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
메인 퀘스트 11의 종료!
그와 함께 떠오른 ‘사냥 목록’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과정은 남는다는 건가?’
결과의 부정.
영원군주의 진실된 권능은 규칙 하나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결과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를 부정하는 것일 뿐 시간을 되돌리는 건 아니기에 어느정도의 ‘과정’은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그 과정의 결과가 메인 퀘스트에 반영이 된 듯싶었다.
‘죽이지 않아도 별빛 원정에서 승리했다면 사냥으로 취급해주는 모양이로군.’
참가자 전원을 죽이진 않았다.
그러나 사냥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도구를 이용해 산이나 들짐승을 잡는 일.
혹은 힘센 짐승이 약한 짐승을 먹이로 잡는 일.
전자와 후자 모두 ‘사냥’으로 취급된다면 지금 떠오른 ‘사냥 목록’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신의 살갗 혼종은 사냥한 적이 없는데.’
섬의 주인, 그 혼종의 신을 나는 제대로 본적도 없다.
하물며 영원의 수도자가 영원군주라니?
그 답을 찾고자 나는 눈앞에 놓인 남자를 바라보았다.
“······ 너는 버리지 않았군.”
2m에 달하는 키.
건장한 몸과 세 개의 눈을 가진 남자.
세 개의 눈은 각기 다른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오른쪽 눈은 불타올랐으며 왼쪽 눈은 얼어 있고, 이마에 놓인 눈은 새까만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남자가 영원군주다.
먼 과거, 멸망으로부터 신의 섬을 지켜낸 존재.
“무엇을 버리지 않았다는 거지?”
“너 자신을. 너의 미래를. 너의 모든 가능성을.”
“너는 버렸다는 말인가?”
“아아, 버렸다. 한순간의 완성을 위하여. 너도 보았지 않느냐, 영원의 수도자를. 끔찍한 혼종이 되어버린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말이다.”
“······ 영원의 수도자가 ‘신의 살갗 혼종’이라고?”
영원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권능을 사용해 멸망이 내놓은 결말을 회피하고, 멸망으로부터 터전과 종족을 지키고자 나는 나를 버렸다. 힘에 취한 괴물이 되었지. 너를 유혹한 것도 나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버려라.
자신을.
오직 그것만을 위해 신의 살갗 혼종은 연기를 한 것이다.
“‘신의 살갗 혼종’은 너에게 깃들어 있었다. ‘힘’에 취하게 만들고자 사력을 다했노라. 그 결과 심연의 지배자들과 태고의 존재들마저 상대할 수 있게 되었지.”
나를 버린 란돌프는 강해졌다.
하지만 그 힘의 원천이 오로지 나를 버려서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신의 살갗 혼종.
놈이 란돌프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 결국에는 반쪽인 것이다. 아무리 강해져도, 한계를 넘어서도, 반쪽만으로는 계속 잃어갈 수밖에 없는 게야. 그 혼종의 끔찍한 모습이 증거이니라.”
영원군주가 고개를 저었다.
과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는 듯이.
한순간 강해졌지만, 결국 모두를 잃었다.
자신을 버려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설령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끝은 절망일 따름이다.
남은 반쪽도 스스로를 잃고 혼종이 되어버렸으니.
‘··· 과연.’
그런 것이었나.
이제야 이해가 된다.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 몸을 차지하려다가 실패한 거로군.”
“그렇다. 혼종은 스스로 왕이 되려 했다. 그러나 너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 설 곳을 잃은 ‘신의 살갗 혼종’은 소멸했노라. 이자벨라를 대신하여.”
“······ 음? 이자벨라를 대신해서 소멸했다니, 이상하군. 나는 틀림없이 ‘문’을 대가로 바쳤다.”
“‘진리’는 새침떼기이니라.”
영원군주가 피식 웃었다.
어떤 상황이 연출됐을지 짐작이 간다는 듯이.
“너의 선택 자체가 이미 대가로 완성되었다. 너를 버리지 않은 것. 내가 해내지 못했던 것.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것.”
“‘문’은··· 그대로다?”
“아니, 당연히 그대로일 수는 없지. ‘영원군주 란돌프’는 이 섬에서 얻은 것중 하나. 내 권능은 모든 보상을 무효화한다.”
“그럼······.”
“박현명.”
“······.”
