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게임
느닷없이 자신의 정체를 밝힌 밤의 악령.
스스로를 ‘이자벨라’라고 말한 악령의 신형이 점차 흐려져간다.
‘왜?’
란돌프는 순간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일시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자벨라.
악령의 어둠을 벗고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기억속의 모습과 같았다.
란돌프를 믿고 따르는 충직한 부하.
수많은 시련 속에서 더욱 단단해진 자아를 지닌 자.
모든 기억의 시작과 함께한 란돌프의 증명과도 같은 존재!
하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건 란돌프가 아니다.
“지금, 누구를 보고 있는 것이냐······?”
“······.”
이자벨라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의 이름을 불렀는지는 알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삭제되어 지워진 이름.
왜인지 강렬하게 반발심이 생기는 세 글자.
무엇보다도.
“··· 지워야 완성된다고 했다. 오롯이 완전해진다고 하였다! 그 이름은 가짜이고 족쇄이며 오점과도 같은 것이 분명하거늘. 어째서 너는 그 이름을 위해 몸을 던지는 거지?”
그 ‘이름’은 지워야만 했다.
이름이란 이름의 족쇄.
그 족쇄를 푼 지금, 란돌프는 자유를 느끼고 있었다.
모든 한계를 뚫고 넘어선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러할진대, 왜 이 여자는 자신이 아닌 지워진 존재를 위해 소멸을 택했는가.
도저히······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다. 나를 보아라! 내가 란돌프다. 너도 보았지 않느냐. 천마를 압도적인 능력으로 꺾은 것을! 지금의 내가 아니라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이다!”
빠드득!
이를 갈고, 입술을 깨물며, 몸서리를 쳤다.
“놈은 가짜다. 진심 없이 그저 오락으로 누군가를 파멸시키는 폐인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영웅이 아니다. 하나도 고귀하지도, 고결하지도 않아······!”
“······ 당신은.”
천천히, 사라져가는 와중에.
불과 같은 열변을 듣고 있던 이자벨라가 눈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수백, 수천번 실패를 거듭해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아, 당연하다마다. 이자벨라, 너는 나의 것이다. 너를 위해서라면!”
“저를 위해 죽을 수 있습니까?”
“······.”
죽어달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가.
논점을 알 수가 없다.
이미 소멸되어가는 와중에 자신을 위해 죽어줄 수 있냐니.
그러자 이자벨라가 얇은 미소를 띠었다.
‘역시 달라.’
그와 이 남자는.
같을 수가 없다.
본질 자체가 너무나도 달랐으므로.
그는 자신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측은지심을 느낀다.
상대의 마음을 열고자 무작정 뛰어드는 사람이다.
하물며 실제의 자신이 죽을지라 할지라도 결코 망설이는 법이 없다.
“나를 위해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목숨마저도 가볍게 던지는 사람을, 어찌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어떻게 그를 중오할 수가 있겠는가.
왜, 자신은 그를 원망했을까.
한평생 갈망해온 나의 구원자를.
아무리 몰랐다고는 하나, 기억하지 못했다고는 하나.
그래선 안 되었다.
자신이 원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그녀의 앞에서 항상 평정심을 지켰다.
웃어보였고, 다독여주었고, 나아갈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얼마나 두려웠을까.
언제고 진실을 들켜서 모두가 돌아설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단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으리라.
그럼에도 자신을 찾고, 아이작을 찾고, 발테를 찾고······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속죄하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불쌍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여기서 사라진다 할지라도, 잊지 않을게요.
그대의 이름을, 따스함을.
그러니 더 이상 마음 졸이지 말기를.
더 이상 나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기를.
“······.”
조용히 마지막 말을 남긴 채로, 이자벨라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졌다.
