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피언 란돌프
“와!”
“저 사람들이 2세대 각성자야?”
“너무 멋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위해 한 건물 앞으로 몰려들었다.
바로 영웅연합의 본사.
설치된 단상의 위에는 약 20여 명의 사람들이 나란히 도열해 있었고, 그 앞에서 연합장인 박태우가 연설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그가 있었다.
최강남.
명예의 전당 3위에 이름을 올린, 2세대 각성자 중 가장 뜨거운 감자!
“부연합장님. 어떻습니까? 2세대 각성자들은.”
“흐음.”
부연합장인 이아린이 팔짱을 낀 채 단상 위를 바라봤다.
마계 칠군단장인 바사라의 입장에서 2세대 각성자들은 아직 볼품없는 어린아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직 갈지 않은 보석.
그러나 ‘잠재력’만 따져본다면 제법 훌륭했다.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는 1세대 각성자들과 달리, 자체적으로 각성한 2세대 각성자들은 훨씬 더 높은 성장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걸까.
‘아무래도 환경의 차이겠지.’
지구인이 지구에서 활동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판게니아인이 지구에서 활동하려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수밖에 없다.
이는 정령들이 정령계를 빠져나와 중간계에 소환되면 온전히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상과 같았다.
하지만······.
‘2세대 각성자는 판게니아로 로그인할 수 없다.’
그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성장 잠재력이 높다뿐이지, 성장을 위한 환경 자체는 판게니아가 압도적으로 좋으니까.
지구에는 제대로 된 던전도, 탑도, 오랜 전승을 품은 무기도 없다.
반면에 판게니아는?
그 모든 게 갖춰져 있다.
뿐만인가.
시도때도 없이 일어나는 전쟁.
지구와 달리 직접 몸을 움직이며 칼과 활 따위를 다룬다.
수많은 괴물들을 사냥하고 탐험하며 업적을 이루는 시스템 자체는 판게니아가 훨씬 더 잘 갖춰져 있었다.
허나,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예를 들어 그 모든 걸 초월할 정도의 ‘가능성’을 지닌 육체라면.
“나쁘지 않군.”
그녀가 최강남을 바라보며 가볍게 평했다.
직접 갈고닦으면 어느 정도의 보물은 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오오······!”
“부연합장님께서 그 정도로 좋게 보신다니!”
“올해는 풍년이군.”
그 말을 들은 연합원들의 경악했다.
부연합장인 그녀가 ‘나쁘지 않다’고 말한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관심사는 최강남이 아니었다.
“박현명은 어디 있는 거지?”
“그, 그게······ 아직 못 찾았다고 합니다.”
쯧.
짧게 혀를 찼다.
신의 섬에서 높은 성적을 낸 상위의 10명.
그 안에, 박현명이 있다.
아마도······ 그날, 자신이 명함을 건네줬던 그 남자.
천살성을 지닌 그 남자가 박현명일 것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증발한 듯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모든 인력을 총동원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한국에 있는 ‘박현명’은 전부 찾아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마치 지워진 듯.
누군가가 고의로 지워놓은 듯 사라진 상태.
-신의 섬에서 상위 성적을 낸 10명. 그중 아홉 명을 혼자 상대했습니다.
-놈은······ 괴물입니다. 그 남자는······!
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최강남을 비롯한 아홉명이 ‘박현명’의 존재를 증언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홀로 모든 걸 성취해낸 남자.
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바사라는 당시의 상황을 눈앞에 재현해냈다.
마지막 대결을 말이다.
‘8초.’
상위 성적의 아홉 명을 박살 내는 데 걸린 시간.
고작, 8초.
아무리 천살성을 지녔대도 너무 강하다.
비슷한 성취를 이뤘을 텐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격차라.
휙!
휘익!
그녀의 눈앞에서 박현명이 전광처럼 움직인다.
전각을 밟고 주먹을 내지르자 속수무책으로 달려들던 남자 한 명이 고꾸라진다.
즉시 반대편 팔을 직각으로 뻗어 반대편의 공격을 막아낸 뒤 그대로 얼굴에 한 방.
머리로 받고, 무릎으로 턱을 날리고, 주먹으로 가슴뼈를 박살낸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모든 동작이 이뤄졌다.
‘타고난 전사로군.’
바사라의 ‘재현능력’은 신의 경지에 다다랐다. 이야기만 들어도 9할 이상 비슷하게 재현해낼 수 있었다.
후우우.
8초 만에 상위의 9인을 꺾은 박현명의 숨소리는 너무 고요하다.
그 몸짓이, 눈빛이, 세포의 활동 하나하나가.
마치 숱하게 전장을 경험한 노장과 같지 않은가.
아니, 아니다.
노장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다.
‘아니, 타고난 투신(鬪神)인가?’
그냥 강했다.
출발선 자체가 다른 차원에 있었다.
