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기누스의 창
어이가 없었다.
내가 박현명인 상태로 판게니아의 땅을 밟게 될 줄이야!
‘상상초월이군.’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아니, 그야 상상은 해봤지만 현실이 되리라곤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하여 빠르게 정신을 다잡았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으니까.
‘판게니아의 존재는 침략의 워프를 통해 지구로 향할 수 있지.’
지금은 그 반대의 상황이다.
지구의 존재가 판게니아로 향했다.
문제는 ‘침략의 워프’를 통해 지구로 향한 판게이나의 존재를 시스템은 ‘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이었다.
그 순간 모든 플레이어에게 메시지를 뿌려 ‘처치’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주변을 살피며 경계했다.
우웅!
그때였다.
가슴팍을 울리는 진동.
‘이건?’
고개를 숙여 확인하자 가슴팍에 목걸이가 걸려있다.
그리고 목걸이의 중심부에 있는 ‘창끝’이 거칠게 울리는 중이었다.
《‘부서진 롱기누스의 창’이 기능하고 있습니다.》
《‘부서진 롱기누스의 창’을 통해 ‘차원도약’을 할 수 있습니다.》
《‘부서진 롱기누스의 창’을 완성하십시오.》
《창의 조각이 근처에 있습니다.》
신의 섬에서 받은 보상.
‘부서진 롱기누스의 창’이 이 현상의 원인이라는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른 것이다.
‘롱기누스의 창을 완성하라······ 가브리엘이 원하는 게 이거였나보군.’
대천사 가브리엘.
그녀가 나를 퇴장시킨 이유가 이것인 듯 싶었다.
무려 차원도약을 가능케해주는 물건.
완성하게 되면 어떤 기능을 할지 예상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쿠릉!
쿵! 쿵!
굉음을 내며 성도의 중심을 달리는 긴 행렬.
“‘루’의 기사단이 어딜 다녀 오는 겁니까?”
나는 옆에 있는 상인에게 물었다.
루의 기사단.
여신교를 대표하는 가장 강력한 기사단 중 하나이자 오로지 ‘성전’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그들이 다급히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래서 묻자, 상인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 성도 사람이 아닌가보군.”
“예. 시골에서 성지순례를 위해 상경한지 얼마 안 됐습니다.”
가장 무난한 대답이었다.
이곳 아드리움은 여신교의 성도.
당연히 성지순례를 위해 매년 찾는 신도의 숫자도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상인이 이해한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으음. 최근 ‘발로그 교단’과 ‘여신교’가 전쟁을 시작한 건 알고있나?”
“알고있습니다.”
모를 리가.
판게니아를 뒤흔드는 뜨거운 감자 중 하나가 발로그 교단과 여신교 간의 전쟁이었다.
모두가 ‘발로그 교단’이 참패하리라 생각했지만 반전이 일어난 탓이다.
1차 접전에서의 대패.
여신교는 수많은 병사들과 기사들, 그리고 추기경과 성녀를 잃었다.
그만한 무력을 신생교단이 어떻게 지니고 있는건지 모두 의견이 분분했다.
덕분에 대대적인 성전을 준비하고자 여신교는 풀었던 돈을 모조리 회수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8영웅회도 함께 몰락한 것이다.
어쨌거나.
‘발로그 교단은 사신교의 후원을 받고 있다.’
나는 안다.
이곳에서 오직 나만이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죽은 추기경과 성녀의 영혼이 사신교의 만찬에 나왔지.’
······ 황금 여우.
여우가면을 쓴 그 여자가 둘의 영혼을 만찬식에서 꺼냈다.
그녀가 아마도 발로그 교단의 전폭적인 지원자이리라.
아니면 그녀 외에도 다른 사신교 간부도 지원하고 있을 수도 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저주받은 놈들이 추기경님과 성녀님을 해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은 모양이야.”
“해할 수 있었던 이유라면?”
“나야 모르지. 하지만 이제 막 발돋움한 발로그 교단 따위가 어떻게 여신교를 상대할 수 있었겠나? 분명히 악마와 거래한 거겠지.”
악마와의 거래.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배후가 사신교라면, 왜 사신교는 발로그 교단을 앞세워 여신교와 전쟁을 일으킨걸까?
여신교의 견제 차원일까?
‘저게 그 이유인가보군.’
확실한 건 저 행렬의 중간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오오, 성녀님들!”
“라의 성녀님이야!”
“아이에님!”
