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악마
예전에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앤드류 사제의 죄를 사했을 때.’
와이저 후작가.
세렝게티를 만나고자 허드슨과 함께 그곳을 방문했을 당시에.
워프가 고장 난 뒤 차원균열이 벌어지며 살갗 혼종들이 습격하자, 앤드류 사제는 도시의 일반시민들을 지키고자 금기를 어겼다.
추앙의 기도문은 오직 여신을 찬양할 때만 사용할 수 있는 것.
그것을 나에게, 란돌프에게 사용한 탓이다.
이후 모든 신성력을 잃고 한꺼번에 늙어버린 앤드류 사제의 죄를 나는 용서했다.
면죄부를 사용하여 그의 신앙을 다시 살리고자 했다.
‘그때 분명히 여신의 존재, 의지를 느꼈지.’
허나 쌍둥이 여신은 죽었다.
레아는 멸망과 함께, 그리고 피나는 나를 구하고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여신의 육체는 사라졌으나 그 의지만은 남은 것인지.
결국, 앤드류 사제의 신성력은 더욱 강해졌고, 그 역시 구원받지 않았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여신교의 성기사들이 사용하는 축복, 성역의 발동 따위는 내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치 여신과 함께 있는 기분이 든다.
지금 이 몸은 란돌프가 아닌 나 자신, 박현명임에도.
‘여신의 가호는 아직 세계에 남아있다.’
그녀들이 남겨놓은 의지는 계속되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여신교가 존속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니까.
다만, 의아했다.
그들은 과연 ‘여신의 죽음’을 알고 있을까?
물론, 여신과 직접 소통한다는 교황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혼란을 방지하고자 함구하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여신의 죽음으로 인해 여신교는 확실하게 정체되어있다.
‘교황이 함구한다고 한들, 다른 이들도 의문은 느끼고 있겠지. 여신의 선택을 받은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고 있을 테니.’
성녀, 성자, 혹은 최고위계의 성직자들이.
더는 나타나지 않고 있으리라.
요한슨 추기경이 제 아들을 제국에 밀어 넣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았다.
‘여신교는 활로(活路)를 찾고 있다······.’
여신교는 최근 발로그 교단과의 전쟁에서도 패배했다.
총력전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패배를 모르던 여신교로선 꽤나 충격적이었을 터.
내 생각에, 아론은 반발이 극에 달한 제국과의 사이를 완화하기 위한 장치다.
일종의 선물 말이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아론은 애초에 사지로 몰아넣어졌다.’
함께한 성기사들의 무력이 강하다고 하나, 사신교나 팔가 기사단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
아론 자체의 레벨도 높지 않다.
우승을 위해 보냈다고 하기엔 너무 빈약한 것이다.
‘요한슨 추기경의 아들, 아론은 미끼다.’
처음부터 아론은 여신교가 제국에 보이는 ‘성의’로 결정됐으리라.
도리어 제국이 아론을 죽이면 그걸 빌미 삼아 협상을 하려던 게 아닐는지.
발로그 교단과 전쟁 중인 지금 제국마저 칼을 빼 들면 위험할 테니까.
선물이라 했으나 사실 미끼와 다를 게 없다.
제발 물고기가 물어주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던져놓은 떡밥.
아론의 딴에는 여신교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사명감에 참가한 것이겠지만······ 두 여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 보자면 아론은 딱 전형적인 ‘희생양’이었다.
아마도 아론은 요한슨 추기경의 아픈 손가락이었을 테다.
행동거지만 보아도 여신교에는 어울리지 않는 그릇이었다.
하물며 추기경의 아들이라 하기엔 기품이 부족하다.
‘아론은 여신교와 요한슨 추기경의 이름을 드높이고자 참가했으나, 정작 여신교와 요한슨 추기경은 아론이 죽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보낸 것이다······ 참 기구하군.’
어쩌면 내 예상이 틀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높은 확률로 맞으리라 보았다.
그게 아니거든 라이가의 공약이 있다고 해도, 도저히 여신교가 공식적으로 아론을 보낸 저의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이려고 했다.
제국의 손에 죽는 것보단, 내 손에 죽는 게 덜 억울할 테니까.
“너의 죄를 사하마, 아론.”
그러나 생각을 바꾸었다.
놈을 살려주기로.
