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명이라는 남자
“···진짜 개 X망겜이네.”
어두컴컴한 방.
남자, 박현명은 미간을 잔뜩 구긴 채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에 비춘 ‘Game Over’라는 문구는 너무 자주 봐서 이젠 별 감흥도 없을 지경.
“앤드류 개새끼.”
문제는 앤드류 사제다.
발란 왕국 ‘도시의 정원’에서 선행을 펼치는 구호소의 사제.
명예를 올려주는 퀘스트를 다수 던져주기에 ‘명예작’을 하려는 사람에겐 필수코스와도 같은 NPC!
대부분이 단순 노동을 요구하는 반복 퀘스트지만, 퀘스트 완료 회수가 300회를 넘어가는 시점부터 조금씩 내용이 달라진다.
‘난이도가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야?’
내용이 달라지고, 난이도가 올라가는데, 보상은 그대로다.
그래서 필요한 명예 수치만 맞추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야 하는 대표적인 NPC로도 악명이 높았다.
몇몇 게이머는 ‘숨겨진 퀘스트’가 있을 것으로 보고 도전했지만, 밑도 끝도 없이 올라가는 난이도와 쥐꼬리 같은 보상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시간낭비, 돈 낭비야. 그냥 사람 골려먹기 좋아하는 NPC가 분명해. 저런 NPC가 판게니아에 한, 둘이던가?
한 번 죽으면 캐릭터가 삭제되는 게임.
쓸데없는 데에 시간을 낭비할 순 없으니 더 이상 도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명.
박현명을 제외하고.
“아, 씨. 분명 연계 퀘스트인데 이거.”
머리를 박박 긁었다.
박현명이 앤드류 사제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걸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숨겨둔 딸이 있잖아. 구하고 싶잖아. 그런데 왜 부탁을 안 하는 건데?”
엘드리치가 된 안다사르.
앤드류 사제의 숨겨둔 딸이 어디 있는지 우연찮게 파악했다.
오염된 땅에 봉인된 채였는데, 그 봉인을 풀고 정화를 하기 위해선 앤드류 사제의 조력이 필요한 상황.
하지만 수백 회의 반복 퀘를 완료해도 앤드류 사제는 딸에 대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혹시나 숨겨진 조건이 있을까 싶어서 별의별 기행을 다 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엘드리치의 저주받은 흑마법서》······ 그게 없으면 유일급 제작을 못하는데.”
안다사르를 정화해야만 얻을 수 있는 유일급 장비의 재료 아이템.
분명히 그 열쇠를 앤드류 사제가 쥐고 있다.
하지만 앤드류 사제는 도무지 마음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누락되거나, 아직 업데이트가 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앤드류 사제에겐 열쇠가 없을지도 모른다.
“······ 자기 자신이 명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진정으로 명예로운 자가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퀘스트들을 던져주는 거 아니었냐고.”
그러나 박현명의 생각은 달랐다.
리치가 된 딸을 둔 성직자.
파면되어야 마땅한 그가 아직도 구호소에서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건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을 구원하지만, 정작 자기자신만은 구원받지 못하는 자.
스스로를 불명예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바로 앤드류 사제였다.
이보다 불행한 자가 또 있을까.
······ 실로 불쌍하기 짝이 없다.
‘내가 구한다.’
그래서 구해주고 싶었다.
앤드류 사제를 해방시켜주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NPC에게 ‘무슨 마음이 있느냐’고 비웃을 수도 있을 테지만.
어느 순간부터 박현명은 게임 그 이상으로 판게니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이 게임 자체를, 구원하고 싶노라고.
비록 현실에선 평범한 사람1에 불과하나, 이곳 판게니아에서 박현명은 기사왕이었다.
명예를 중요시하고, 악을 물리치며, 사람들을 구원하는.
“천 번으로 부족하면 만 번. 만 번으로 부족하면······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지, 뭐.”
결국 답이 없음을 깨닫고 정곡법을 택했다.
그렇게 빌헬름으로 로그인한 뒤, 대략 삼천 번쯤 반복 퀘스트를 해결하자, 질려버린 앤드류 사제는 깊숙하게 숨겨둔 자신의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
스쳐지나간다.
이자벨라의 곁으로, 수많은 ‘박현명’의 기억이.
셀 수 없이 많은 죽음, 구원, 그리고 서사.
그녀가 본 박현명은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
가히 광기라고 봐도 좋을 만큼.
그 정점 중 하나가 바로 앤드류 사제의 이야기였다.
