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별
나는 나를 버리지 않음으로써, 나를 얻었다.
나 자신을 알게 되고, ‘박현명’으로서의 삶을 깨닫게 됐다.
지금 일어난 이 현상은 그로 인한 일종의 보상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저주라고 봐야 할까?
두 번째 각성.
일반적인 플레이어는 불가능한 각성을 나는 해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나, 세상 누구와 견주어도 절대로 꿇리지 않은 압도적인 조건으로.
하여, 고민이었다.
‘나의 행보(行步).’
내가 딛는 나의 길.
이 역시 미개척지다.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걸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굳이?’라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었다.
도리어 신중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었다.
‘나를 드러낸다. 그래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뭐지?’
우선 란돌프와의 관계가 사라진다는 것.
아무도 나를 란돌프라고, 팬텀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리라.
이곳 ‘신의 섬’에서 각성할 수 있는 건 플레이어가 아닌 비각성자들 뿐이니까.
완전히 선을 그어 자유를 취할 수 있을 터.
란돌프는 항상 베일에 싸여있었으니 말이다.
플레이어, 백왕, 제국 등의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은연중 그렇게 행동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박현명은 지구의 일만 신경 쓰면 된다.
다른 관계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말인즉슨.
‘마음대로 행한다. 나쁘지 않군.’
마음 가는 대로 행해도 된다는 의미.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압박을 느낄 이유도, 심지어 원한다면 성별을 고집할 필요도······ 아니 이건 아닌가.
어쨌든 그야말로 완벽한 부캐.
‘··· 내가 부캐라니.’
본의 아니게 부캐릭터가 되어버렸다.
허나 개의치 않았다.
아니, 너무 좋았다.
‘부캐가 본캐를 뛰어넘는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니.’
메인 퀘스트와 명예의 전당이 함께 공유되고 연계된다면 박현명의 이름 세글자가 란돌프의 위에 박히는 날도 틀림없이 올 것이다.
1위와 2위가 나란히 내 기록으로 점철되는 것.
상상만으로도 흥분된다.
기록을 중시하는 나 같은 게임폐인에게 이건 역대급 기회였다.
내가 세운 기록을, 내가 넘는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미 한 번 경험한 길 아닌가?
일종의 ‘스피드 런’이라고 생각하면 될 일.
‘전부 갈아치운다.’
마음을 먹었다.
내가 가야할 행보가 정해졌다.
정한 즉시 나는 ‘생존’의 모든 내용물을 독식하기 시작했다.
혼종 알바트로스를 길들인 건 순전히 ‘날아서 섬의 중앙까지 갈 수 있나?’하는 궁금증의 발로였다.
물론 실패했지만.
아쉽다.
히든피스일 수도 있다고 여겼는데.
“여기서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한데, 인생사에 히든피스가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극악의 확률을 뚫고 아는 사람을 만난 걸 보면 말이다.
‘김부장.’
그것도 불과 며칠전에 만났던 김부장이다.
지금 같은 시대에 과장에서 부장으로 승급할 정도로 능력이 좋은 사람.
물론 진짜로 능력이 좋을 리는 만무했다.
극에 다른 눈칫밥과 처세술, 개밥으로 던져준 자존심과 자존감, 회사의 일이라면 간이고 쓸개고 빼어다줄 희생정신, 그리고 아랫부하를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무자비함이 그를 부장의 자리에 앉힌 것이다.
‘갑자기 얻은 힘에 취해 나사가 빠졌나보군.’
아니면 지난 이틀간의 시련이 그를 자포자기로 만든걸까?
확실한 건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슬쩍 김부장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Lv.5】
레벨 5.
고작 삼일째에 달성할 수 있는 레벨치곤 상당히 높다.
‘막타를 전부 빼앗는 식으로 레벨을 올렸겠지.’
예전 ‘허드슨’이 용병들을 고용해 막타를 치는 식으로 레벨을 올렸다가 문제가 됐다.
레벨은 높은데 능력치가 낮아서 혼자 사냥이 불가능해진 탓이다.
하지만 고레벨일수록 혼자 사냥해야만 경험치를 얻을 수 있게 된다.
특히 9레벨에선 그 경향이 더욱 심해진다.
김부장이 혼자 사냥해서 5레벨을 달성했을 리는 없고, 틀림없이 사람들을 희생양삼아 막타를 빼앗아먹으며 성장했을 터.
