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강림
“······.”
“······.”
“······.”
순간, 정적이 찾아들었다.
고작 10분도 걸리지 않아서 서책을 해독하고, 익혔으며, 더 나아가 완숙하게 펼쳐내기까지 하다니!
‘아드리움의 현······!’
같은 아드리움 출신인 ‘아론’은 대뜸 이맛살을 구겼다.
판게니아를 아우르는 여신교.
그 여신교에도 열두 명밖에 없는 추기경의 아들이자, 항상 천재로 추앙받던 자신보다 저 난민 같은 놈이 더 잘났다는 말인가?
‘··· 최소 하루 이상 진행되는 걸 염두에 둔 시험일 텐데.’
애초에 시간제한이 없다.
말인즉, 장시간을 고려하고 짜놓은 판이라는 것.
일어나면 탈락이라는 말은 고도의 인내심과 집중력, 이해력, 해독 능력 따위를 고루 보겠다는 의도다.
먹지도 말고, 싸지도 말고, 오로지 앉은 채 책만 보라는 의미였으므로.
투신의 탑 10층에 모인 우승 후보들.
그들을 제외하고도 천 명에 달하는 소위 ‘천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런데······.
그러할진대.
‘레벨 4 따위가 어떻게?’
아드리움의 현.
놈의 머리 위에 수 놓인 숫자.
그 숫자는 이곳에서 가장 낮은 ‘4’였다.
이곳에 모인 수많은 ‘천재’에 비하면 너무 허약하고, 평범하다.
하물며 이곳엔 최대 12레벨을 이룩한 이들도 있었다.
아론 자신 역시 10이었고.
워리어 대회에서 10층에 올라온 건 저놈밖에 없다.
그래서 비웃었던 것도 사실이다.
-레벨 4?
-길을 잘못 든 거 아닌가?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라.
비웃은 건 아론만이 아니다.
머리 위에 적힌 숫자가 ‘무력의 강함’을 수치화한 ‘레벨’이라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당연히 가장 낮은 레벨의 참가자는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머리 위의 숫자가 절대적이지 않다고는 해도, 어느 정도의 기준이 되는 건 사실이다.’
숫자가 낮은 자가 더 높은 자를 이기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었다.
2레벨 이상 차이 나는 사람을 이기는 경우는 거의 없을 지경.
당연히 4레벨이면 이곳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 따위 한 명도 없어야 정상이다.
‘운이 좋은 건가? 아니면 책의 해독 능력이 유난히 뛰어난 건가?’
······ 그렇게 조롱했던 대상.
아드리움의 현이 누구보다 빠르게 시험지를 작성했다.
모두의 눈이 기사들에게 향했다.
과연, 저게 정답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가득 담을 채로.
“······ 놀랍군.”
마정석이 텅텅 빈 것을 본 기사의 첫마디였다.
팔가 기사단.
제국 최강임과 동시에 대륙 최강의 기사단인 그들.
심연과 전쟁을 하며, 제국의 영토가 번창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역전의 용사들!
어지간한 일에는 놀랄 일이 없는 그들조차도 지금 상황에 상당히 놀라워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허나 막상 나온 대답은 정반대였다.
그제야 아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하기야···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러면 그렇지라고 대회 참가자들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즈음.
툭!
누군가가, 탑의 10층에 새로 입장했다.
“······!”
그를 발견한 순간 모든 이들은 돌처럼 굳을 수밖에 없었다.
팔가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굳어버렸다.
“어떻게······!”
이윽고 나타난 남자가 아드리움의 현에게 다가갔다.
그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리어 이곳에 모인 그 누구보다도 소스라친 눈빛이었다.
‘라이가 님이 어째서 여길?’
‘왜 저런 표정을 짓고 계시는 거지?’
······ 라이가.
그가 시험장을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다급한 태도를 보이면서.
“어떻게······ 이걸 완성한 것이냐?”
······ 완성했다?
무엇을?
설마 모두에게 나눠준 이 책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단 뜻인가?
그걸 아드리움의 현이 완성해냈다?
“알고 있던 게냐? 아니면······!”
“그냥.”
