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스읍, 하아.
갈색 후드를 눌러쓴 채, 나는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천천히 거리를 거닐었다.
‘강남은 오랜만이로군.’
세상이 요지경이 된 이후로 사람들은 서울로, 강남으로 모여들었다.
그래서일까.
다른 지역의 도시가 안쓰러워질만큼 강남의 치안은 세계최고 수준이었다.
24시간 돌아가는 네온사인이 가득한 밤거리도 여전했으며, 범죄율은 더 줄어들었다던가.
특히나 영웅연합의 본사 사옥이 강남으로 옮겨진 이후엔 완전 철옹성이 되었다고.
-신이시여. 제가 옆에 붙어있는 게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순간 검게 물든 알카르가 나의 그림자 안에서 말했다.
그림자에 숨어있는 것보다 옆에 붙어서 호위하는 게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탓이다.
그러나 알카르는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
덩치와 머리가 상당히 눈에 띄여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거리를 거니는 수많은 사람들.
저중에는 플레이어도 다수일 터.
특히 영웅연합의 근처이니만큼, 알카르의 정체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예 없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를 대하는 알카르의 태도에서 문제가 비롯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에 하나 사고라도 쳤다간 여간 골치가 아플 테니.
‘이곳엔 영웅연합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세계각지의 강자들도 서울로 모여들었다.
아직도 인프라가 멀쩡한 한국과의 원활한 교류를 위해서, 유적도시 룬델라의 주인이 된 영웅연합과의 동맹을 위해서, 기타 등등의 이유로.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용맥’이겠지만.
이세라의 진격을 막아내며 용맥의 주인이 된 한국!
당연히 세계적인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연구차 들어온 이들도 상당하리라.
‘이곳 어딘가에 신의 섬과 연결된 워프가 생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입장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들이 이곳엔 다수였으므로.
완성되지 않은 자들 말이다.
“마셔라!”
“마시고 죽자!”
“크하하하!”
새벽이 되어가는 시간.
거리는 여전히 붐볐고, 여전히 활기가 넘쳐났다.
‘여전하군.’
그러한 모습들을 보며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온 실감이 이제야 난다고 해야할까.
판게니아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들.
란돌프가 아닌 박현명이어야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이 교류감.
이게 바로 한국의 밤이다.
-신이시여. 기분이 좋아보이십니다.
“··· 나쁘진 않다.”
-한국의 치안은 감히 세계 최고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특히 박태우가 지키는 이곳 서울은 사명감을 띤 각성자들로 넘치지요.
“확실히······ 그래 보이는군.”
사람들 사이로 거리를 지키는 자들이 있다.
경찰은 아니지만, 언제 어디서든 괴물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각성자다.
그 수준도 꽤 범상치않아보였다.
-허나 신이시여. 아무리 단단하다고는 하나 틈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만에 하나의 일이 벌어졌을 경우, 제가 그림자에서 다시금 소환되는데 3초 정도가 걸립니다.
3초.
긴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데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였다.
검게 물든 알카르는 자나깨나 내 걱정뿐이었다.
칼날용신 하나도, 다른 마혈종들도, 모두 필요 이상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 충분히 인지는 한 상태였다.
‘황금률의 조각으로 변신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3초.’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대략 3초 동안 무방비가 된다는 뜻이다.
15레벨에 다다른 수호벽은 로그아웃한 신체를 지키는 용도.
엄밀히 따져보면 지금 나는 ‘박현명’으로 로그인한 상태이니, 수호벽은 오로지 ‘란돌프’의 몸을 지키는 데에만 작동한다.
고로, 습격당하면 3초 안에 죽을 수도 있다.
그 공백을 방지하고자 알카르가 계속해서 권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강남이다.
무엇보다 나는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조금 달랐다.
황금률의 조각을 사용하지 않아도, 일반인보다 강한 무력을 낼 수 있었으니까.
“오오, 저게 누구야? 박현명 아니야?”
“헐, 진짜네. 야, 박현명! 오랜만이다!”
그때였다.
이제 막 술집을 나온 한 무리.
어쩐지 눈에 익은 남자들.