【정체가 밝혀진 ‘밤의 악령’이 소멸합니다.】
【‘밤의 악령’이 갖고 있던 ‘가장 소중한 것’이 양도됩니다.】
【‘구릿빛 동전’, ‘박현명의 영혼’이 양도되었습니다.】
【공격력과 체력이 50씩 상승합니다.】
【남은 ‘밤의 악령’은 둘입니다.】
【모든 밤의 악령을 소멸시키면 ‘밤’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밤의 악령을 ‘별빛 원정’에서 패배해도 소멸합니다.】
사라졌다.
단 한 치의 남김 없이.
완전하게 소멸한 것이다.
“······.”
밤의 악령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되찾는 방법은 없다.
악령을 소멸시키는 걸 제외하곤.
이자벨라는 스스로 소멸을 택해, 강제로 떠넘긴 것이다.
“나는······ 거부한다.”
떠오른다.
그의 기억이.
잊고 있던 것들이.
하지만 란돌프는 머리를 부여잡고 마구 저어댔다.
그리곤 바닥에 쓰러진 채 고통에 몸부림치며, 심장을 쥐어 짜내듯이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거부··· 한다, 박현명!”
“그게 뭐지?”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
······ 천마.
놈이 죽지 않고 살아났다.
“이제야 진정으로 살아가는 기분이다. 진정으로 ‘인간’을 버린 기분이야. 이게 진짜 ‘파편’의 힘이로군!”
다만, 상태는 많이 달라졌다.
누가 봐도 인간이 아니었다.
거구의 근육질 몸.
새까맣고 울퉁불퉁 튀어나온, 마치 거북이 등껍질 같은 외피.
얼굴은 코뿔소마냥 변해버렸다.
······ 맞다.
저것도 멸망의 파편이 일으킨 버그다.
그리고 그는 아직, 파편의 버그를 이겨낼 방법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 수백, 수천번 박살내면 더 기어오르지 못하겠지.”
박살내주마.
가로 막는 모든 것들을.
발목을 잡는 모든 이름을.
··· 나는 차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더 이상 머리가 아프지 않았으니까.
*
영웅을 동경했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만화나 영화 등에서 등장하는 히어로들을 닮고 싶었다.
하지만, 영웅이 될 수 없었다.
그러기에 현실은 너무 각박했으니까.
게다가 내 성격도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반 소시민.
방구석 폐인.
혹은 찌질남.
뭐라 불려도 좋은 점은 없는 그냥 남자.
하지만 게임에서의 나는 많은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때로는 악당이 되기도 하고, 상인이 되거나, 마법사가 되거나, 귀족이 되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중 하나인 ‘기사왕 빌헬름’에 나는 가장 심취했었다.
-오빠, 우리 헤어지자.
알고 있다.
내가 차인 이유가 단순히 대기업을 안다녀서가 아니라는 걸.
본질적인 이유는 내가 너무나도 게임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저 구실이 필요했던 것이다.
게임을 할 구실.
오롯이 판게니아에만 집중할 수 있는 구실이.
회사를 그만둔 것도 그런 이유였다.
평범한 사람인척 했지만, 보통조차도 될 수 없는 형편없는 남자.
그게 나, 박현명이라는 사람이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최악의 게임 폐인 말이다.
‘나는 란돌프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욱 현실을 외면했다.
판게니아의 나는 항상 최고였다.
명예의 전당에서 1등을 놓친 적 없는 최강의 사나이.
모든 시련을 정면에서 부숴버리며, 언제나 모두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결과를 도출해내는 기적 그 자체의 존재.
그 쾌감, 그 달성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조금씩 현실과 판게니아의 경계가 애매모호해져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로그아웃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를 봐주는 사람은 없으니까.
박현명이라는 남자를 기억하고, 알아주는 사람은, 어느 세계에도 없으니까.
‘가라앉는군.’
이곳은 어둠이다.
끝없이 가라앉는 종말.
춥고, 외로운 박현명의 세계.
애초에 ‘박현명’이라는 자는 누구일까?
진짜로 존재하긴 한 걸까?