그제야 처음으로 아드리움의 현이 입을 열었다.
한데, 대답이 석연치 않았다.
그냥?
“······?”
“그냥, 보니까 알겠던데요.”
“······ 뭐?”
순간 라이가는 벙 찌고 말았다.
보니까 알겠다니.
이게 무슨 망발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은 탓이다.
생사경.
이 책은 미완성본이다.
팔가의 시초와 함께했으나, 처음부터 반쪽짜리였다.
대를 거듭하며 완성시키려고 했지만 한 명도 성공하지 못했다.
책의 완성은 어느덧 팔가의 염원이 됐다.
하지만 반쪽짜리 책도 단 하나의 기능만은 확실하게 하였다.
‘히든 특성 돌연변이를 발화시키는 책.’
팔가의 계승자가 되기 위한 필수 히든 특성.
전대 팔가의 후인은 다음 팔가의 후인에게 마력과 가호 따위를 넘겨 주어야 하는데, 이것을 온전하게 흡수하기 위해선 ‘돌연변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여 이 책은, 히든 특성 돌연변이에 대한 단초를 찾아주는 책이었다.
‘책을 읽고, 익히면, 약간의 흡성 능력과 함께 천천히 돌연변이 특성을 갖게 되지.’
물론 책을 읽는 것부터 난해하다.
보이지 않는 글자를 읽고 익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므로.
그렇게 익힌 기술로 마정석의 마력을 ‘약간’ 흡수하는 게 이번 시험의 요지다.
한데 아드리움의 현, 이놈은 마정석의 마력을 전부 흡수했다.
반쪽짜리 책을 완성한 게 아닌 이상 불가한 일.
더욱 놀라운 건 이어진 이 말도 안 되는 녀석의 말이었다.
녀석은 팬을 쥔 시늉을 하며 책을 가리키더니.
“적어드릴까요?”
*
솔직히 놀랐다.
생사경.
이 책에 적힌 내용을 보았을 때.
‘천마신공?’
비슷했으니까.
천마도의 악신이 나불대던 천마신공의 묘리와 너무나도 흡사했다.
동시에 깨달았다.
‘··· 원래부터 천마신공과 하나인 기술이다.’
같은 묘리를 가졌다는 것.
하지만 약간의 다름은 존재했다.
천마신공은 마력을 증폭시키고, ‘흡성대법’은 마력을 빨아들인다.
원래 이 두 가지 기능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뉘었다.
심지어 천마도 ‘흡성대법’을 익히지 않은 채였다.
왜?
악신이 알려주지 않은 걸까?
아니면, 악신도 모르는 것일까.
‘악신이 천마도에 봉인된 이유가 이건가 보군.’
하늘을 오시하던 마귀가 고작 칼 한 자루에 봉인된 이유.
마귀가 너무나도 강력하여 봉인한 자가 무공을 나눠놓은 게 아닐까.
다시는 마귀가 완성될 일이 없도록.
그리하여 세상에 튀어나올 일이 없도록 말이다.
문제는 생사경의 책에 적혀 있는 내용이었다.
‘손실된 부분이 많다.’
이 책 또한 손실된 채였다.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지워놓은 듯, 완성되지 않은 책.
그 이유도 나는 알 것 같았다.
‘어차피 익힐 수가 없어서 익힐 수 있는 부분만 남겨둔 거로군.’
천마신공을 익히지 않으면, 흡성대법도 완전하게 익힐 수 없다.
그래서 익힐 수 있는 필요한 부분만 남겨둔 것이었다.
팔가의 힘이 온전하게 계승될 수 있게끔.
히든 특성 ‘돌연변이’가 발현될 수 있게끔.
‘······ 초대 팔가의 주인이 초대 천마를 봉인했다.’
전혀 몰랐던 진실.
그렇다면 둘은 앙숙의 관계다.
초대 팔가의 주인은 자신의 힘과 기술, 가호가 후대에 전해지길 바랐다.
초대 천마의 무공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본래라면 영원토록 천마의 무공이 완성될 일은 없었을 터.
······ 나 같은 존재가 나타날 것이라는 예상은 전혀 못 했을 테니까.
‘허.’