마치 싸움에 미친 신이 되고자 태어난 인간마냥.
도저히 같은 튜토리얼을 경험하며 얻은 무력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게다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투신 카라스······ 기사왕 빌헬름······.’
기세도 다르고, 사용하는 기술도 다르며, 그릇도 다를진대, 어찌하여 그 두 존재의 존재감이 박현명에게서 느껴지는 걸까.
그들과 같은 눈부시는 재능의 소유자라서?
‘··· 탐나는구나.’
탐이 난다.
이 정도로 탐나는 인간은 오랜만이다.
그는 자신이 갈고닦지 않아도, 어쩌면 완성될지도 모르는 그릇이다.
하지만 만약 자신의 색깔로 물들일 수 있다면 어떤 보석으로 완성될지 상상만으로도 즐겁고 기대된다.
짝짝짝짝!
“차세대 영웅연합을 이끌어갈 영웅들에게 박수를!”
“최강남! 최강남!”
“와아아아!”
요란한 박수소리.
임명장을 수여하며 연합에 들어온 것을 축하해주고 있다.
번쩍이는 플래시와 함께 카메라들도 바삐 돌아가는 중이다.
대대적인 홍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실시간으로 저들을 보고 있을 터.
그러나 그녀의 눈과 귀는 이미 다른 걸 보고 듣는 중이었다.
박현명.
그의 움직임과 숨소리를.
······ 그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
통과자들과 함께 도착한 곳은 전혀 의외의 장소였다.
“잠깐, 여기는······.”
“······ 제국에서 치러지는 게 아니었나?”
대회의 장소에 도착하자 모두가 의외라는 목소리를 높였다.
어마어마한 인파와 함께 그들이 마주한 건 거대한 탑이었다.
판게니아의 모든 도시에서 몰려오는 참가 희망자들.
족히 수만 명이 넘어가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놓고 대회를 열려거든 어마어마한 규모의 시설이 필요할 것이다.
새로 만들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하여 기존에 있는 시설을 이용하고자 한 의도는 알겠다.
문제는 이곳이 그냥 시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투신의 탑?”
“뭐야, 다시 열렸어?”
투신의 탑!
투신 카라스가 탑의 주인으로 있는 그곳.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한동안 닫혀있던 투신의 탑이 다시금 문을 연 것이다.
‘질투의 악마 산샤를 죽이고, 투신 카라스가 본래의 신격을 되찾으며 탑이 20층에서 30층으로 증축되었지.’
메인 퀘스트 9인 ‘투신의 탑 오르기’를 달성하고자 찾은 곳.
설마 여기를 다시 찾아오게 될 줄이야.
마침내 투기장을 다시 열 정도로 탑이 정비된 듯싶었다.
그러나 투신 카라스와 마주하면 정체를 들킬 수도 있다.
신격은 상대를 꿰뚫어 보는 힘을 지녔으니까.
‘··· 메인 퀘스트 2와 3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겠군.’
물론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장점도 있다.
오르기만 한다면 메인 퀘스트 2 ‘클래스 얻기’와 메인 퀘스트 3 ‘탑 오르기’를 동시에 해결하는 게 가능할 터.
무엇보다, 란돌프인 상태로도 30층은 정복하지 못했다.
투신 카라스와의 대결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럼?”
“챔피언을 꺾어야 우승할 수 있는 건가?”
“챔피언이 누군데?”
“저기 적혀 있네. ‘란돌프’라는데?”
하지만 탑의 챔피언은 투신 카라스가 아니었다.
탑의 앞에 놓인 거대하기 짝이 없는, 황금으로 반짝이는 석상.
저 모습은 분명히······.
‘란돌프.’
미친.
욕설이 절로 나오려는 걸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아냈다.
‘뭐냐, 저건.’
반짝반짝!
진짜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거린다.
물광을 입혀놓은 듯 시선강탈을 제대로 해주고 있었다.
심지어 석상의 밑에는 커다란 글씨로.
「신(新) 투신의 탑, 1대 챔피언 ‘란돌프’」
「30층에 도달하여 챔피언을 꺾는 자, 또 다른 신화를 이룩하리라.」
······ 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카, 라, 스······!’
투신 카라스······!
신격을 되찾은 김에, 아주 작정을 하고 투신의 탑을 리모델링 한 듯싶었다.
아니면 원래부터 이런 놈이었던가.
반짝! 반짝!
··· 대체 뭘 발라놓으면 저렇게 빛나는 거지?
“허.”
란돌프의 석상을 재차 바라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이마를 부여잡았다.
*
투신 카라스는 탑의 꼭대기에서 전광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성공적인 개장이로군.”
탑이 이용되면 될수록 신격은 더 강력한 힘을 얻는다.
그래서 탑의 주인들은 시련을 준비하고 도전자를 맞이하는 것이다.
