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존재한다
“··· 다진 고깃덩어리가 되었군.”
꿈틀! 꿈틀!
라이가는 바닥을 뒹구는 고깃덩어리들을 바라보았다.
수없이 잘려나가 형체를 잃어버린 무언가.
과거, 천마였던 자의 육체.
수백, 수천번, 어쩌면 그 이상 난도질되어 재생하는 것조차 버거워진, 인간을 버린 괴물의 말로였다.
허나 죽지는 않았다.
파편을 제거하거나, 흡수하지 않은 채로, 장난감 다루듯 그저 계속 가지고 놀았다는 의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천마는 강자였다.
자신 역시 최선을 다해야할 정도의.
그런 강자가 얇게 저며진 고기가 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다.
주변에 남은 흔적으로 보건대 이건 일방적인 폭력에 가까웠다.
누굴까.
대체 누가 천마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나.
‘두려워하고있다.’
무엇보다도 고깃덩어리는 공포에 절어있었다.
두렵고, 또 두려워서, 재생할 수 있음에도 스스로 재생하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재생해봤자 다시 짓뭉게질 터이니.
압도적인 폭력 앞에 무기력하게 당하게만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라이가는 의아했다.
천마는 단순한 전력의 차에 의해 정신이 무너질 놈이 아니다.
억겁의 세월간 심연을 버틴 존재들은 모두 하나같이 고고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무기력과 절망감.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타격을 준건 존재의 부정.’
라이가는 살덩이에서 풍겨오는 짙은 감정을 맛보았다.
한 마디로 천마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천마는 자신이 천마임을 부정당한 게다.
무시하고, 농락하며, 천마의 파편을 흡수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늘의 마귀에게 이정도로 공포를 안겨준 존재라니.
뿐만인가.
“천마만이 아니다. 섬 전체가 두려워하고 있다······.”
요동치고 있다.
나타나선 안 될 것이 나타나기라도 했다는 듯이.
라이가조차도 절로 숨막히는 긴장감.
천마를 이렇게 만들고, 섬 전체를 짖누른 누군가.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 괴물이었다면 파편과 함께 통째로 삼켰을 테니까.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결과를 만든 건 지금 섬의 중심에 있는 남자겠지.
“설마······ 너냐? 염소.”
황금 염소.
느닷없이 별의 원정으로 자신을 감옥에 이감시킨 빌어먹을 놈.
그렇게 별의 감옥에 이감된 뒤 풀려나자 모든 상황이 바뀌어있었다.
시련은 어느덧 막바지였다.
모든 게 끝이 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자폭한 채 생명만 갉아먹어가면서.
이처럼 허무하고 무력할 수가 있나.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라이가는 고개를 저으며 발을 옮겼다.
파편의 회수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섬의 중심부에 있는 게 만약 황금 염소라면, 놈이 누구이고 뭘하는 놈인지 반드시 알아내야했으므로.
그리고 만에 하나 제국에 위협이 될만한 놈이라면······ 남은 생명을 불살라서라도 막아야만 했기에.
*
섬의 중심부로 다가갈수록.
라이가는 깊은 수렁에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 무엇이냐, 이것들은.”
널브러진 덩어리는 천마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태어나지 않은 존재는 폭사했고,
별 부수는 자는 상반신이 없었으며,
무덤의 주인은 조각조각 난 채 고장난 듯 움직이지 않았다.
‘폭풍의 배율자는 태어나지 않은 존재에게 먹혔었나.’
소화가 되던 와중 폭사하여 함께 덩어리가 됐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현장.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게다가······.
‘천축의 고래와 가라앉은 황제. 둘은 함께 공멸했다.’
둘 다 시체가 됐다.
다만, 다른 시체들과 다른 점은 둘이 싸우며 상대방과 함께 죽었다는 것,
둘은 왜 부딪혔을까?
왜 이런 상황이 된 거지?
라이가는 진심으로 가라앉은 황제가 제국의 황제가 아니길 빌었다.
‘나를 제외하곤 전부 끝났군.’
어이가 없었다.
별의 감옥에 이감되고 고작 하루다.
하루가 지났을 뿐이다.
그 하루 사이에 모든 게 결판이 나버렸다.
만약 감옥에 이감되지 않았다면 자신 역시도 이 시체의 무리에 속해 있었을는지.
이보다 경악스러운 광경을, 라이가는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라이가는 표정을 굳혔다.