오랜 세월 동안 아무도 열지 못했던 그의 마음을, 박현명은 기어코 열어버리고 말았다.
끝없이 반복되는 시련과 수많은 죽음의 위기를 넘어가며 마침내 도달한 것이다.
과연 그녀라면 해낼 수 있었을까.
‘못해.’
···못한다.
단언하건대 그 누구도 못할 것이다.
박현명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일.
박현명이 아니었다면 앤드류 사제는 죽을 때까지 자기자신을 혐오했을 터.
‘이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
더욱이 놀라운 건, 이건 정말 수많은 도전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이었다.
또 다른 기억들이 떠오른다.
이자벨라는 그중 하나를 끄집어냈다.
‘아이작.’
바로 ‘뇌절사기꾼 아이작’의 이야기.
수많은 악업과 살생을 저지른 악당의 이야기를.
*
“뭐야, 여긴? 스타팅포인트가 왜 이따구야?”
박현명은 대뜸 쓴소리를 늘어놓았다.
캐릭터를 생성하고, 스타팅포인트만 무작위로 설정했을 뿐인데 너무나도 예상 외의 장소에서 시작된 탓이다.
“이름없는 노예광산? 규모가 생각보다 큰데?”
맵(Map)을 이리저리 돌며 확인한 박현명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헐벗은 NPC가 곡괭이를 들고 광맥을 캐고 있다.
한데, 노예를 부리는 자들은 모두 무장한 정규군이다.
“탈출이 쉽지 않겠는걸······.”
메인퀘스트 1, 생존.
메인퀘스트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모든 캐릭터는 생성하는 순간 ‘생존’의 퀘스트를 부여받으며, 대부분이 극악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래서 실제 생존률은 절반도 안 된다던가.
시작부터 압도적인 죽음을 겪게 만드는 말도 안 되는 게임.
그러나 박현명은 생존의 베테랑이었다.
그가 만든 캐릭터는 메인퀘스트1에서의 생존률이 99%에 육박했으므로.
뚜둑. 뚜두둑!
깍지를 껴고 손을 풀었다.
목을 좌우로 꺾으며 제대로 퀘스트에 임했다.
뾰족하게 갈은 돌로 정규군을 습격하고, 미리 파악한 최단의 루트로 광산을 뚫는다.
중간중간 세 번쯤 죽을 위기를 맞이했지만 극에 다른 컨트롤로 모두 극복해냈다.
이어 정규군의 옷으로 갈아입은 뒤 무사히 광산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지도에 없는 숨겨진 ‘광산 도시’였구나. 어쩐지 처음보는 것 같더라니.”
탈출에 성공한 다음에야 광산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판게니아엔 이러한 숨겨진 도시들이 몇 곳 있다.
이곳 ‘광산 도시’ 역시 그중 하나.
보아하니 강제로 사람들을 납치해, 가둬놓고 노역시키는 곳인 듯싶었다.
“··· 와, 여기 대박이네.”
도시의 실상을 알아낼수록 감탄을 금치못했다.
부패의 온상과도 같은 곳.
부패한 여신교의 사제들이나, 여러 나라의 다수 귀족들이 손을 대고 있다.
눈을 감아주는 대가로 광산에서 나오는 보물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장소들이 판게니아에 없는 건 아니지만, 그간 본 곳 중에 탑 오브 탑이었다.
“재밌네.”
마침 잘됐다.
이번 캐릭터는 어차피 ‘악업’의 용도로 사용하려 했으니까.
운영자가 진짜로 게임을 운영하고 있다면, 도시 하나가 쌩으로 매몰될 경우엔 나설 수밖에 없으리라.
특히 이 정도 규모의 도시라면······ 관련된 이권도 수없이 많을 테니, 하다못해 공지사항 하나라도 올라오지 않겠는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광산을 매몰시켜 이 거대한 악의 도시를 증발시킬 계획이.
차근차근 밑에서부터 관련자들을 족치고, 죽이고, 뜯어먹으며, 기어코 광산 도시를 매몰시켰다.
그 덕분에 노예들은 해방되었지만, 광산과 관련된 권력있는 자들은 사방에서 ‘아이작’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적이 너무 많아졌다.
최상급 외형 변형 물약이라도 있지 않은 이상 죽음은 확정된 일.
“······ 진짜 X망겜인가.”
그런데도 공지사항 하나 올라오지 않았다.
고개를 저으며 안전지대에서 로그아웃을 했다.
