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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269화 (269/317)

전투개시

선전포고. 

바닥을 기어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지 않으면 시작과 동시에 나를 죽이겠다는 말이다. 

같은 아드리움 출신이라서 그런 걸까. 

꽤 선심 쓰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바다와 같이 넓은 아량을 보인 아론을 위해 눈물이라도 뚝뚝 흘려야할 것만 같은 상황. 

“아직 죽음이 와닿지 않나 보군. 아니면 설마 가만히 있어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하하!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겠지요, 아론 님.” 

“샌님처럼 보이는데 제대로 된 전투나 할 수 있겠습니까?” 

“시작도 전에 바지에 오줌부터 지릴걸요?” 

아론과 그 뒤의 성기사들이 나를 바라보곤 비웃으며 떠들어댔다. 

확실히 고립된 나는 누가봐도 좋은 먹잇감이었다. 

확정된 죽음. 

최초로 죽은 남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은 자. 

······ 나를 제외한 999명의 참가자들 전원이 같은 생각이리라. 

그 죽음에서부터 나를 구원해주겠다니! 

“나도 예언하나 하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러자 아론이 흥미로운 듯 내게 시선을 던졌다. 

“예언? 꼴에 예언자라도 된다는 거냐?” 

“이곳 11층에서 왼쪽 팔 하나가 잘릴 거다.” 

“······?” 

“12층에선 오른쪽 팔 하나가 잘릴 거고, 13층에서는 왼쪽 다리가, 14층에서는 오른쪽 다리가 하나씩 잘려나갈 거다. 그리고 15층에선······ 그건 가서 생각해 보도록 하지.” 

“지금 이 미친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스릉. 

스르릉! 

성기사들이 검을 뽑아 겨눴다. 

다행이다. 아주 바보는 아닌 것 같다. 

내 의도를 정확히 이해한 모양이다. 

투신의 탑 11층에서 15층까진 같은 규칙으로 진행된다. 

계속해서 10%씩 인원이 줄어들 것이고, 15층에 도달하면 절반 조금 넘는 인원만이 남아있을 터. 

과연 저 든든한 성기사들이 아론을 15층까지 지켜줄 수 있을지는 두고볼 일이었다. 

‘정신을 놔버린 건가?’ 

여유 넘치던 아론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그냥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층고를 올라갈 때마다 사지를 하나씩 분해하겠다는데 그걸 얌전히 듣고만 있을 사람은 없으리라. 

하물며 그 말을 꺼낸 대상자가 누구나 인정하는 최약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겁을 상실할 걸까? 

아니면 겁을 너무 먹어서 미쳐버렸나? 

“오냐. 네놈이 말한 그대로 죽여주마.” 

하지만 이내 아론은 여유를 되찾고 피식 웃었다. 

궁지에 물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더니, 딱 그 꼴이었으니까. 

생사경의 해석본은 아깝지만 어차피 놈만 죽으면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결국 투신의 탑을 끝까지 오르는 자가 대회의 우승을 거머쥐리라. 

《‘동등한 투쟁’의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1분입니다.》 

똑, 딱, 똑, 딱.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네 목숨이 60초 남았다는군.” 

아론은 어깨를 으쓱하곤 등을 돌렸다. 

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기사들과 함께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 

번뜩이는 눈들. 

살기 가득한 30여명의 성기사들이 시작과 동시에 달려들 건 자명한 일. 

‘마지막 점검이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곤 미소를 지었다. 

······ 만들었으니까. 

‘깨지지 않는 신념!’ 

유일등급이자 빌헬름의 장비였던 그것을. 

무한한 새로고침 끝에, 모든 재료를 모아서 만들어냈다. 

【깨지지 않는 신념(유일등급)】 

-명예롭고 올곧은 신념을 지닌 자만이 착용할 수 있는 신발 

-착용제한 : 명예 10,000 

-이동 시 패시브(Passive) 스킬 ‘신념의 발걸음(13Lv)’ 적용 

-‘정지 상태’일 시 ‘디바인 쉴드(13Lv)’를 생성 

-명예 수치에 따라 민첩 능력치 증가(2,000당 1) 

-현재 명예 : 45,480 

-증가된 민첩 : 22 

휘유. 

절로 휘파람이 나온다. 

설명 자체는 심플하기 그지없지만, 굳이 더 설명이 필요 없는 경이로운 옵션들. 

란돌프와 공유되는 건 ‘명예’ 역시 마찬가지였다. 

명예는 영혼의 격과도 같은 것. 

‘새삼 다시 봐도 대단하군.’ 

오로지 명예로운 자만이 압도적인 능력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란돌프와 공유하는 명예의 수치는 이미 숱한 시련을 넘고, 넘고, 또 넘어서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리하여 증가된 민첩 능력치만 무려 22! 

하지만 ‘깨지지 않는 신념’의 가장 중요한 옵션은 바로 ‘신념의 발걸음’과 ‘디바인 쉴드’다. 

‘이동과 정지. 컨트롤 여부에 따라 엄청난 시너지를 내지.’ 

