째 등장자는 산샤였다.
스으윽!
곧이어 산샤의 주변으로 붉은 원이 그려졌다.
“17층은 16층과 반대다. 도전자의 기술을 내가 막는다. 그래서 내가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거나, 이 원을 벗어나게 하면 합격이다.”
방어가 아닌 공격.
대처할 필요가 없으니 훨씬 쉽다.
그때 한 남자가 물었다.
“오로지 막기만 하는 건가?”
“그렇다. 나는 막기만 한다.”
“···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혹시 모를 확인도 끝났다.
방어일변도라.
도리어 16층보다 쉬운 시련이다.
“실패하면 어떻게 되지? 바로 탈락인가?”
“즉시 탈락은 아니다.”
“즉시 탈락이 아니라면?”
“한 시간.”
“······?”
“한 시간 내로 합격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나는 이 원을 스스로 벗어날 것이다.”
“그 말은······ 스스로 벗어나, 우리와 싸우겠다는 거냐?”
“아아. 너희 전원과 나. 둘 중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운다. 이해가 됐나?”
“만약 한 명이라도 합격하면······.”
“전원 통과.”
전부 통과하거나,
혹은 전부 죽거나.
17층의 시련은 둘중 하나로만 귀결된다.
예외는 없다.
하지만, 진정으로 미친 자신감이었다.
오만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다.
한 시간 내로 계속해서 도전하면 산샤도 지칠 터.
한 발자국 정도는 쉬이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방법은 상관 없겠지?”
“당연한 소리를 묻는군. 이곳은 투기장이다. 승리를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
모든 방법이 허용된다.
그저, 한 발자국만 움직이게 하라.
그러나 근본없는 만용은 아니었다.
‘산샤는 16층에서 이미 우리의 능력을 모두 봤다.’
진정한 고수는 한 합만 겨루어도 상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산샤는 16층에서 이미 이곳에 있는 전원과 마주했다.
능력을 보고, 겪으며, 결론을 내린 것이다.
자신이 패배할 리 없다고.
60분동안 계속되는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을 자신이 있노라고!
“······ 그럼 내가 먼저하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태양의 기사 한체스가 나섰다.
초월자임과 동시에 강력한 대회 우승후보였던 자.
이곳에 모인 도전자 중에 능히 세 손가락안에 들어가는 강자다.
화르륵!
그의 검이 뜨겁게 타올랐다.
“그 자신감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보마.”
한체스가 검을 뻗었다.
동시에.
그오오오-!
산샤의 머리 위로 작은 태양이 떠올랐다.
그 작은 태양에서 쏟아진 빛이 한점으로 모이더니 이내 산샤를 태우고, 녹일 정도로 강력한 열을 발산했다.
“내 태양이 태우지 못하는 것은 없다. 움직이지 않으면 흔적도 남지 않고 소멸할 것이다.”
“음, 뜨겁긴 하군.”
“······?”
하지만 이어진 산샤의 반응에 한체스는 이맛살을 구겼다.
그는 마치 일광욕이라도 하듯 눈을 감고 태양의 빛과 열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멀쩡하진 않다.
치이익!
조금씩 타들어가고는 있다.
문제는 정말로 ‘조금씩’ 타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대로 산샤를 모조리 태우려면 족히 하루는 더 걸릴 것 같았다.
“······ 내 검에 깃들어라, 피닉스.”
까아악!
작은 태양의 모양이 불의 새, 피닉스로 모습을 바꿨다.
이어 피닉스가 한체스의 검에 흡수되듯 빨려들어가자.
화아아아아악!
검에서 솟아난 불길과 함께 엄청난 열기가 17층을 가득 채웠다.
“뜨, 뜨거워!”
“아악! 타, 탄다······!”
사람들이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체스가 산샤를 향해 내달렸다.
촤앙!
산샤는 검을 들어 피닉스가 깃든 한체스의 일격을 가볍게 막았다.
챙! 챙! 채엥!
끊임없이 달라붙었지만 산샤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모든 움직임이 읽히고 있는 것만 같다.
“···!”
한체스가 이를 악물었다.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태양의 기사라 불리며 수많은 기사의 귀감이 되었던 그다.
그런 그가 한 발자국도 못 물릴 줄이야.
이만한 실력 차이라니.
“언제까지 싸울 거야?”
“벌써 30분이나 지났다고!”
30분이 훨씬 지난 시점.
‘빌어먹을······!’
한체스는 절망하고 있었다.
30분이 넘어가도록 검을 휘둘렀지만 산샤는 원 안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툭!
결국 한체스는 검을 놓았다.
“허억! 허억!”
전신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어느새 웅덩이를 이룰 정도였다.
‘이길 수······ 없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산샤.
놈은 지치지 않는 괴물이다.
아무리 실력차가 압도적이라지만, 땀 한 방을 흘리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젠장할! 다음은 나다!”
마음이 급해진 도전자들이 빠르게 나섰다.
하지만 달라질 건 없었다.
원거리에서 폭발하는 물약을 던지거나, 독을 풀기도 해봤지만 산샤는 멀쩡했다.
진정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라지 않았음에도 통하지 않는다.
“대체 뭐냐고······!”
“놈은 무적인가?”
그렇게 시간은 어느덧 50분을 지났다.
남은 시간이 채 10분도 남지 않은 상황.
그러자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쏠렸다.
‘다리가 안 움직인다.’
하지만 나도 나서고 싶지 않아서 나서지 않은 게 아니다.
운명의 역설.
층을 오를수록 내 몸도 정상과는 멀어졌다.
고작 17층임에도 불구하고 왼쪽 팔과 양쪽 다리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으음······.”
그 찰나.
기절한 아론이 정신을 차렸다.
나는 즉시 아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론.”
“여기가··· 아! 여신의 의지를 전하는 분이시여. 저를 부르셨습니까?”
아론은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내 부름에 온힘을 다해 반응했다.
··· 다행이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내가 움직일 방법이 딱 한 가지 있기는 있었다.
“나를 ‘추앙’하거라.”
“예······?”
“추앙의 기도문을 외워라.”
그건 바로 추앙의 기도문.
그러나 여신이 아닌 자에게 추앙의 기도문을 외우는 건, 여신교의 금기다.
그래서 문제였다.
아무리 나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고는 해도 여신교의 신자라면 당연히 망설일 수밖에 없는······.
“기꺼이!!!”
······ 정말 단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아론이 추앙의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휘아앙!
빛이 나를 감싼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빛이.
아론은 남은 생명력과 신성력 한 톨까지 모조리 뽑아다가 쓰고 있었다.
자기희생 주문.
무려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한 추앙의 기도문!
‘움직인다.’
그러자 몸이 조금씩, 움직였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도전하겠나?”
산샤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16층에선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나, 17층은 서로 입장이 바뀌었다.
과연 여기서도 자신을 당황케 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다.
설욕을 갚아주겠다는 강한 의지마저 느껴졌다.
“도전하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미소 지었다.
··· 탑의 정상으로 향할 수 있는 길이, 지금 막 보였으니까.
이 시련의 필승법 역시도 말이다.
【히든 등급 탈리스만 ‘천재지변’의 능력이 발현됩니다!】
쿠르르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