순간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어떻게 내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말인가.
마치 꿰뚫어보듯, 세 개의 눈은 나를 간파하고 있었다.
“혼종은 이자벨라가 당연히 너를 포기할 줄 알았겠지. 현실을 알게 된 이자벨라가 분노할 줄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너 역시도 은연중 그렇게 여겼을 터.”
“······.”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자벨라는 너를 위해 자신의 소멸을 받아들였고, 너 역시 이자벨라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려했다. 참으로 아름답지 않느냐?”
인연이라는 이름의 두 글자.
그보다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냥 듣고 있으라는 듯.
우리의 시간은 길지 않다는 듯이.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너는 너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너의 존재는 연결되어 완성되는 것이다. 그 연결은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노라.”
“지금의 너는 ‘운영자’가 봉인해놓은 기억마저 해제할만큼 강력한 유대를 갖게 되었다. 네가 플레이했던 캐릭터들은 초월하지 않아도 조금씩 너와 관련된 기억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운영자는 판게니아의 인물들과 계약을 하며 기억을 가렸다.
신병.
캐릭터가 되어 게이머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병.
하지만 그 선택은 본인이 한 것이라는 가장 중요한 기억을 감췄다.
플레이어를 ‘죄인’으로 만들고, 서로 부딪히도록 만들었다.
처음엔 여신들에 의한 선택인 줄로만 알았다.
‘레아, 피나. 쌍둥이 여신들은 이 일이 관계가 없다.’
하지만 그 둘이 인간의 싸움을 부추길 리 없었다.
아마도, 설계자.
이 시스템을 설계한 자.
그가 운영자일 것이다.
영원군주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받아들여라. 연결되며 마침내 균형을 맞출 수 있게 될 테니.”
연결을 받아들여라.
현실과 판게니아의 균형이 맞춰질 것이니.
이어 영원군주가 의미심장한 말을 내놓았다.
“또한, 결과는 사라지나 과정은 남는다. 심연의 지배자와 태고의 존재들은 너와 관련된 기억을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에 대한 감정은 남아있겠지.”
“그 감정을 이용해라.”
“너에게 남아있는 기억을 이용해라.”
“그리하여 군림하거라.”
“그것이 영원군주의 권능이 가진 진정한 힘일지니.”
“나는 비록 실패했으나··· 너라면 가능할 것이다.”
쿠릉!
그때였다.
검은 하늘이 무너지며 와르륵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다 됐군.”
영원군주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또 다른 ‘문’이 나타났다.
“나의 후손들과 ‘터전’을 부탁하마.”
쏙!
그 말을 끝으로, 빨려들어가듯 나는 문의 너머로 향했다.
*
배경이 바뀐다.
어느덧 나는 바깥에 있었다.
심연이 아닌 판게니아.
‘닫혔군.’
심연으로 향하는 블랙홀 같은 길은 어느덧 사라진 상태였다.
“··· 아무래도 튕겨나간 것 같습니다.”
내 옆엔 이자벨라가 있었다.
하지만, 이자벨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건 뭐지?”
“예?”
이자벨라가 눈을 깜빡였다.
혹시 모르고 있는 건가?
“네 옆을 날아다니는 거 말이다.”
내가 정정해서 말해주자 이자벨라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곤 기겁했다.
“이, 이건······?!”
정말로 이상한 게 있었으니까.
-분통하다. 왜 내가 이런 몸이 되어야 하느냐!
성인 남성의 주먹만 한 혼종.
둥둥 허공을 떠다니는 거대한 눈.
저건 아무리 봐도 ‘신의 살갗 혼종’이 작아진 형태다.
“이런게 왜 제 옆에······?”
이자벨라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뭔가 짚이는 게 있기는 한 모양.
-왜 내가 이런 여자한테 종속되어야 하느냐, 개같은 ‘진리’야!
“······.”
이자벨라 대신 소멸한 게 아니었나?
영원군주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듯싶었다.
설마 ‘신의 살갗 혼종’이 이자벨라의 펫이 될 줄이야.
그것도 ‘진리’를 부르짖는 걸 보면 소멸대신 강제로 종속시켜버린 것 같았다.
‘새침떼기라는 게 이런 의미였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결과를 도출해내는 자가 진리 아닐는지.
그런 면에선 나와 닮았다.