뻔뻔한 김부장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꽈아아악!
별안간 힘을 주며, 으스대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김부장.
‘······ 어이가 없군.’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그가 나를 무시하는데 별 생각이 없었다.
속된말로 같잖았으니까.
이제 막 회사를 퇴사했을 때라면 몰라도, 그 뒤로 수많은 일을 경험하고 달성한 내 입장에서 김부장은 바닥에 꿈틀대는 지렁이만도 못한 자였다.
하물며 지렁이가 꿈틀댄다고 화를 내는 사람은 없지 않나?
그보다 못한 족속이 나를 비웃어봤자 웃기기만 할 따름이다.
그런데 그 지렁이가 지금 내 발등 위에 올라탔다.
그러면서 으스대는 중이다.
자기가 더 잘났다며.
자신을 두려워 하라는 듯이.
예전처럼 회사에서 나와 사원들을 대할 때마냥 겁을 주는 것이다.
이쯤되자 김부장이 고마워진다.
‘나는 성장했다.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내가 이토록 성장했음을 알려줘서.
예전의 박현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가 되어줘서.
나는 작게 미소지었다.
꽈드드득!
“······ ?!”
꽈득! 꽈지직!
뼈가 부서지고, 부서진 뼈가 살점을 뚫고 튀어나온다.
심각한 격통에 김부장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치료받지 않으면 오른팔을 영원히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겠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괴물의 밥이 되든, 원한을 산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든, 그건 앞으로 김부장이 감내해야할 일이다.
“아아악! 내손! 내 소오오온-!!!”
손이 아작난 김부장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화아악!
그와 동시에 김부장의 어깨 위에서 황금빛의 물결이 쏟아지더니 내게 잠시 머물렀다.
《실망하여 떠난 ‘무자비한 성좌’가 당신에게 역으로 제안합니다.》
《자신과 계약한다면 ‘시크릿 클래스’와 함께 가호를 내려주겠노라고.》
무자비한 성좌.
처음보는 이름이다.
내가 아는 백성전의 성좌 중에, 저런 이름을 가진 존재는 없었다.
나는 백성전 백 명의 성좌 대부분의 칭호를 알고 있다.
하지만 ‘무자비한 성좌’와 같거나 비슷한 이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건 내가 알던 백성전의 성좌들이 아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 또 다른 백성전이 등장했음을.
백성전은 하나가 아니었다.
단순히 관할구역이 다른 것인지, 아니면 갑자기 출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건 이들 역시 내게 큰 도움을 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중지를 치켜들었다.
“꺼져라.”
그리고 말했다.
김부장과 저 ‘무자비한 성좌’에게.
고작 저딴 보상으로 날로 먹으려는 심보가 아주 고약했기 때문이다.
《‘무자비한 성좌’가 눈을 비빕니다.》
《‘무자비한 성좌’의 얼굴이 붉어집니다.》
《‘무자비한 성좌’가 분노합니다.》
어차피 분노해봤자 놈이 나를 어찌할 순 없었다.
나는 그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성좌가 바라는 건 결국 이야기다.
보다 압도적이며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
내가 써내려가는 내용을 보고 있노라면 다시 헐레벌떡 뛰어오게 되어있었다.
《몇몇 성좌들이 배를 부여잡고 깔깔 웃습니다.》
······ 이곳 백성전은 사이가 좋나보군.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요정을 바라보았다.
마침 두 요정이 사이좋게 허공을 날아다니며 외쳐대는 중이었다.
-여러분! 레벨을 올릴 절호의 기회에요!
-‘신의 섬’에 불법 침입자들이 나타났어요!
-저 ‘추종자’는 그중 한 명!
-‘천산신교’의 추종자!
-저 추종자로부터 ‘생존’하세요!
좌아악!
곧이어 워프를 찢어발기며 나타난 인물.
“인간······?”
“뭐야, 괴물이 아니잖아?”
그건 누가봐도 사람이었다.
나는 놈의 머리 위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Lv.8】
레벨 8!
이제 막 이틀차가 된 각성자들이 상대하기엔 굉장히 버거운 수준의 강자.
두 개의 무리가 합쳐진 건 오로지 저 ‘천산신교의 추종자’ 한 명을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단순히 레벨만 높은 게 아니라 능력 또한 출중할 게 분명했으므로.
