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정체
메인 퀘스트 1, 생존.
급박한 상황, 극악의 생존환경에 놓인 캐릭터를 어떻게든 생존시키는 게 목표인 퀘스트.
레벨은 1로 고정이며 주어진 장비와 도구는 한숨나올 정도로 형편없다.
당연히 아무리 잘 헤쳐나가도 점수의 상한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
오랜시간 ‘명예의 전당’ 1위가 195점의 그라시아였으니 높은 점수를 달성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절대로 깨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그라시아의 아성도 란돌프의 이름 아래 무너졌다.’
란돌프.
그가 등장하기 전까진.
영웅연합의 연합장, 박태우는 눈을 감았다.
명예의 전당에 란돌프라는 이름 석자가 올라왔을 때의 전율.
당시만 하더라도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220점.
플레이어 모두가 메인 퀘스트 1에서 그러한 점수가 가능하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으니까.
물론 그 뒤로 더 말도 안 되는 점수대들을 연이어 달성하긴 했지만, ‘생존’의 점수는 전체적인 ‘실력’과도 맞물린다.
당장 란돌프만 해도 200점대를 처음으로 돌파하며 전설의 서막을 알리지 않았나.
‘냉철함과 순발력, 그리고 무기를 다루는 기술 등등······ 그 모든걸 합친 순수한 실력만이 발휘되는 장이 메인 퀘스트 1이니.’
하여, 메인 퀘스트 1의 점수를 보면 얼마나 대단한 놈이지 알 수 있다.
오로지 순수한 실력으로 인정받는 게 ‘생존’의 내용인 탓이다.
실제 랭커를 보면 이 ‘생존’의 점수대로 가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하이랭커는 순위는 생존의 순위와 얼추 비슷하게 맞물려있는 것이다.
그러니······ 생존의 점수와 순위는 그 사람의 잠재력이라 봐도 무방하리라.
‘맥스 레벨을 찍고, 초월을 하려거든 혼자서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순수한 실력 자체가 성장고점이, 잠재력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얼마나 좋은 장비를 착용하고, 특수한 클래스나 스킬을 얻어도, 실력이 없는 자는 한계를 맞이하기 마련이었다.
애초에 ‘판게니아’는 싱글플레이를 지향했다.
9레벨을 넘어서면 경험치의 획득 자체가 ‘압도적인 경험’ 혹은 ‘혼자서 사냥과 시련’을 해결해야만 가능했으므로.
한데.
‘······ 명예의 전당 순위가 대폭 바뀌었다. 심지어 200점대를 넘어선 사람이 세 명 늘었어.’
200점대를 처음으로 넘겼던 란돌프.
그 다음으로 200점대를 넘어서는 자가 한꺼번에 세 명이나 나타났다.
메인퀘스트 1의 점수가 잠재력과 직결된다면, 그라시아를 넘어서는 성장가능성을 지닌 사람이 무려 세 명이 더 등장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한 명은 란돌프보다도 점수가 높았다.
화악!
화아아악!
박태우는 귀환자들이 내뿜는 빛을 바라보았다.
세계 곳곳에서 빛과 함께 돌아온 수만 명의 사람들.
‘저중에··· 있다. 그라시아를, 란돌프를 넘어서는 괴물들이.’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이미 눈치챘을 터.
저 빛은 변화를 가져왔다.
처음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처럼.
적어도 플레이어들에게 저 빛은 최초의 불과도 같았다.
박태우는 명예의 전당 순위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중 200점이 넘는 사람만을 집중적으로 보고, 또 봤다.
<5위, 195점. 그라시아>
<4위, 200점. 쿠에쿠>
<3위, 205점. 최강남>
<2위, 220점. 란돌프>
쿠에쿠, 그리고 최강남.
글자만 봐도 국적이 그려지는 이름들이다.
신의 섬에서 진행된 튜토리얼이 그들이 경험한 ‘생존’과 비슷한 내용이라면, 저들 역시 순수 실력만으로 이만한 점수를 거머쥐었다는 이야기.
1세대 각성자와 2세대 각성자의 상황이 다소 다르다고는 해도 점수는 절대적이다.
‘최강남······ 한국인이 아닐 수 없는 이름이로군.’
