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노라
로그인과 로그아웃.
로그인을 하면 나는 란돌프가 되고, 로그아웃을 하면 다시 박현명으로 돌아온다.
이 명제는 바뀌지 않았다.
남겨진 쪽은 잠들며 공격받으면 ‘수호벽’이 발동되는 것도 같았다.
동시에 두 육체를 인식하여 움직이는 건 역시나 불가한 모양.
“왜 발로그 교단의 표식이 이곳에······?”
이자벨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곳은 그녀와 아이들이 갇혀있던 심연의 외곽.
사막여왕에 의해 서로 죽이고 잡아먹던 살육의 현장.
왜 이곳에 전혀 연관이 없는 ‘발로그 교단’의 표식이 대놓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발로그 교단이라.’
게임에서 접해본 적은 몇 번 있다.
실제로 접해본건 ‘균열의 탑’에서 마스터를 죽일때였지만.
그 팔라딘 녀석.
발로그 교단의 ‘흑점’과 여신교의 ‘빛의 폭발’을 동시에 사용했다.
분명히 ‘멸천자’에게 자신의 성혈을 바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생각을 정리하곤 입을 열었다.
“··· 발로그 교단이 다루는 흑점은 ‘오염’과 닮았다.”
일전 사막여왕이 도시 전체를 오염시켜 ‘마혈왕’을 소환하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
이자벨라는 스스로를 희생하여 그 의식을 막아섰다.
물론 마혈왕은 내 안에서 죽었고, 히든 특성으로 발현되었다.
하지만 나는 사막여왕이 어떻게 인위적으로 ‘오염’을 일으켰는지 궁금했다.
오염은 도시에 생겨나는 오염원을 통해 우연히 일어나는 걸로 알고 있었으니까.
판게니아가 천공으로 떠오르며 생긴 부작용이라고 알려졌으므로.
한데, 그 궁금증이 이제야 풀렸다.
‘흑점의 속성.’
발로그 교단이 다루는 ‘흑점’은 기존의 속성과는 궤가 달랐다.
어둠도 아니고, 그렇다고 혼돈도 아니다.
‘흑점’은 계속해서 중첩되고 번지며 파괴되는 속성이 있다.
마치 오염원처럼.
어쩌면 ‘흑점’은 ‘오염’의 속성을 지닌 걸지도 모르겠다.
한 마디로 발로그 교단은 세계의 오염과 관계되어 있다.
“사막여왕이 발로그 교단과 교류를 했었단 말씀입니까?”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말하는 이자벨라.
뱀공주로 활약하던 당시에도 발로그 교단과 사막여왕이 교류하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아한 게 당연하다.
하지만 발로그 교단은 원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곳이다.
여신교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는 해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발로그 교단이 여신교와의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했는지 아는 바가 없다.
본래 전쟁이 벌어지면 호사가들에 의해 알기 싫어도 알게 되는 게 전쟁의 양상이건만.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곳이, 흔적을 남겨놨다.’
그런데 대놓고 흔적이 남아있다.
표식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며 입을 열었다.
“높은 확률로 교류했겠지.”
“그럼 발로그 교단 이 표식을 남겨놓고······ 소노라를 납치해갔다는 말씀입니까?”
처음으로 이자벨라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발로그 교단이 남겨놓은 표식이 아니다.”
“그럼 대체 누가?”
“소노라가 남겨둔 표식이다.”
“······ 예?”
“그 천을 자세히 봐라.”
세월이 묻어나는 해지고 누래진 천.
천 위에 그려진 표식에 정신이 팔려, 이게 누구의 천인지 간과하고 있었다.
“이건······ 아!”
동시에 이자벨라의 눈동자가 조금씩 확장되기 시작했다.
익숙했으니까.
이 천은, 어떤 옷에서 떨어진 것이다.
“제가······ 제가 입었던 옷의 한 부분입니다.”
바로 이자벨라의 옷이었다.
이자벨라가 입고 있었던 옷의 한 조각.
왠지 그럴 것 같더라니.
“소노라는 죽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이 칠흑같은 곳에서 너를 추억하고 있었던 게다.”
마지막 전투.
내가 이자벨라의 몸을 빌어, 게이머로 플레이했을 당시.
나는 혼종이 되어가는 소노라를 상대로 전투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승리했다는 게 죽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 혼종은 일반적인 혼종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들고 있던 조잡한 무기로 그 변종 혼종을 죽이는 건 확실히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죽지 않은 소노라는 이자벨라의 대결에서 찢어진 이자벨라의 옷 한쪽을 손에 넣었고, 그 추억을 간직한 채로 이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오랜시간을 버텨온 것이다.