개과천선의 여지가 아주 약간이나마 존재한다면 기회를 다시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했으니까.
지금은 그보다.
‘대략 200명. 나쁘지 않군.’
눈앞의 적들을 쓸어버리는 게 더 중요했다.
11층에서 15층까지.
동등한 투쟁을 표하는 이 탑의 시련은, 일종의 ‘걸러내기’다.
동등한 상태에서 최대한 많은 ‘우승후보’를 제거하는 게 목적이다.
이미 기권은 할 수 없다.
능력치를 분배한 순간부터 기권마저 불가능하게 해놨다.
이러한 ‘함정’의 요소를 준비해뒀다는 건······.
‘투신 카라스. 이게 진정 너의 의지더냐?’
모조리 죽고, 죽이며, 단 한 명의 최강자가 탄생하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마치 고독처럼.
소노라와 이자벨라가 겪었던, 그 공간의 아이들과 같은 희생을 목적하고 있다.
······ 아무래도 투신 카라스는 무언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왜인지 다급해 보인다.
위로 올라가, 그 이유를 알아봐야겠다.
《‘천마강림’이 발동됩니다.》
《지속시간 42초》
《모든 스킬의 마력소모가 50% 감소합니다.》
《‘강림지역’의 3성 이하 스킬을 봉인합니다.》
《‘강림지역’의 모든 ‘적’은 1초에 마력 1포인트가 낮아지는 강력한 디버프 효과를 받습니다.》
《마력이 100 이상 차이 나는 적들은 ‘전투불가’ 상태에 빠집니다.》
《이 효과는 절대적입니다.》
화르르르륵!
순간.
검은 불꽃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등 뒤로 피어났다.
천장을 덮을 듯이 거대하기 짝이 없는 날개가.
이것이 악신의 형상이다.
먼 옛날, 악신이 봉인되기 전에 갖추었던 진정한 ‘천마’의 형태였다.
동시에.
“아······!”
“저, 저게 무슨······!”
쎄에에에엑!
등 뒤로 떠오르는 검은색의 ‘환’ 하나.
세계의 모든 불길함을 떠안은 그 힘 앞에 모두가 전율했다.
움직일 수 없다.
감히, 거역할 수 없다.
-천마재림(天魔再臨)
-만마앙복(萬魔仰伏)
천마가 재림하면 모든 마도가 복종한다.
설령 그것이 불신자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만에 하나, 복종하지 않는 자는.
구오오오오-!
죽음을 맞이한다.
*
“시, 신성력이 통합니다!”
“아론 님! 몸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떨어졌던 팔과 다리가······!”
성기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여태껏 잘린 아론의 사지는 신성력을 퍼부어도 붙지 않았다.
하지만 돌연 듯 신성력이 통하며 붙더니, 재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적입니다!”
“아아!”
성기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마침내 돌아왔으니.
하지만 아론의 귀에 그들의 외침은 들려오지 않았다.
-너의 죄를 사하마, 아론.
모든 게 그 순간부터 시작된 기적임을 아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죄를 사한 그 순간부터.
멈춰있던 성력이 피를 타고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썩어가던 신체에서, 딱지 진 상처에서 새 살이 돋으며 복원된다.
여신의 축복과 가호가 자신을 구원하고 있었다.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다.
‘면죄부······.’
진실로 면죄부가 적용됐다.
여신교에서도 극소수만 사용 가능한.
그조차도 3번밖에 사용할 수 없는 면죄부가 자신에게 발행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자는 독실한 신자가 아니다.
사제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저분은 여신의 사랑, 그 너머에 있는 분이시다.’
그래서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두루뭉술한 표현이 아니라 저자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저자는 여신의 의지를 전하는 자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 저분은 여신의 의지 그 자체이신 분이다.”
구오오오오-!
검은 태양처럼 떠오른 환 하나가 지상을 쓸어버린다.
그 앞에선 이들은 모두 소멸을 맞이했다.
“저, 저게··· 저 모습이 정말 여신의 의지라는 말씀입니까?”
“허나, 여신은 자애와 풍요의 상징입니다. 도저히 저건······.”
“파괴, 파멸······ 멸망이 더 어울리지 않습니까?”