그러니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
누구보다 빠르게 영웅연합으로 데려와야만 했다.
그라시아를 넘어선 가능성을 지닌 저 예비 괴물을 말이다.
최강남!
이름만 봐도 느껴지는 강렬함.
그가 지방세력들에게 넘어갔다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서울이 불바다가 될 수도 있다.
그 무법자들에게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다.
동시에 궁금증이 생겼다.
플레이어들이 메인퀘스트 1의 순위에서 얻은 보상은 단순한 장비만이 아니다.
‘최초의 로그아웃.’
상위 성적의 열 명은 로그아웃을 가능케 해주는 이권을 쥐여 주었다.
나중에야 거의 대부분 플레이어가 로그아웃 가능하게 됐다지만, 메인 퀘스트 1을 깨자마자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이점이 많다.
정보의 취득을 훨씬 더 빠르고 많이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니.
‘2세대 각성자들은 판게니아의 캐릭터와 빙의되지 않는다.’
예상컨대 2세대 각성자는 오직 지구에서만 활동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의문이었다.
과연 상위 순위를 거머쥔 2세대 각성자는 무슨 ‘이권’을 갖게 되었을지.
또한······.
궁금했다.
란돌프를 넘어선 한 사람.
1위에 도달한 괴물은 어떤 보상을 받았을지!
‘··· 한국인이 두 명이라.’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한국인은 최강남 한 명만이 아니었다.
1위.
그 빛나는 이름에, 박태우의 눈은 한참이나 머물러 있었다.
<1위, 300점. 박현명>
······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점수였으니까.
*
《내용을 정산합니다.》
《압도적이며 경이롭습니다. 결단코 초보자는 이룩할 수 없는 영역!》
《총점 300점. 메인 퀘스트 - ‘명예의 전당’에 업데이트됩니다.》
《백성전의 성좌들이 지대한 관심을 보입니다.》
《‘잔악한 성좌’가 턱을 쓸어내립니다. 보상 내용이 한층 업그레이드됩니다.》
《‘불길한 성좌’가 혀를 낼름거립니다. 보상 내용이 한층 업그레이드됩니다.》
《‘냉혹의 성좌’가 눈을 빛냅니다. 보상 내용이 한층 업그레이드됩니다.》
《‘무자비한 성좌’가 아닌 척 슬그머니 관심을 드러냅니다. 보상 내용이 한층 업그레이드됩니다.》
······.
《보상이 초월합니다.》
《SP 1,000점을 획득합니다.》
《‘부서진 롱기누스의 창’을 획득했습니다.》
순간 눈앞에 떠오르는 수많은 글자들.
전부를 꺾고, 전부를 얻어, 유일무이한 점수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보상은 차차 확인하면 될 일.
나는 그보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거룩한 별’에 더 관심이 갔다.
「위대한 전사여, 위대한 섬의 주인이시여.」
···역시나.
요정들은 나를 못 알아봤지만, 축복의 천사는 처음부터 나라는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제야 대화를 할 마음이 생겼나 보군.”
나는 작게 혀를 찼다.
처음부터 강제로 나를 퇴장시킨 게 바로 눈앞의 ‘천사’이기 때문이다.
······ 그렇다. 천사였다.
문제는 그게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천사’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순백의 날개와 인간의 몸을 지닌 그런 천사가 아니었다.
내 눈앞에 있는 천사는, 아무리 봐도 ‘천사’와는 거리가 멀다.
‘이게 천사라고?’
하여 처음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갔던 것도 사실이다.
여태껏 한 번도 판게니아에 등장한 적이 없던 천사.
적어도 나는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본 적이 있다.’
···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생긴 걸 나는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제국의 사신교에서.
거대한 노란색의 구슬.
용이 지닌 일반적인 ‘염원구슬’보다 족히 백 배 이상 큰 크기.
당시 사신교는 그 구슬로 말미암아 판게니아에 접속한 플레이어의 숫자 따위를 알고 있었다.
사신교가 플레이어에 대해 모조리 꿰뚫고 있던 건 모두 그 구슬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노란색 구슬이 천사였다고?
‘미친.’
이제야 이해가 됐다.