“란돌프 님. 이게 뭘까요?”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신의 살갗 혼종’이다.”
“······? 벌레의 이름이 길군요.”
“하하!”
벌레라니.
세상 어느 누가 ‘신의 살갗 혼종’을 벌레라고 칭하겠는가.
세상천지에 이자벨라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신의 살갗 혼종’의 이름을 모르는 걸 보면, 역시 이자벨라는 기억을 잃은 것 같다.
나와 관련되어 떠올렸던 모든 기억들을.
허나, 상관은 없었다.
기억은 차츰차츰 다시 쌓아가면 그만이니까.
-이년, 기억을 잃은 척을 하는군.
“······?!”
-부끄럽냐?
“······!!!”
-흐흐, 멍청한 년. 나는 너의 모든 걸 알고 있다. 알 수 있다. 그러니 내게 복종······.
“닥쳐라.”
-······ 꾸엑?!
뭐지, 이 꽁트는.
이자벨라의 한 마디에 혼종의 입이 잠겼다.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인지 확연하게 드러나는 장면.
그런데 ‘신의 살갗 혼종’은 결국 영원군주의 반쪽 아니던가?
‘시장잡배같은 말투로군.’
도저히 같은 영원군주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아무리 스스로를 잃고 혼종이 되었다지만,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기억을······ 안 잃었나?”
“······.”
이자벨라가 입을 꾹 닫았다.
허나 반응으로 보건대 확실하다.
기억을 잃지 않았다.
틀림없이 기억을 잃었을 줄 알았건만.
대체 어떻게 기억을 잃지 않은 걸까?
‘이것도 진리의 변덕인가?’
아니면 저 벌레······ 아니, 신의 살갗 혼종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억이 그대로라면.
-저는 영원토록 당신을 갈망합니다, 박현명.
그 말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갈망(渴望).
영원토록, 간절히 바란다는 말.
그 말이 아니었다면 나는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묻고 싶었으나,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행이군.”
“······ 예.”
이후 한동안 침묵이 유지되었다.
생각보다 기분 좋은 침묵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 침묵의 시간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상태창.’
우선 확인해야 될 게 있었으니.
영원군주는 말했다.
영원군주 란돌프의 히든 특성을 제물로 바친 게 아니라고.
하지만 ‘영원군주 란돌프’로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변화했다면, 어떤 이름으로 변화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 외에도 변화한 점은 분명히 있으리라.
“······.”
그리고 상태창을 확인했을 때.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놀라움이나 경악과도 같은 단말마, 혹은 운이 좋다거나 미쳤다는 생각조차도 전혀 들지가 않았다.
예상을 넘어선, 상상을 웃도는 결과임에는 분명하나,
나타난 결과가 너무나도 예상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을 미처 추스르기도 전에.
《‘메인 퀘스트 11 - 심연 괴물 사냥’의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추산 10,000점.》
《불가해를 뛰어넘는, 궁극적 신비의 영역에 발을 들인 자여.》
《이는 여태껏 그 어떤 도전자도 달성하지 못했던 가능성 ‘0’의 영역입니다.》
《‘0’은 무한한 것이자 절대무(絶對無)를 칭하는 숫자.》
《당신의 지고한 업적에 찬사를 보냅니다.》
《숨겨진 보상, 히든피스 ‘0의 달성자’가 발동됩니다.》
《히든피스 발동의 보상인 ‘온전한 황금률’ 10개가 지급됩니다.》
《업적점수 10,000점과 ‘부서진 황금률의 조각’ 10,000시간을 획득합니다.》
《메인 퀘스트 11의 고정보상 ‘탈리스만 큐브’가 점수에 맞게끔 변형됩니다.》
《‘무한의 탈리스만 큐브(Hidden)’를 획득했습니다.》
《‘신의 섬’의 주인이 됐습니다.》
《‘거룩한 별’을 획득했습니다.》
《명예의 전당 순위가 변동합니다.》
《‘축복의 천사’를 강탈해옵니다.》
《‘축복의 천사’가 깃들 기물을 선택하십시오. 기물에 따라 ‘축복의 천사’는 보다 강력한 축복을 내립니다.》
······.
《초과업적에 의해 아래 ‘탈리스만’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유일군주’ 탈리스만》, 《‘천마’ 탈리스만》, 《‘태어나지 않은 존재’ 탈리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