‘깨지지 않는 신념’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선 그야말로 초미세 컨트롤이 필요하다. 

디바인 쉴드가 작동하는 건 정지한 순간, 찰나와 같은 시간이었으므로.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움직이는 혜안이 필수였다. 

신념의 발걸음은 어떤가. 

‘이동속도 130%증가.’ 

웬만한 ‘이동속도 증가’ 버프는 가볍게 씹어버릴 패시브 스킬이다. 

바람처럼 내달리며 적을 박살내는 게 가능하다. 

공방의 일체. 

달려드는 적들을 막아서고 박살내는 일이야 이 신발 하나로도 충분한 일이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지.’ 

황금률 상점에서 구한 건 ‘깨지지 않는 신념’의 재료만이 아니다. 

【초월지검(신화등급)】 

【루-마리아(신화등급)】 

【백룡의 탈리스만(신화등급) 2Set】 

【마룡의 탈리스만(신화등급) 2Set】 

【천재지변 탈리스만(히든조합)】 

성장형 검인 ‘초월지검’과 조합형 검인 ‘루-마리아’를 완성했다. 

게다가 태고의 갑옷에 착용한 여섯 개의 탈리스만. 

그중 하나는 ‘히든 탈리스만 큐브’로 조합해낸 히든 조합의 탈리스만이다. 

이로써, 모든 준비가 끝났다. 

‘상태창.’ 

나는 눈앞에 놓인 상태창의 능력치를 확인했다. 

《능력치》 

클래스 : 없음 

힘 : 150(100+50) 

민첩 : 142(100+42) 

체력 : 30(10+20) 

지능 : 80(40+40) 

마력 : 140(100+40) 

남은 잔여 포인트 : 0 

능력치 총합 542. 

이만하면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걸 했다고 자부한다. 

그 순간. 

《‘동등한 투쟁’의 시작까지 남은시간은 3초입니다.》 

《‘동등한 투쟁’의 시작까지 남은시간은 2초입니다.》 

《‘동등한 투쟁’의 시작까지 남은시간은 1초입니다.》 

《‘동등한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 자. 

시작하자. 

전혀 동등하지 않은 투쟁을. 

“여신님을 위하여!” 

“디바인 소드!” 

가장 먼저 움직인건 성기사들이었다. 

온갖 가호와 버프를 둘둘 두른 그들이 순식간에 나를 둘러싼 것이다. 

나는 초월지검과 루-마리아, 두 자루의 검을 쥔 채 차분히 전방을 훑었다. 

‘무르군.’ 

제대로된 대열이 아니다. 

대충 주변을 둘러싼 게 전부. 

토끼를 잡는데도 사자는 최선을 다하건만. 

나는 오른발을 디뎠다. 

“뭐, 뭐야!” 

“왜 이렇게 빨라······!” 

동시에 성기사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나를 막고자 움직였지만 이미 나는 그들의 지척까지 파고든 상태다. 

140을 넘어서는 민첩과 ‘깨지지 않는 신념’에 의한 이동속도 증폭효과. 

무르기 짝이없는 종잇장 따윈 단번에 찢어발기고도 남는다. 

흐읍! 

맨앞줄에 있던 성기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대검을 휘둘렀다. 

육중한 무게와 함께 실려오는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할 터. 

하지만 나는 정면에서 성기사의 대검을 쳐냈다. 

꽈앙! 

“꺼억!” 

반발력을 견디지 못한 성기사의 양쪽 팔이 위로 솟구쳤다. 

하지만 끝내 대검을 놓지 않자. 

쫘아악-! 

“아악!” 

찰나 지경에 벌어진 일. 

양쪽 팔이 찢기듯 뜯겨나갔다. 

《110%의 ‘추가타격’이 발동됩니다.》 

천축의 고래 탈리스만이 지닌 ‘추가 타격’이 발동된 것이다. 

힘 능력치를 0%부터 최대 150%까지 증폭하는 타격. 

110%의 추가타격만으로도 성기사의 양쪽 팔을 뜯어내기엔 충분했다. 

“알켄 경!” 

“저 악마를 죽여라!” 

이제는 악마 취급인가? 

마족도 아니고 악마라니. 

쉐에에엑! 

‘정지.’ 

《정지 상태입니다. ‘디바인 쉴드(13Lv)’가 발동됩니다.》 

쭈아악-! 

날아온 화살이 벽에 닿더니, 늪에 빠진 듯 한없이 느려지다가 멈춰섰다. 

화르르륵! 

곧이어 화살이 성스러운 불과 함께 타올랐다. 

이러한 형태의 쉴드는 하나뿐이다. 

“디, 디바인 쉴드?” 

“말도 안 돼! 설마 상위 사제라고?” 

디바인 쉴드는 오직 상위 사제만이 사용할 수 있다. 

명예로우며, 올곧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다. 

하지만 상위사제는 여신교에서도 극소수만 도달하는 자리. 

그것을 고작 레벨 4짜리가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지. 

“사술이다! 악마의 농단에 놀아나지 마라!” 