“아아! 너무 아름다우셔!”
동시에 모두가 바닥에 머리를 찧고 양 손을 들어올렸다.
경외한다는 의미다.
행렬의 중심, 천을 씌워놓은 ‘무언가’와 함께 두 성녀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성녀 라, 아이에.
현재 여신교의 간판격인 두 성녀가 함께 있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으니까.
나도 자세를 취하며 슬쩍 시선을 들어올렸다.
우웅! 우우웅!
부서진 롱기누스의 창이 더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 저 천의 안쪽에, 창의 조각이 있는 것이다.
정확히는 창의 조각을 가진 ‘무언가’겠지만.
‘저 안에 있는 게 뭐지?’
모르겠다.
족히 5m는 될법한 크기.
하지만 천에 가려져 알 수가 없다.
그것도 관찰과 투시가 불가능한 특수한 능력을 지닌 천이었다.
한데······.
뭐라고 해야할까.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거지?’
천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울렁이는 기분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안에 있는 게 나와도 관계가 있는 것일는지.
그 찰나였다.
추가적으로 눈앞에 떠오르는 글자들.
《‘대천사 가브리엘의 가호’ - 다른 대천사를 찾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전승’ - 히든클래스를 ‘연성’할 수 있습니다.》
《‘운명의 역설(1)’ - ‘란돌프’와 가까울수록 ‘박현명’의 존재력이 희미해집니다.》
《‘운명의 역설(2)’ - 누군가가 당신이 ‘이 세계의 인간이 아님’을 알아차리거나, 인지할 경우, 존재력이 희미해집니다.》
대천사의 가호가 발동됐다.
외에도 현재 적용중인 것들이 표시되고 있었다.
‘운명의 역설······ 아주 대놓고 활동할 수는 없겠군.’
이래서야 란돌프는커녕 부캐릭터와 접촉하는 것도 위험하다.
아니, 란돌프와 관계된 모든 존재가 위험했다.
존재력이 희미해진다는 건 곧 소멸을 의미했으니.
이것이 차원도약의 대가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보다도 더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성도에 대천사가 있다.’
난데없이 가브리엘의 가호가 발동된 이유가 무엇이겠나.
이곳 성도 아드리움에 가브리엘과 같은 대천사가 또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상컨대 대천사는 각기 지닌 ‘가호’의 능력이 다를 터.
그렇다면.
‘멸망의 파편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대천사의 가호다.’
어느정도 확신이 들었다.
라이가에게서 느껴졌던 그 가호의 기운이, 어쩐지 가브리엘의 가호와 닮아있었던 탓이다.
‘라이가는 대천사의 가호를 받았다.’
그리고 사신교에서 보았던 그 가호를 잃은 대천사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퍼즐이 하나, 둘 맞춰져가는 기분.
그제야 비로소 목표가 정해졌다.
‘모든 대천사의 가호를 받고, 롱기누스의 창을 완성하는 것.’
그것이 나, 박현명이 해야할 일이었다.
*
사막도시 파이살메르.
그곳에 이자벨라가 발을 들였다.
“여, 여왕님?”
바바리안들은 당황했다.
사막여왕의 후계자인 그녀가 기별없이 돌아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쉿. 조용히 들어가고싶구나.”
이자벨라가 검지를 들며 침묵을 요구했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곤 조용한 호송이 시작됐다.
이자벨라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돌아오는 느낌.
돌고, 돌아, 결국 이곳 사막도시였다.
어쩌면 그녀가 진정으로 있어야할 곳은 그녀의 가문인 데르시안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곳 파이살메르였을지도 모른다.
‘란돌프님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내 뿌리를 찾고 싶었는데.’
란돌프를 처음 만났을 당시를 떠올린다.
대원정을 실패하고 흩어진 패잔병들.
그 가운데 란돌프가 있었다.
처음에는 죽이려고 했다.
사막 여왕이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내렸으니까.
사막 여왕의 명령은 절대적이니까.
하지만 란돌프가 자신의 풀네임을 부르고, ‘성각자’임을 밝히자 생각이 바뀌었다.
그를 통해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탈출하고자하는 욕망이 자라난 것이다.
‘만약 그때 란돌프님과 탈출하지 못했다면······.’
아서라.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그녀는 죽었을 것이다.
사막여왕의 목적은 ‘마혈왕’을 소환하는 것.
그 의식만을 위해 도시 전체를 ‘오염’ 시키지 않았나.