“오랜만입니다, 김과장님.”
“하하! 임마, 나 이제 부장이야.”
배불뚝이 김부장이 배를 떵떵 치며 다가왔다.
··· 예전 회사 사람들이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온 김부장이 술냄새를 풍기면서 어깨를 툭 쳤다.
“이야, 이놈. 그래도 살아있는 거 보니까 반갑다. 너 그렇게 나가고 완전 폐인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여기 사는 거야?”
“여기서 살지는 않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김부장이 입맛을 다셨다.
“하긴··· 강남은 이제 세들어 살 곳도 없다니까. 나나 우리 사원들이야 회사에서 마련해준 아파트 산다지만, 에휴. 이 충성심 없는 놈. 좀 진득하게 버티지 그랬냐?”
“······.”
“지금은 대 충성시대야. 기업에 충성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그럼 이렇게 집도 주고, 보디가드도 붙여주고, 나는 예전보다 삶의 질이 더 올라간 것 같다니까? 명확하게 계급이 나뉘어버린 지금 시대가 말이야.”
딱히 좋은 기억은 없지만, 나쁜 기억도 없던 곳.
하지만 기억 속 김과장과 지금의 김부장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김부장은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쯧쯧, 힘내라. 그리고 조만간 회사로 한 번 찾아와. 본사도 이곳으로 옮겼으니까··· 오면 밥이라도 한 끼 사줄 테니.”
“······.”
“받아, 임마. 자존심 부리지 말고. 먹고 살기 힘들잖아?”
어이가 없었다.
살면서 이런 취급은 또 처음이었다.
거지부랑자에게 적선하듯 지폐를 쥐여 주려는 상황은.
그것도 오만원도 아니고 만원이다.
무시도 이런 무시가 없다.
나를 빗대어 회사에 더 강한 충성심을 강요하려는 건 뻔히 보였다.
회사를 나간 나와, 남아있는 사람들 간의 간극을 보여주고자 이런 쇼를 하는 것이다.
-아아아! 신이시여! 허락만 하신다면 저 불신한 놈의 몸을 토막 내고 목을 잘라내어 개 밥으로 던져주겠나이다!
알카르의 분노 어린 음성.
이래서 알카르를 그림자에 숨겨둔 것이다.
혹시나 사고 칠까봐.
그때였다.
쿠릉!
땅아래에서 시작된 지진.
위이이이이이잉-!
<경보, 경보!>
사이렌 소리가 도시 전역을 수놓았다.
허나 사이렌 소리보다도 침략은 더 빨랐다.
쿠릉! 쿠르르릉!
순식간에 지면을 뚫고 나온 괴물들.
“뭐, 뭐야?”
“혼종이다!”
허나 평범한 괴물은 아니었다.
심연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잃어버려 괴물화한 혼종이다.
······ 어째서 심연의 괴물이 지구를 침략한거지?
이런 적은 처음이다.
판게니아의 괴물이 침략해온 적은 있어도, 심연의 괴물이 침략해온 적은 한 번도 없었으므로.
하지만,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지나가기도 전에.
“아아아악!”
가장 먼저 김부장을 지키던 가드의 목이 물렸다.
그는 플레이어였으나, 변신을 하기 전엔 일반인에 불과했으므로.
“사, 살려······!”
김부장을 비롯한 사원들 모두가 몸을 떨어댔다.
‘뒤.’
그리고 나는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본능적으로 바닥을 딛고 주먹을 뻗었다.
쿠릉!
쾅!
동시에 지면이 미세하게 떨리며 혼종의 얼굴이 박살났다.
공기 빠진 풍선처럼 날아가 바닥에 처박힌 것이다.
‘방금 그건······?’
막상 주먹을 뻗은 나도 약간은 놀라고 말았다.
생각한 이상의 위력이었기에.
게다가 방금 바닥의 그 진동은 왜인지 익숙하기 그지없었다.
“진압해!”
“경계레벨 3, 경계레벨 3!”
“시민 여러분께오선 최대한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주십시오!”
다행히 일반적인 혼종들이라 진압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황금률의 조각들이 사방에서 빛나며, 곧이어 쏟아지듯 플레이어들이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영웅연합.