그래서 더욱 빠르게 발을 옮겨 섬의 중심부로 향했다.
이윽고 섬의 중심부에 도착했을 때.
그 중심부에 선 자의 얼굴을 보며 라이가는 단말마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넌······!”
*
-결과의 부정?
-끝을 거부한다고?
-그럼 모두 잃을 것이다.
-네가 얻은 힘도, 이자벨라의 기억도, 이 승리 자체도!
-전부 사라질 것이다!
안다.
알고 있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의 결과를.
나는 모든걸 무(無)로 되돌릴 생각이었다.
“확실히 심연은 심연이로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어.”
작게 미소지어보였다.
처음 심연에 발을 들일 때부터 각오한 일이다.
이곳에선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있으니까.
무엇을 상상하든 항상 그 이상의 일이 일어나는 곳이니까.
“란돌프. 너는 나의 다른 면이다. 오로지 판게니아에만 집중할 때의 내 모습. 현실을 버렸을 때의 미래.”
인정했다.
너의 모습은 나의 다른 면모일 뿐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깨달았다.
레벨 10.
어쩌면 그 이상에 다다른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바로 지금의 모습이라는 걸.
현재의 나는 불균형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의 박현명과, 판게니아의 란돌프는 균형이 맞지 않는다.
하여, 레벨 10에 도달할 수 없다.
더 강해질 수 없다.
박현명을 버리자 비로소 균형이 맞춰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부정한다.
“아무것도 버리지 않을 거다, 나는.”
이자벨라가 알려줬으니까.
현실의 소중함을.
내 이름을, 존재를, 나의 모든 것을.
더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박현명도, 란돌프도, 빌헬름도, 이자벨라도.”
이름을 부른다.
이름은 곧 존재다.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나와 관계된 모든 것들을, 나는 무엇 하나 놓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무엇 하나 놓지 않으리라.
-궤변이다!
-무(無)로 되돌린다는 건 네가 얻은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말이지 않느냐.
-전부 포기하고, 이자벨라만 얻겠다는 말이지 않느냐!
-설령 전부 포기한들 이자벨라는 부활하지 않아!
-소멸한 존재를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다. 이미 사라져 없단 말이다!
또 다른 ‘나’가 반박했다.
전부 포기해도 원하는 걸 얻지 못할 가능성.
“‘문’의 저편으로 모습을 감췄을 뿐이다.”
허나 나는 보았다.
진리의 문.
그 너머를.
아직, 소멸하지 않았다.
섬의 게임이 종료될 때까지 그저 ‘문’의 뒤편에 있을 뿐이었다.
게임이 완전하게 종료되어야만 비로소 소멸하는 게다.
그러니, 게임이 종료되기 전에, 게임을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드려는 것이었다.
-‘문’의 저편에 있는 것을 데려오겠다고?
-그 역시 불가능하다!
-‘문’을 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야!
-만에 하나 데려온들 그게 ‘이자벨라’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문’에 대해서 너는 아무것도 알지 못해!
-어리석고 아둔한 놈······!
-이런 식이면 절대로 판게니아를 구원할 수 없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정답 역시 아니었다.
현실의 박현명을 포기하자, 머리가 둔해진 걸까.
하지만 판게니아를 플레이하는 현실의 박현명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움직인다.
‘진리의 문.’
바로 지금의 나.
나는 다시금 그 문을 열었다.
【드디어 ‘문’에 바라는 게 생겼나?】
무엇을 바라느냐.
무엇을 내놓겠느냐.
입은 말하고 있었다.
이자벨라를 바란다고 한다면, 놈은 내 모든걸 빼앗아갈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걸 말하길 기대하고 있다.
역시나 진리의 문은 오로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바라는 게 있는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나를 빼앗아가는 존재였다.
“이 ‘문’을 대가로 이자벨라를 데려올 것이다.”
【······.】
“영원군주 란돌프의 문. 이 정도면 충분히 데려올 수 있겠지.”
순간 답이 없었다.
허나 나는 알고 있다.
모든 히든 특성은 ‘문’이다.
진리이며, 하나의 완성이었다.
나는 지금 ‘영원군주 란돌프’의 히든 특성을 포기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 정도 대가라면 충분할 터.
【··· 너 같은 인간은 처음보는군.】
진리는 말했다.
자신의 완성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구하려는 인간.
이런 인간은 실로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단순한 희생정신 그 이상이다.