이번에 새롭게 개장한 투신의 탑은, 이전보다 훨씬 더 품격있게 개선되었다.
우선 입구에서부터 강렬하게 빛나는 챔피언의 조각상!
‘저걸 보면 누구나 챔피언이 되고 싶어지겠지.’
도전의식을 자극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세워놓은 조각상이다.
자신과 격돌했던 란돌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것이다.
보라.
저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을.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조각상에 시선이 팔려 있지 않은가!
“다시 봐도 잘 만들었지 않느냐?”
“까악!”
“역시 란돌프다. 선이 살아 있어.”
“까악!”
옆에서 제사장 옷을 입은 큰 까마귀들이 울어댔다.
카라스를 따르던 고대 까마귀 일족들.
탑을 관리하던 흉의 일족은 아니지만, 그 흉의 일족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지닌 ‘재(災)의 일족’이다.
본래 카라스는 재의 일족을 이끄는 신이었으므로.
“이 탑은 한계를 뛰어넘는 곳이지. 취지에 맞기에 허락해줬다만, 과연 30층에 도달하여 챔피언에 도전할 인간이 나올지는 모르겠군.”
“까악!”
“역시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까악!”
“그래그래. 그나저나 란돌프는 어디갔지?”
“까악!”
“음, 괜찮다. 어차피 30층에 도달하는 인간은 없을 터이니.”
란돌프는 이곳에 없다.
그러나 애초에 란돌프는 저들이 주관하는 대회의 참가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인간들이 30층에 도달하는 건 어불성설 꿈도 못 꿀 일이다.
개선된 탑은 끊임없이 한계를 시험하는 곳이었으니까.
그야 누군가가 30층에 도달하면 란돌프를 소환해야하긴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무력이 강하다고 무작정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
‘너희의 방식이 아닌, 나의 방식에 맞추거라.’
제국의 인간이 여는 대회?
관심 없다.
대회의 규정이니 규격이니 그런건 아무렴 좋았다.
탑에 오른 이상, 그들은 모두 카라스가 만들어놓은 규칙을 지켜야만 했으므로.
*
“대회는 세 분류로 나뉜다. 워리어, 나이트, 킹. 처음엔 분류된 사람들끼리 대결을 치르게 될 것이다.”
십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투기장에 모여들었다.
탑의 1층.
그 중심부에 진행자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부터 너희들의 머리 위에 ‘숫자’가 떠오를 것이다. 그 ‘숫자’를 보면 자신이 속하게 될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지.”
띠링!
띠링!
순간,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곧이어 사람들의 머리 위로 ‘숫자’가 떠올랐다.
나는 내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4. 레벨이다.’
4라는 숫자.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나.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에, 레벨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게 가능한 건 아마도······.
‘대천사.’
사신교에서 사용되었던 대천사.
그 대천사의 기척이 근처에서 느껴진다.
정보를 관리하는 대천사가 사람들의 레벨을 수치화하여 표시한 듯싶었다.
“5 이하의 숫자는 워리어 레벨이고, 6에서 10까지는 나이트 레벨이다. 11 이상은 ‘킹’으로 분류되어 따로 대결을 치른다.”
세 개의 대회.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생긴다.
우승자는 한 명 아니었나?
“우승자를 판별하는 기준이 궁금하겠지. 우승자는 한 명이 될 수도 있고, 세 명이 될 수도 있다. 모든 건 ‘라이가 님’의 판단에 따르는 것. 그러나 각 대회의 상위 10인은 모두 ‘팔가 기사단’에 입단할 명예로운 기회를 얻게 된다.”
“······!”
모두가 숨죽였다.
최소 30명이 팔가 기사단에 입단할 기회를 얻는다.
인생을 역전하고도 남을 절호의 기회였다.
제국 팔가 기사단의 위상은, 웬만한 도시의 주인 이상이었으니.
“이제 라이가 님께서 연설을 진행하실 것이다.”
“··· 라이가?”
“미친, 정말로?”
웅성웅성!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공식선상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라이가.
그가 최초로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고오오.
조명이 꺼지며 한 남자가 투기장의 끝에서 나타났다.
동시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저 등장한 것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
누가 보더라도, 그는 팔가 기사단의 단장 라이가였다.
그를 수식하는 말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중 가장 확실하며 특별한 건 이 하나뿐이다.
제국 최강의 기사!
더 말이 필요할까.
라이가는 중심부에 도착하곤 좌중을 훑었다.
눈을 마주한 사람들은 그 기세에 눌러 몸을 움츠렸다.
“꺼억···!”
고작 눈을 마주했을 뿐일진대 졸도하는 사람마저 있을 지경이었다.
하나하나.
한 명, 한 명.
빠짐없이 참가자들의 눈을 마주했고,
단 한 명도 그 기세를 제대로 받아내는 사람이 없었다.
“······?”
이윽고, 라이가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