그리고 박현명이 아이작으로 다시 로그인할 일은 없었다.
이후 요괴도시 크람델에서 재회하기 전까진, 당연히 만날 일도 없었다.
*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아이작을 움직인 박현명의 기억.
신병에 걸린 아이작은 박현명이 조종할 동안 기억을 잃었다.
이후 다시 정신이 돌아왔을 땐 자신도 모르게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크람델까지 흘러들어갔다.
‘만약 신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아이작은.
그 지옥과도 같은 광산에서.
뿐만인가.
그 지옥과도 같은 광산은 지금까지도 운영되고 있었겠지.
‘아이작만이 아니야.’
······ 이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병에 걸린 자들.
그리하여 박현명이 조종했던 사람들.
그들의 상황은 모두 한결같이 최악이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답이 없는 상황에서, 죽음이 확정된 상황에서 시작됐다.
그야말로 ‘생존’이 필요한 상황 말이다.
하지만 신병은 운이 나빠서 걸리는 게 아니었던가?
아니면 특정한 조건 하에 선정되는 건지.
예컨대 죽음의 기로에 선 사람.
그러나 그렇게 타이밍 좋게 죽을 기로에 선 사람들만 신병에 걸리는 것도 이상하다.
‘··· 자신의 죽음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제 곧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극악의 상황,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신병에 걸렸다.
‘그럼, 나도······.’
만약 그러한 전제라면 자신 역시도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는 것일 터.
그러나 이자벨라는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 신병에 걸린 당시의 기억이 여전히 지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데르시안 가문.
그곳에서 신병에 걸려, 사막도시인 파이살메르로 흘러들어간 건 분명할진대.
제국 거대 가문의 영애인 그녀가 그곳에서 죽을 위기를 겪었다?
말이 되나?
“아······.”
순간 머리가 아팠다.
송곳으로 뚫리는 것만 같은 고통.
그리고 머지않아, 또 다른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그건 바로 자신의 기억.
박현명에 의한 기억이 아닌,
잊고있던 이자벨라 폰 데르시안의 기억이었다.
*
숨막히는 곳이다.
이곳, 데르시안 가문은.
어린 시절, 의식을 자각한 순간부터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메리. 난 언제 죽어?”
어느날, 이자벨라는 자신을 돌봐주는 하녀 메리에게 말했다.
그러자 옷소매를 정리해주던 여인 메리는 눈을 크게 뜨며 기겁했다.
“영애님. 그게 무슨 소리세요. 영애님이 왜 죽어요?”
“난 다 알고있어. 내가 아홉 번째 복제품인 것도.”
“··· 아니에요, 그런 거. 이자벨라님은 절대로 안 죽어요.”
“아니야. 올해가 지나기 전에 나는 폐기될 거야. 아니면 다른 복제들처럼 ‘파이살메르’에 팔려가던가.”
“······.”
“역시 메리도 알고 있었구나?”
“이자벨라님······!”
메리의 두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절대로 알아선 안 되는 것을, 이자벨라가 알고 있었기에.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 끝은 폐기뿐이다.
“사막도시 파이살메르에 내 동생들이 있는 거지? 사막여왕에게 팔려가는 거잖아. 동생들도, 나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요르문간드’를 각성할 수도 있으니까······.”
“쉿! 제발 조용하세요. 저는 아무 것도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사색이 된 메리가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그날 이후, 다시는 메리를 볼 수 없었다.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 가문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다.
자신이 누군가의 복제품이라는 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었으니 곧 폐기되거나, 사막도시에 버려질 것이라는 사실을.
이자벨라는 텅 빈 창밖에서 날아다니는 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언제 죽을까?”
그냥 알고 싶을 뿐이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그때였다.
날아다니던 파랑새 한 마리가 방향을 틀더니, 창가에 앉은 것이다.
퍽 신기하긴 하지만 이자벨라는 별 감흥없이 물었다.
“넌 알고 있니?”
“살고싶어?”
“응······?”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새가 말을 하다니!
하지만 잘못 들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새가 계속해서 지저겼다.
“모든 걸 잊고, 잃어도, 한 가지 소원을 이룰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도전해보고 싶지 않아?”
“넌··· 뭐야? 새가 어떻게 말을 해?”
“나는 이 세계의 운영자. 어차피 이 순간이 지나면 너는 나와 만난 걸 기억하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선택하렴. 이대로 죽음을 받아들일지, 소원을 이루기 위해 부나방처럼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