“아······.”
이자벨라가 가슴팍을 부여잡고 손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심장이 아프기라도 한 듯이.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너무나도 슬프고, 너무나도 놀라면, 도리어 눈물은 나오지 않는 법이었다.
소노라.
자신의 친구가 이곳에서 혼자 계속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외로웠을텐데.
사무치도록 외로웠을텐데.
혼자 어둠속에 놓인 소노라의 모습을 상상하자, 가슴이 무너질 듯이 아려왔다.
발로그 교단에 납치되기 직전, 소노라는 필사적으로 이 천에 그들의 표식을 그려놓은 것이다.
소중하게 간직하던 이자벨라의 옷 조각을 사용해서.
스스로의 피로 표식을 새겨놓았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장소에 굳이 남겨둔 건··· 아마도 이자벨라가 찾아주기를 바란 것이 아닐는지.
“제가········· 너무 늦었군요.”
“아직 늦지 않았다.”
“······?”
“소노라는 살아있다.”
허나 늦지 않았다.
소노라는 살아있다.
여신교의 성도 아드리움에.
발로그 교단과의 전쟁에서 여신교가 직접 소노라를 포획한 게 분명했다.
왜 ‘부서진 롱기누스의 창’을 품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발로그 교단의 무기로 사용된 건 틀림없어보인다.
그리고 생포했다면 한동안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곧이어 이자벨라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소노라가······ 진정 살아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 알고 계신 겁니까? 어디에 있는지?”
“성도 아드리움.”
“······!!!”
내 대답을 듣고 이자벨라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윽고 이자벨라가 몸을 추리고 일어섰다.
가만히 뒀다간 아드리움으로 곧장 향할 것만 같은 기세.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다.
“막무가내로 달려든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드리움에 닿기 전에 네가 해야할 일이 있다.”
“······ 말씀해주십시오.”
그게 무엇이든, 무슨 일이든, 해내겠다는 표정과 눈빛.
“‘태초의 숲’으로 향한 앤드류 사제를 데려오도록. 그가 있어야 소노라의 신병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다.”
앤드류 사제를 데려오라는 말에 이자벨라가 의아해했다.
“란돌프님. 앤드류 사제가 정규사제이긴 하지만······ 여신교에 큰 영향력은 없지 않습니까?”
“물론 혼자서는 힘들겠지. 당연히 성녀 세야도 함께해야한다.”
“아······!”
“성녀 세야와 앤드류 사제를 이끌고 ‘아드리움’으로 향해라.”
대원정에서 죽었다고 알려진 성녀 세야.
그녀가 앤드류 사제와 함께 귀환하는 그림이 그려져야 일이 수월해진다.
이자벨라가 말했다.
“란돌프님께선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나는······.”
말을 꺼내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박현명으로의 내가 아드리움에 있음을 이자벨라에게 알려줘야할까?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아선 안 된다.’
운명의 역설.
인식하거나, 인지하기만 해도 내 존재력은 얕아진다.
나, 박현명이 지구가 아닌 판게니아에 있다는 걸 이자벨라가 알아차린다면, 그 즉시 소멸할 가능성이 있었다.
문제는 이자벨라가 내 얼굴을, 박현명의 얼굴을 알고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서로의 기억이 어디까지 공유되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란돌프의 몸으로 성도에 들어가는 건 어렵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란돌프가 성도에 들어서면 필연적으로 정체를 들키게 될 것이다.
내가 여태까지 ‘여신교’와 접촉하지 않은 이유다.
성도에 직접 들어가면 200% 걸리게 되어있다.
‘여신의 결계.’
성도에 새겨진 고유 결계, ‘여신의 결계’는 ‘멸망’과 관계된 것들을 막는다.
문제는 란돌프의 안에 ‘멸망의 파편’이 있다는 것이었다.
흉신 바알을 먹어치웠을 때 멸망의 파편이 심장에 박히지 않았던가.
들어서는 순간 발각될 것이고, 그 순간 소노라를 안전하게 데려올 방법은 요원해질 터.
‘투 스텝으로 갈 수밖에.’
그러니 란돌프를 대신해 움직여줄 손과 발이 필요하다.
박현명으로서의 나는 따로 움직이며 소노라의 행방과 ‘대천사’의 위치를 찾아내고 특정해야만 했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후 말했다.
“따로 해야할 일이 있다.”