‘······ 천산신교?’
게다가 불법 침입자라.
기억이 사라진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천마가 보낸 정찰대인걸까?
화르륵!
추종자의 전신에 화마(火魔)가 깃들었다.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아 광역 스킬이다.
후우웁!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콰아아아!
발로 바닥을 구르며 사람들의 정신을 깨웠다.
동시에 추종자가 준비하던 화염이 거칠게 떨리며 무효화됐다.
그것을 본 추종자가 경악성 어린 외침을 토해냈다.
“처, 천마군림보······?!”
*
신의 섬에 잠입한 건 ‘야차’들이다.
천산신교의 주인이 명한 명령에 따라 그들은 신의 섬에 들어가 비밀을 캐오는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 왜 못 들어가는거지?”
한데, 들어갈 수가 없다.
야차단의 단주이자 혈교의 부교주인 ‘혈월신녀(血月神女)’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워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특정 이상의 무력을 지닌 자는 입장하지 못하는 듯싶습니다, 단주님.”
옆에서 따르는 남자의 말을 듣고 혈월신녀가 이맛살을 구겼다.
“그래서 이제 일류도 되지 못한 아이들만 들어갔나보군.”
“어찌하시겠습니까?”
“나찰단······ 빙월신녀 그 빌어먹을 년보다 내가 더 빨리 들어가려 했다만, 이래서야······.”
혈월신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천마의 명을 받은 건 자신만이 아니다.
경쟁자들이 있었다.
명문가의 후기지수들.
그중에는 자신의 대적자로 떠오르는 빙월신녀도 포함된 상태였다.
하지만 일류 이상의 경지는 입장할 수 없다고 하니, 그저 기다릴 수밖에.
허나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왜 아무도 안 나오는 거지?’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그렇게 장장 3일 정도가 지난 시점에.
슈아아악!
누군가가 워프를 타고 나타났다.
야차의 모습이 새겨진 검은 두건을 착용한 자.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잘리고, 뭉게지며, 살아있는 게 기적과 같은 모습.
“어찌된 일이냐? 안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게야?”
“처, 천세, 천세, 천천세······!”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
천마에게만 허락된 그 구호를 외치며 남자는 끝내 목숨을 잃었다.
이에 혈월신녀의 미간은 더욱 깊게 파일 수밖에 없었다.
대관절 무슨 일을 겪었기에 혹독하게 수련받는 야차단의 일원이 두려워하고 경외하며 죽는단 말인가.
뚝!
그때였다.
옆에서 항아리를 들고 있던 고독술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단주님. 섬에 입장한 야차들은 모두 전멸한 것 같습니다.”
항아리 안에 있던 벌레들.
고독들은 배를 까고 죽어있었다.
고독들 전부가 죽었다는 건 입장한 야차들도 전부 죽었음을 뜻했다.
“······ 전멸?”
“예. 헌데,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몇몇 고독들의 모습이······ 마치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과 같은 모습으로 죽었습니다.”
“고독이 자살이라도 했다는 말이냐?”
이게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벌레가 스스로 죽어?
하물며 고독이 스스로 죽는 경우는 없다.
고독 자체가 끈질기게 살아남은 마지막 벌레를 뜻했으므로.
그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혈월신녀가 신경질적으로 묻자, 고독술사가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고독을 품은 야차단의 단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게 아닐지······.”
“대체 왜?”
“모, 모르겠습니다.”
혈월신녀가 다시금 죽은 야차단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천세, 천세, 천천세.
마치 천마를 마주한 듯 부르짖으며 죽은 녀석.
‘안에서 누구를 만났기에?’
······ 설마 천마라도 뵈었단 말인가?
천마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종용이라도 했다고?
아니다. 그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강력한 환각을 본 것일 터.
‘찝찝하군.’
하지만 해소되지 않는,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찝찝한 기분이 계속해서 혈월신녀의 머릿속을 가득채웠다.
*
심의 섬에 입장하고 정확히 7일째가 되는 날.
아침이 밝아오자 변화가 생겼다.
《‘생존’이 완료되었습니다!》
《상위의 성적을 거둔 10명은 ‘천사’를 마주할 기회를 획득합니다.》
《섬의 중앙에 위치한 ‘거룩한 별’로 인도됩니다.》
신의 섬, 그 중앙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