물론 불길하기 짝이 없는 힘을 사용하는 자가 어찌하여 ‘여신의 의지’ 그 자체일 수 있겠느냐며 반박할 수도 있다.
자애와 풍요라는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론은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은 보이지 않는 게냐?”
아론의 시선이 그의 머리 위로 향했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론은 미소 지었다.
“웃어라. 두 여신께서 미소 짓고 계신다.”
요한슨 추기경의 아들, 아론.
그는 광신도가 되었다.
*
《탑의 15층에 입장한 것을 환영합니다.》
《현재 15층에 도착한 도전자는 560명입니다.》
《60명이 탈락하면 16층으로 향하는 길이 열립니다.》
《준비하십시오. ‘동등한 투쟁’이 30분 뒤에 시작됩니다.》
투신의 탑, 15층.
이곳에선 이전과 전혀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
“······.”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하지도, 그렇다고 뭉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누구를 탈락시킬지, 어떻게 살아남을지.
그러한 것들을 집어넣기엔 머리가 터질 듯이 과부하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모두가 14층에서 보았던 장면만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순식간에 이백에 달하는 인원을 증발시킨 압도적인 무위를.
‘평등한 투쟁이라더니?’
‘대체 어디가 평등하다는 거냐.’
‘저놈은 뭐지? 정말 인간이 맞는 건가?’
그제야 사람들은 이 투쟁의 불공정함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공평하지 않았다.
그들 나름대로 우위를 가져가고자 노력했으나, 전부 쓸데없는 짓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드리움의 현.
그는 다르다.
자신들과, 어쩌면 이 세계의 모두와도 궤가 다른 인물이었다.
징조는 있었다.
처음 생사경의 책을 보자마자 습득했을 때부터.
보이지 않는 글자를 보고, 익힐 수 없는 기술을 익혀 라이가의 총애를 받지 않았던가.
같은 것을 보아도 전혀 다른 것을 느끼는 천재.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도 모두 ‘천재’라 추앙받던 이들이다.
그렇다면 아드리움의 현은 천재 중의 천재라는 말일까?
‘괴물.’
괴물이다.
천재라는 말조차도 부족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재해의 괴수.
‘······ 이길 수 없다.’
‘인간이 맞설 수 없기에 재해다.’
‘저놈은 재해 그 자체다.’
모두가 전의를 상실했다.
《‘동등한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시작을 알렸으나, 누구도 투쟁하지 않는다.
그저 최대한 멀리 ‘놈’에게서 떨어질 따름.
단 한 명을 제외하곤 말이다.
“미천한 종이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
그건 바로 광신도가 된 아론이었다.
11층에서 마주했을 때와는 백팔십도 다른 태도.
경건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재해를 따르고 있었다.
사지는 멀쩡히 돌아왔으며 이전보다 더욱 선명한 선력을 보유한 채로.
‘······ 부담스럽군.’
바짝 엎드려 고개만 슬며시 드는 아론.
두 눈의 반짝임이 심히 부담스러웠다.
정말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의 태세전환이었다.
하지만, 나쁘진 않았다.
어차피 지금 나는 전투불능 상태였으니.
《‘천마강림’의 지속시간이 끝나 하루 동안 ‘전투불능’ 상태에 빠집니다.》
《‘천마신공-생사록’이 발동해 마력을 흡수합니다.》
《마력이 10 올랐습니다.》
《‘진 초월지검’이 피를 머금고 한 단계 강화됩니다.》
《‘극진 초월지검’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위대한 전승’에 의해 히든클래스 ‘디스트로이어’가 연성되었습니다.》
《‘디스트로이어’ 히든클래스를 계승하시겠습니까?》
계속해서 떠오르는 창들.
나는 벽에 기대어 앉은 채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이곳에서도 끊임없이 성장 중이다.
허나 부족하다.
탑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선.
“죽여!”
“물러서지 마라!”
뒤늦게나마 곳곳에서 조금씩 들려오는 전투 소리.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15층의 시련이 종결되었습니다.》
《남은 500명의 도전자가 16층으로 이동됩니다.》
《능력치가 복구되었습니다.》
《16층, ‘고대의 악마 산샤’와의 투쟁이 시작됩니다.》
《도전하고, 승리하십시오!》
······.
······.
《‘란돌프’의 존재를 느낍니다.》
《‘박현명’의 존재감이 희미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