악신이 직접 가르쳐준 천마신공.
그 묘리와 해석이 있어서, 반쪽짜리인 ‘생사경’을 보자마자 소실된 부분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천마신공’이 ‘천마신공-생사록(生死錄)’으로 완성됩니다.》
《‘천마강림’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완성되었다.
천마조차도 완성시키지 못한 천마신공을.
악신마저도 잃어버린 그 무공을!
“······ 소실된 부분을 적어주겠다는 거냐?”
동시에 라이가의 두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생사경은 단순히 ‘돌연변이’의 발생을 위한 것이 아니다.
팔가의 염원이다.
이 책을 완성시키려고 얼마나 부던히 노력했던가.
그 염원이 마침내 이뤄지기 직전의 순간.
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못 익혀.’
물론 아무런 생각 없이 적어주겠다 말한 건 아니다.
내가 이걸 적어주면, 그는 나를 제자로 받아줘야만 한다.
확실한 우승자로 발표해야만 할 것이었다.
또한, 생사경의 소실된 부분을 알려준들 어차피 익히지 못할 것이다.
악신이 직접 가르쳐준 천마신공.
그것을 익혀야만 완성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천마신공을 익힐 기회는 앞으로도 없을 터이니.
이에,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쿠릉!
탑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툭! 투투툭!
균열이 난 천장에선 흙이 떨어졌다.
좌우로 흔들리며 중심을 잡기가 어려운 수준이었다.
“뭐, 뭐야?”
“무, 무너지는 건가?”
마치 무너질 듯이 떨려대는 탑을 보며 사람들은 당혹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또 다른 시험인가?
사람들은 라이가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라이가의 표정을 보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라이가의 표정도 삽시간에 굳어버린 탓이다.
그러나 그들과 다른 점은, 라이가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투신 카라스······ 네노옴······!”
《10층의 도전자들 전원이 11층으로 이동됩니다.》
《탑에 도전하지 않은 참가자는 자동으로 제외됩니다.》
《새로운 시련에 맞서 또 다른 신화를 이룩하십시오!》
《탑의 30층에 올라, 챔피언에 도전하십시오!》
《새로운 신화를 이룩하는 자는 영원토록 기억될 것입니다.》
*
투신 카라스.
그는 보고 싶었다.
‘한계를 넘어서는 자, 얼마나 아름다운가.’
탑에 도전한 자들이 한계를 넘어서는 모습을.
그가 탑에 올라 자신에게 도전해왔을 때.
그때의 전율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한계를 끊임없이 넘어서며 챔피언을 이기고, 질투의 악마 산샤를 죽이며, 신격을 되찾은 투신 카라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절대로 깨지지 않을 기록이나, 그럼에도 깨지는 걸 보고 싶다.’
란돌프.
그가 세운 기록은 전무후무하다.
하지만 투신 카라스는 탑의 주인으로서 기록이 갱신되는 걸 보고 싶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챔피언에게 도전하는 도전자는 주기적으로 나와야만 했다.
‘······ 어리석은 인간들이군.’
하지만 지금 저들은 너무나도 안일하다.
저래선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30층에 올라 챔피언에 도전할 생각 자체를 못하지 않나.
고작해야 대회의 우승 따위, 탑에 도전하는 것만 못할진대.
감히 10층에서 끝내겠다?
한 번 오른 이상 끝날 때까지 도전해야만 하는 게 탑이다.
자기들 마음대로 끝을 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카라스는 자신의 ‘규칙’을 적용시켰다.
저들이 강제로 올라설 수 있게 만들었다.
‘서로 싸우고, 경쟁하며, 한계를 넘는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지.’
새로 재정비된 탑은 이전과 다르다.
단순히 ‘투기장’의 역할로 싸우기만 하진 않는다는 말이다.
진정한 투쟁은 따로 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초월의 방법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알고 한계를 넘어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지니.
투신의 탑.
이곳에 오르는 자.
오르고, 또 올라, 정점에 서는 자.
오롯이, 투신으로 완성되리라.
*
그 시각.
발란 왕국에 도착한 이자벨라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디 가신 거지?”
······ 란돌프가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