오염원이 되어 마혈왕을 소환하려는 제물로 사용됐겠지.
뿐만인가.
‘내 뿌리를 찾고자 하는 욕심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겠지.’
뿌리.
그녀의 근원.
제국의 데르시안 가문!
애초에 그곳엔 그녀가 서있을 자리가 없었다.
서 있기도 싫은 곳이었다.
그곳보단 차라리 이곳이 낫다.
이곳 역시 거짓과 가식으로 가득한 곳이지만 그럼에도 추억이 있다.
‘소노라.’
소노라와의 추억이.
그녀와 함께 지냈던 나날들이.
이자벨라가 잠든 란돌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분.’
란돌프는 생명의 은인이다.
하지만 단순히 ‘은인’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분이었다.
이 모든 게 그와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그와 만나지 않았다면, 혹은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면······ 우물안에 갇힌 채 영원토록 후회만 했으리라.
“궁에 도착했습니다, 여왕님.”
상념을 깨우는 목소리.
이자벨라가 말했다.
“내가 도착했음을 알리고, 모두 궁을 비우도록. 만남의 의식은 내일 따로 진행하겠다.”
“명을 따릅니다!”
마차를 호송안 바바리안들이 궁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머지않아 사람들이 궁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궁을 나온 뒤, 이자벨라는 조심스럽게 란돌프를 등에 업었다.
그리곤 계단을 올랐다.
침실까지 천천히 올라간 그녀는 란돌프를 침대에 눕혔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돌아오겠습니다.”
이불을 덮어주고 한참 란돌프를 바라보다가 등을 돌린 이자벨라는 이내 표정을 굳혔다.
이제··· 현실과 마주할 시간이었다.
이전 사막여왕이 숨겨놓은 비밀의 방.
심연과 연결되어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도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이 궁의 지하에 있어.’
궁의 아래에 봉인된 문이 있다.
그 문을 열면 심연과 연결된 장소가 나온다.
소노라와 아이들이 갇혀있던 끔찍한 장소가.
이자벨라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서재.
그곳 외벽에 놓인 석상들.
모두 다른 방향을 보는 석상들의 얼굴을 한쪽 방향으로 일치시켰다.
쿠릉!
그러자 숨겨진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로 향하는 길이다.
이자벨라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한참이나 내려갔다.
끝없는 통로를 계속해서 내려가자, 그 끝에 거대한 문 하나가 나타났다.
‘이 문 너머에······.’
소노라가 있다.
지금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재차 숨을 크게 들이마신 이자벨라가 석문에 손을 댔다.
그리고 천천히 밀었다.
쿠르릉!
바닥을 끌며 석문이 움직였고, 곧이어 이자벨라는 문의 건너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동시에 이자벨라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었다.
‘이곳이야. 이곳에서··· 우리는 함께 있었어.’
끔찍했던 기억속의 공간과 일치하는 모습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었다.
이자벨라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억을 되새기며 발을 옮겼다.
“소노라?”
하지만 이자벨라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가기만 했다.
어두운 공간의 그 어디에도, 소노라가 없었으니까.
혼종이 되어 이자벨라를 습격했던 소노라.
그 시체라도 있어야 하건만.
어디에도, 없었다.
“소노라!”
이자벨라는 목놓아 외쳤다.
그러나 여전히 들려오는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외마디 이자벨라의 목소리만이 울려퍼질뿐.
‘제발.’
발걸음이 빨라진다.
혹시나 자신이 놓친 곳이 있을까봐.
‘어디 있는 거니, 소노라?’
하지만 한참을 돌아다녀도 마찬가지였다.
털썩!
결국 이자벨라는 주저앉고 말았다.
아아.
이자벨라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무 늦게 온 것이다.
시체조차 남아있지 않다니.
이래서야 죽어서도 소노라를 볼 면목이 없다.
‘이 표식은 뭐지?’
물론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건 아니다.
이상한 표식이 그려진 천조각이 있었다.
커다란 흑색의 점.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알 겨를이 없었다.
“······ 발로그 교단의 특수한 표식이다. ‘흑점’을 뜻하는 거지.”
“란돌프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자벨라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태껏 잠들어있던 란돌프가 돌연히 나타난 것이다.
‘이제 알겠군.’
······ 그리고 이곳에 와서야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천으로 가려진 무언가.
왜인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던 그것.
‘소노라.’
소노라가, 여신교의 성도 아드리움에 있다.
······ 롱기누스의 창을 품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