생명을 넘어선 영혼의 규격마저 버리겠다는 뜻이었으니.
“할 수 있나?”
【······ 이것은 어차피 너의 ‘문’이다. 네 마음대로 해라.】
그 말을 끝으로 김이 샜다는 듯 ‘입’은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편히 웃어보일 수 있었다.
콰릉!
콰르르릉!
섬 전체에 벼락이 친다.
모든 것들이 하나, 둘, 제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멍청한 놈!
-영원군주의 진정한 능력은 결과의 부정. 즉, ‘모든 보상의 무효’다.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지고의 권능!
-영원군주가 멸망으로부터 이 섬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
-보아라. 이게 그 결과다. 비록 지켰으나, 이 섬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신의 섬.
심연에서 몇 안 되는 오염되지 않은 땅.
먼 과거, 멸망으로부터 ‘영원군주’는 이 땅을 지켜냈다.
권능을 발현하여 땅과 함께 종족 보존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영원군주 자체는,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결국 모두와 함께 스러졌을뿐.
영원군주의 권능은 결국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게 만드는 능력이었다.
-이 결과가 무엇을 뜻하는지 진정 모르겠느냐?
-천마신공도, 이자벨라가 너에 대해 떠올린 모든 기억도, 감정도 전부 사라진다. 그뿐이냐? 기껏 쓰러트린 다른 심연의 괴물들도 죄다 부활한단 말이다!
-영원군주의 능력마저 잃은 네가 저 괴물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나를 잃은 네가, 혼자서 모든 걸 처리할 수 있을까?
또 다른 ‘나’는 한껏 비웃었다.
지금 내 선택이 가져올 미래가 뻔히 보인다는 듯이.
먼 과거 이 땅을 지켰던 영원군주처럼 말이다.
이자벨라를 되살렸으나, 그 외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였다.
허나 괜찮다.
-나는······ 나는 존재한다.
-네가 모든걸 포기하는 순간······ 다시 나타날 것이다!
-문의 저편에서······ 아아!
······ 더 이상의 잡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느덧, 내가 서있는 공간도 달라졌다.
더 이상 이곳은 신의 섬이 아니었다.
텅 빈 공간.
끝없이 이어지는 대해와도 같은 곳.
처음 심연에 발을 들였을 때 도착한 장소.
‘문.’
내 앞에는 문이 있었다.
말 그대로 ‘문’이었다.
열고, 닫는 문(門).
두 개의 문은 닫혀있는 상태였다.
《모든 조건을 만족하여 ‘별 찾기’가 시작됩니다.》
《참가를 원하는 분은 오른쪽 ‘문’으로, 원하지 않은 분은 왼쪽 ‘문’으로 입장하십시오.》
《현재 참가자 - ‘라이가’, ‘폭풍의 배율자’, ‘무덤의 주인’, ‘가라앉은 황제’, ‘별 부수는 자’, ‘태어나지 않은 존재’, ‘천축의 고래’, ‘천마’》
모든 게 처음의 그대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참가를 위한 오른쪽 문이 열리며.
“··· 음? 란돌프님?”
그리운 얼굴이 나타났다.
나는 나지막히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 이자벨라.”
“이, 이게 어떻게 된······.”
이자벨라는 당황하고 있었다.
왜 자신이 문을 열고 나온 건지 알 수가 없다는 듯이.
나는 천천히 이자벨라의 손을 잡았다.
“괜찮다.”
“괜찮······ 습니까?”
“그래, 전부 괜찮아질 거다.”
진정으로 괜찮다.
영원토록 나를 갈망하지 않아도.
다시금 나를 오해하고, 원망하더라도.
이제는 흔들릴 일이 없을 테니까.
“가지.”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왼쪽 문.”
“신의 섬을··· 포기하겠다는 말씀입니까?”
“아아.”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열지 않았던 왼쪽 문을 열었다.
더 이상 이 게임의 참가를 원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전부 얻었으니까.
한 치의 미련없이 왼쪽의 문으로 발을 들이자.
《‘메인 퀘스트 11 - 심연 괴물 사냥’이 완료되었습니다.》
《‘폭풍의 배율자’, ‘무덤의 주인’, ‘가라앉은 황제’, ‘별 부수는 자’, ‘태어나지 않은 존재’, ‘천축의 고래’, ‘천마’, ‘신의 살갗 혼종’을 사냥했습니다.》
《‘영원의 수도자(영원군주)’에게로 전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