그들의 선두에 선 남자는······.
‘박태우.’
박태우가 나서자 상황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그들은 겁에 질린 시민들을 다독이고, 퇴치한 혼종을 구석에 밀어넣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0분 안팎.
엄청난 반응 속도다.
수백의 혼종이 모습을 보였지만 실제 시민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사망자는 처음 목을 물린 보디가드 한 명이 전부.
수습이 되는 상황을 보며 등을 돌리려 할 찰나였다.
“넌······?”
가녀린 목소리와 함께 내 시선에 들어온 여인이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그 여인이 나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다는 걸 본 즉시 알았다.
누굴까.
처음 보는 여자.
그런데 왜인지 위화감이 드는 존재.
그녀는 정확히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신이시여, 제가 나서는 걸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위험한 여자입니다.
검게 물든 알카르가 경고했다.
확실히 이상한 여자였다.
인간임에는 분명한데 묘하게 이질감이 들었다.
그녀를 본 사람들이 숙덕거렸다.
“아린 님이다!”
“오오, 아린 님!”
“저분이 아린 님이야?”
“그래, 영웅연합 최연소 부연합장!”
··· 부연합장이라고?
영웅연합엔 박태우 연합장과 두 명의 부연합장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저 여인, 아린이라는 말이다.
아린이라 불리며 칭송받던 여인은 순식간에 나와 거리를 좁혔다.
이윽고 숨결마저 느껴지는 지근거리까지 다가오자.
그녀는 나를 아래에서 위로 스윽 훑으며 말했다.
“너냐? 천마군림보를 사용한 녀석이.”
“······.”
내심 당황했다.
단번에 알아본 것도 모자라,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천마는 태고의 존재.
같은 태고의 존재나 심연의 주민이 아닌 이상 알아보는 건 불가한 일이다.
그럼에도 한눈에 알아봤다는 건 이 여자가 그들과 맥락을 같이하는 존재라는 의미였다.
‘··· 누구지?’
천마신공.
란돌프는 익힐 수 없으나, 박현명은 익힐 수 있다.
그게 방금 전에 증명되었다.
그리고 증명된 순간 나타난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
“한데, 신기하구나. 각성은 안 한 듯한데. 본능적으로 사용한 건가? 아니면······.”
······ 놀라기는 아린, 아니, 칠군주 바사라도 마찬가지였다.
바사라의 눈이 흥미로 빛났다.
그녀는 확신했다.
이 남자는 황금률의 조각을 사용하지 않았노라고.
말인 즉, 변신한 상태에서 밟은 진각(震脚)이 아니다.
각성조차 하지 않은 상태.
다른 각성자들과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들었으니까.
이게 가능한 경우는 한 가지뿐이다.
‘순수 무력의 사용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부류.
적어도 이곳 지구에서 여태껏 그녀가 못 보았던 부류의 인간이다.
뿐만인가.
진각을 밟을 때의 느낌은 분명 천마군림보였다.
허나 천마신공은 오로지 천마만 익히고 사용할 수 있는 것.
그녀가 알기로 현재 천마는 심연에 있고, 제자 역시 두지 않았다.
그렇다는건.
‘간혹 그런 인간이 있지. 천살성(天殺星)을 타고난 인간.’
수만 년에 한 번 정도 그러한 기질을 타고나는 인간이 있다.
빌헬름이 그랬다.
하지만 이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기질은 결코 빌헬름이 아니다.
빌헬름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정 반대의 인간이었다.
하물며 겉으로 보이는 육체의 완성도도 제법이다.
‘갈고닦으면 나쁘지 않은 보석이 되겠군.’
뜻하지 않은 곳에서 대어를 낚은 기분이 이러할까.
빌헬름을 마주했을 때의 찬란함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이 남자도 갈고닦으면 나쁘지 않은 보석이 될 것 같았다.
적어도 심심풀이는 될 것이다.
“영웅연합에 들어와라. 넌··· 소질이 있어 보이는군.”
마계의 칠군주 바사라.
지구에 온 뒤 처음으로, 그녀는 인간에게 강렬한 흥미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