왜 판게니아에 악마도, 마족도, 괴물도 많은데 천사만 없었는지.
‘천사가 있어도 없다고 할 만하군.’
누가 이걸 천사라고 생각하겠나.
나라도 생각 못 한다.
구슬이 직접 자신을 ‘천사’라고 칭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제 모습을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는군요.」
의외라는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놀라고 있다. 다만, 예전에 사신교에서 한 번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어서.”
환상이 깨진 기분이다.
동심 파괴도 이런 파괴가 없었다.
곧이어 가브리엘이 말했다.
「천사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선택받은 자가 아닌 이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면 아마도··· ‘가호’를 잃은 천사를 보셨겠군요.」
“뭐가 다른 거지?”
「천사는 현상을 변화시키는 ‘가호’를 내리는 존재입니다. 제 능력과 섬의 특이성이 합쳐지며 사람들을 각성시키듯이.」
한 마디로 기적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기적을 가져오는 자. 그게 천사였다.
가호를 잃은 천사는 기적을 일으킬 수 없다.
나는 그간 궁금했던 바를 물었다.
“천사는 천상에서 내려온 건가?”
「예.」
즉답.
천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천상은 뭐 하는 곳이지?”
「‘거만하고 오만한 자들의 이상향’ 같은 곳입니다.」
애매모호한 대답.
허나, 천국은 아닌 것 같았다.
더불어 그들이 인간사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도 알겠다.
거만하고 오만하다는 말을 천사마저 사용하는 걸 보면.
“··· 란돌프가 아닌 이 몸으로 입장한 건 내가 섬의 주인이기 때문인가?”
「아닙니다. 란돌프와 박현명 사이의 ‘특이성’에 의한 이례적인 경우입니다. 섬의 축복은 이미 각성한 자들에게 닿지 않습니다.」
축복의 천사 가브리엘도 의도하지 않은 상황.
말인 즉, 나 같이 두 번 각성하는 경우는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다는 뜻이다.
「위대한 섬의 주인이시여, ‘전승’과 저의 ‘가호’를 드리겠습니다. 부디 영원하시길.」
“잠깐. 설마?”
순간 나는 이맛살을 구겼다.
왜인지 다음 일이 상상이 됐으니까.
이윽고 가브리엘이 묘한 말을 남겼다.
「더 대화를 나누면 ‘기록’이 남게 됩니다.」
「제가 ‘기록’되는 걸 막을 수 있는 한계는 여기까지입니다.」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성장한 페어리 드래곤들과 함께.」
「······ 부디, 저희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시옵소서.」
그 말을 끝으로.
《‘대천사의 가호’가 부여됩니다.》
《히든 클래스의 ‘전승’이 도착했습니다.》
《‘축복의 천사 가브리엘’이 당신을 퇴장시킵니다.》
*
시간이 없다는 듯 다급히 나를 퇴장시킨 가브리엘.
기록이 남는다는 말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처음 사신교에서 ‘천사’를 봤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 천사는 일종의 정보집약체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게임의 플레이어가 ‘로그’를 남기듯이.
만약 그렇다면 나와 가브리엘이 나눈 대화 자체의 ‘로그’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나를 퇴장시켰다는 것이다.
‘나를 감추기 위해서.’
그 의도는 뻔했다.
나라는 존재가 드러나길 원하지 않아서.
내가 신의 섬의 주인이고, 란돌프라는 사실을 굳이 다른 이들이 알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도 지금 나의 충격에 비할 바는 못됐다.
‘여기는······.’
눈을 뜨자, 내가 신의 섬으로 입장한 지하 수도가 아니었다.
지하수도 특유의 퀘퀘한 냄새도 없고, 심지어는 주변이 어둡지도 않았다.
어딘가로 이동한 건가 싶었으나 적어도 이곳이 ‘지구’는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비켜! 깔려 죽기 싫으면 전부 비켜라!”
“으랴!”
말을 타고 지나가는 행렬.
수많은 은빛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도심 한가운데를 내달리고 있다.
어깨엔 ‘여신교’의 표식을 단 채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여신교의 성도(聖都) 아드리움.’
이곳은 여신교의 심장과도 같은 도시이며,
나는 박현명인 상태로 판게니아에 들어왔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