“눈속임에 현혹되어선 안 될지니!” 

“여신이시여!” 

여신교. 

쌍둥이 여신 레아와 피나를 따르는 판게니아 최대 종교. 

그들은 여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현혹을 벗어나고자 했다. 

휘- 휘이이- 

얕은 바람. 

성기사들의 머리 위로 떠오르는 축복의 종소리. 

축복은 많을수록, 중첩될수록 더 강한 힘을 부여한다. 

건실한 믿음만이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무방비하군.’ 

그 틈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축복이 부여되기까지 걸리는 시간. 

이는 성기사의 고질적인 약점이다. 

사제와 기사의 노릇을 한꺼번에 하려하니 역할을 바꿀 때마다 ‘빈틈’이 생기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아악!” 

“꺽······!” 

허리가 등분되자 몸통이 바닥을 구르고, 머리가 하늘을 난다. 

단말마와 함께 순식간에 두 명이 즉사했다. 

두꺼운 갑옷도, 보호의 가호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이게 성기사들의 두 번째 고질적인 약점이다. 

스스로에게 축복을 부여할 시간을 벌고자 무거운 갑옷과 둔해지는 가호를 받는 것. 

방어력이 오르는 대신 기민함이 죽어버리지 않나. 

“비켜라!” 

결국 아론의 옆을 지키던 한 남자가 나섰다. 

축복을 끝마친 그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네놈, 아드리움의 현이라고 했나? 검 휘두르는 솜씨가 제법이구나. 한데, 디바인 쉴드는 어떻게 사용한거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게 사용했느냐고? 

“여신이랑 좀 친해서.” 

물론 ‘깨지지 않는 신념’에 의한 효과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내 말을 듣고 남자의 인상이 더욱 험악하게 굳었다. 

“나는 밧르타슈다. 이 멍청한 놈들을 이끄는 단장이자, 곧 네놈을 여신께 보낼 사람의 이름이니, 가서 속죄하도록.” 

그나마 다행이다. 

지옥으로 가라는 말은 안 해서. 

성도 아드리움 출신인 게 크게 작용한 듯싶었다. 

··· 물론 아드리움도 진짜 출신지는 아니지만. 

그런데 밧르타슈? 

‘파트라슈?’ 

파트라슈를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플랜더스의 개. 

두 눈두덩이가 깊게 들어간 게, 진짜 파트라슈처럼 생긴 것도 한 몫했다. 

“인내, 속죄, 구원, 광신, 성역.” 

단어 하나를 꺼낼 때마다 추가되는 축복들. 

하나같이 최상위계의 축복이다. 

곧이어 밧르타슈의 주변으로 넓은 성역이 생성되었다. 

성스럽지 못한 자는 발도 딛을 수 없는 절대적인 대지. 

그가 얼마나 강력한 성기사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단언하마. 너는 절대로 나를 ‘접할 수’ 없다. 당연히 아론님에게도 털끝하나 손댈 수 없으니-.” 

화르르륵! 

그의 두 눈이 타오른다. 

성역과 함께 빛을 발했다. 

마치 신을 받아들인 듯한 모습. 

절로 경건함이 느껴지는 자태다. 

이어, 그가 선언했다. 

“마지막으로 선고하마. 후회하며 죽어라.” 

신언. 

신을 받아들인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신의 말. 

모든 공간을 파하며 파고드는 절대적인 용어. 

설령 상위사제라 할지라도 이 힘을 거역할 수는 없다. 

“······ 음?” 

하지만 꿈쩍하지 않는다. 

선 채로 죽었나 싶었으나. 

툭. 툭. 

움직이고 있었다. 

밧르타슈는 미간을 찌푸렸다. 

신언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신언이 캔슬됐다. 

뿐만이 아니다. 

스윽. 

스으윽. 

“······ 뭐?” 

당황스러운 일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놈이 밟는 ‘성역’의 대지가, 지워진다. 

밟는 대로 지워져 간다. 

이러한 현상을 그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아니다. 

있기는 있다. 

교황 성하. 

오직 그분만은 모든 여신의 힘을 받아들이고, 무효화시키는 게 가능하다. 

피시시시식······. 

성역이 지워지자 그 다음은 ‘광신’이었다. 

두 눈에 깃든 성화가 빛을 잃는다. 

놈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구원, 속죄, 그리고 인내의 축복도 사라졌다. 

모든 여신의 가호가, 축복의 힘이······. 

눈앞의 남자를 감히 해할 수는 없다는 듯이. 

“네놈··· 악신의 사도로구나······!” 

밧르타슈가 검을 들었다. 

축복이 먹히지 않는다면 순수 검술로 격퇴하면 그만. 

자세를 잡고, 지척까지 다가온 악신의 사도를 향해 일격(一擊)을 날렸다. 

스윽. 

그리고 보았다. 

가까워지는 지상을.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보았다. 

자연스럽게 올려다 본 남자의 모습. 

남자의 머리 위로 뻗어있는. 

‘여신이시여······! 어찌하여!’ 

··· 두 여신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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