“잠들어 계시는 겁니까? 아니면?”
“······ 잠들어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우선 발란왕국으로 향해야겠군요.”
이자벨라의 눈에 의지가 지펴진다.
소노라가 살아있다는 나의 말을 철썩같이 믿는 것이다.
다시금 굳건해진 모습.
역시 이자벨라는 슬퍼하는 것보단 이런 모습이 어울린다.
“··· 왜 웃으시는 겁니까?”
“정말 소중한 친구인가보군.”
그러자 언제 슬펐냐는 듯 이자벨라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예. 정말 소중한 친구입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웃음짓게 하는 친구라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신분세탁이다.
그럴싸한 신분이 있어야 성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외지인의 신분으로 성도를 마구 들쑤시고 다녔다간 제 목숨 간수하기 힘들 터이니.
소노라와 대천사의 행방을 동시에 찾으려거든 아무도 쉽게 건들지 못할만한 특별한 신분이 필요했다.
예컨대······.
“모집관?”
“뭘 모집한다는 거야?”
웅성웅성.
광장의 중심,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
사람들은 모두 한쪽을 바라보며 거칠게 입을 열었다.
“제국놈들이 왜 아드리움에 있어?”
“못 들었어? 무슨 무술대회를 연다던데.”
“그러니까··· 제국에서 열리는 무술대회에 참가할 사람을 왜 아드리움에서 찾아?”
이상한 일이었다.
오직 사신교를 믿는 제국과 여신교.
둘의 사이는 물과 기름 같이 섞일 수 없다.
그런데 제국의 모집관들이 성도에 버젓이 있다.
여신교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모든 도시와 나라에서 찾고있다던데? 입상하면 팔가 기사단에 입단할 수 있고, 우승자는 라이가 기사단장의 제자로 받아준다더군. ”
“팔가기사단, 라이가······?”
그 이름을 듣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제국 제일 기사단의 이름과 그 기사단을 이끄는 최강자의 이름이 한데 나온 탓이다.
“뿐만인가? 기사왕 빌헬름이 다루던 성검 ‘빛의 길’을 비롯한 엄청난 보상까지 걸려있다고!”
“허억!”
“미쳤군.”
단순히 신분만 상승하는 게 아니라 부상까지 완벽하다.
성검의 주인은 여신교에서도 쉽사리 대하지 못하므로.
이윽고 옆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푸하! 성도에서 입상하는 사람이 나오면 웃기겠는걸.”
여태껏 전례가 없었던 일.
만약 성도에서 입상자가 배출된다면 그야말로 웃기는 그림이 그려질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에서 사람을 모집한다?
한가지 확실한 건 성도의 사람이 입상하게 된다면 제국과 여신교 양쪽에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하물며 우승이라도 한다면?
“아아, 그래서 성도에서 사람을 모집하는걸 허락해준 거겠지. 그리고 이미 성도의 명망있는 분들의 자제도 꽤 많이 참가한 걸로 아는데.”
“명망있는 분? 누구?”
“요한슨 예하의 아들이라거나······.”
“뭣······ ?!”
여신교의 입장에선 나쁠 게 없다.
도리어 권장해도 부족할 판국.
이는 곧 제국을 여신교로 교화할 천금같은 기회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이 대회를 여신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요한슨 추기경의 아들이 대회에 참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이름 높은 사람들이 대거 참가한 대회.
이미 대회는 여신교만이 아니라 판게니아 전체의 축제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넌 뭔데 그렇게 잘 알아?”
“··· 나도 참가할까 해서.”
생각보다 참가를 희망하는 사람은 많았다.
바람잡이로 보이는 사람도 많았고.
수상할 정도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으며, 나불대는 자들.
그들은 모집관에게 돈을 받고 포섭된 바람잡이일 것이다.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이름은?”
“현.”
“접수자는 오른쪽 막사에서 대기하도록. 간단한 시험을 볼 것이다.”
이름 외에는 물어볼 것도 없다는 태도.
모집관의 말에 따라 오른쪽 막사로 이동했다.
휘유.
나는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막사의 안에는 이미 수많은 참가 희망자들이 있었다.
새로 막사로 들어온 나를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뭐야, 저놈은?”
“비실비실하게 생겼군.”
“진짜 별의별 놈들이 다 들어오는구만.”
서로가 경쟁자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신분세탁을 위한 첫걸음.
예컨대······.
‘라이가의 제자가 된다.’
······ 성도 아드리움에서 탄생한 라이가의 제자라거나.
이보다 더 확실한 신분은 또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