이대로 사라져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터인데.
그래. 사라지자.
-잊지 않을게요.
그때였다.
목소리가 들렸다.
이자벨라의 목소리였다.
-당신은 고귀한 인간성, 고결한 도전정신을 가진 남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그런 거창한 걸 갖고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방구석 폐인일 뿐인데.
이자벨라, 너는 속은 거다.
-돌아오세요, 그리고······ 고마워요.
뭐 하는 거지?
소멸할 거다.
그런데 대체 누구를 위해서 자신을 던진 걸까.
설마 나를 위해서?
-초월하며 당신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원망했습니다. 죽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습니다. 왜 제가 당신의 이름을 알게 된 건지.
··· 그만둬라.
나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 아니다.
-저는 영원토록 당신을 갈망합니다, 박현명.
이윽고 사라졌다.
마치 연기처럼.
더이상 이 세계에 이자벨라는 없었다.
이자벨라는 내 이름을 부르며 소멸했다.
······ 유일하게 내 이름을 불러준, 나를 보아준.
젠장할.
나를 불러놓고, 혼자 어딜 가는 거냐.
이자벨라가 담았던 이름을 다시 상기해본다.
······ 그래.
나는 란돌프가 아니다.
이대로 내가 사라져버리면, 가라앉아버리면, 스스로를 내던진 이자벨라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럴 순 없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비켜라.
거긴 처음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나의 자리이니.
너는 나의 증명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니다.
나는 나다.
“······ 나는 박현명이다.”
박현명이다.
*
란돌프는 신의 섬, 그 중앙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별의 원정’이 끝났습니다!】
【모든 원정에서 승리했습니다!】
【승리자는 ‘끔찍한 흉조’입니다.】
떠오른 글귀들.
마침내 모든 것이 마무리 되었으니.
【모든 기억이 모이며 하나로 합쳐집니다.】
【모든 기억의 위에 올라서며 ‘신의 섬’과 ‘거룩한 별’의 주인이 되십시오.】
끝났다.
막아서는 모든 것들을 부숴버렸다.
박현명이라면 이렇게 쉽게 끝내진 못했겠지.
놈은 자신을 따라올 수 없다.
당연히 놈에게 미래를 맡길 수도 없엇다.
이제 남은 건 하나.
이 섬의 주인이 되고, 다시금 자신을 괴롭히는 이름을 지우는 것.
‘너를 영원토록 지워주마.’
이 기억들을 한데 모아 영원히 소멸시킬 테다.
란돌프는 섬의 중심부에 섰다.
이 섬의 주인이 되었음을 공표할 시간.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는 거부한다.”
······ 한데, 멋대로 다른 말이 새어나왔다.
입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자신의 의도가 아닌 전혀 다른 내용이.
뭐지?
설마······!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린다.
가소로웠으니까.
모든걸 쥐어짜내 겨우 입만 움직이는 주제에 뭘 거부한다는 거냐?
어차피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엇 하나 나보다 나은 게 없는 놈이 이제와서 튀어나온들 뭘 바꿀 수 있겠나.
패배자는 얌전히 사라지면 된다.
어차피 게임은 끝났다.
섬의 주인이 되는 것 외에 달리 무슨 수가 있다는 건지.
“이 게임의 끝을.”
······ 그게 무슨.
게임이 끝난 것을 거부한다고?
이미 끝난 게임을 대체 어떻게 거부한다는 말인가!
새로 시작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이미 지난 것을 없던 것으로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모든 결과를 처음으로 되돌릴 것이다.”
그 순간.
화아아악!
뭉쳐있던 기억들이 흩어진다.
가장 소중한 것들이 다시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란돌프는 박현명의 의지를 눈치챘다.
경악하며 외쳤다.
그만.
그만 둬라.
이 이상은 너도 무사하지 못할 터!
“··· 이것이 영원군주의 의지이니.”
진정한 엔드게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