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특성 13개 들고 시작한다-244화 (244/317)

소멸(消滅)

기분이 좋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해방감. 

그건 바로 ‘자유’라는 이름의 해소였다. 

‘영원군주의 별빛.’ 

이후 감옥에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나를 인도한 밤의 악령. 

밤의 악령을 따라가니 이윽고 ‘영원군주의 별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 본 즉시 알았다. 

이 별빛은 단순히 공격력과 체력만을 올려주는 도구가 아니라고. 

기억이고, 영혼이다. 

덕분에 확실해졌다. 

신의 살갗 혼종이 왜 이런 판을 짜놓았는지. 

‘완전한 존재를 갈망하는군.’ 

보다 완전해진 존재가 섬의 주인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모든 별빛과 기억들을 흡수하여 오롯이 하나가 되기를. 

기억 자체가 재능이기 때문이다. 

기억이 재능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수도 있겠으나. 

‘내가 빌헬름의 기억으로 검을 휘두른 것과 같은 이치다.’ 

육체의 강인함, 정신의 순수함, 영혼의 깊이. 

그 모든 것의 상위에 있는 재능은 결국 기억이다. 

성공한 자의 기억, 정점을 찍었던 절대자의 기억, 꿈을 이룬 자의 기억······ 그것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최단시간에 원하는 걸 이룩할 수 있을 터이니. 

그러니, 기억이란 만능의 무기인 셈이다. 

바로 지금처럼. 

‘천마도의 악신. 초대천마의 기억.’ 

나는 분명히 천마도의 기억을 읽었다. 

악신, 초대천마의 일대기를 보았다. 

인간임을 포기하였으나 고금을 통틀어 적수가 존재하지 않았던 절대지존. 

그의 움직임, 그의 생각, 그의 모든 것들을. 

나는 보고, 체감하며, 느꼈다. 

허나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감각이다. 

초대천마의 정서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 딱 좋았다. 

‘이건······ 좋군.’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인간에 한한 이야기.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면,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는 백지와도 같은 자가 존재한다면······ 당연히 과정과 결과도 달라지는 법. 

‘완전무결한 존재를 바란다고 했느냐?’ 

영원의 수도자. 

그는 버리라고 했다. 

떠오르지 않는 이름을. 

그리고 완성되라고 하였다. 

모든 미련을 잊고, 오로지 완성만을 추구하라고. 

그게 무슨 뜻이겠나. 

‘군주는 감정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지 마라. 

일체의 감정을 버려라. 

그러한 것들에 미련을 둔다는 건 그 자체로 한계를 둔다는 말과 같은 게다. 

‘빌헬름의 검술에는 감정이 있다. 그러나 초대천마의 검술에는 감정이 없다.’ 

고로, 더욱 완성되어 있는 건 초대천마의 검술이다. 

천마신공 그 자체였다. 

빌헬름보다, 초대천마가 더 뛰어나다. 

그래서 나는 모든 걸 바꾸었다. 

자세와 태도, 숨결 하나까지도. 

초대천마 그 자체를 받아들였다. 

기억을 지배하고, 무결점의 존재가 되었다. 

‘오호라.’ 

그 외의 필요없는 모든 것을 버리며 배제하자 이상하리만큼 몸이 가벼워졌다. 

이런 것이었나. 

완전해진다는 기분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미소지었다. 

“······ 기분이 좋다. 아주.” 

부르르르! 

천마도가 한 차례 떨렸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몸이 떨린 걸지도 모른다. 

‘뭐지?’ 

찢어죽이려고 다짐했건만, 찰나의 변화에 천마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끔찍한 흉조. 

놈의 기세가 단번에 아예 다른 존재마냥 변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이름 이상으로 흉흉한 기세를 흘려댔다. 

왠지 익숙하기 그지 없는······. 

더없이 패도적인 내력. 

“나를······ 흉내내는 게냐?” 

어이가 없다. 

이건 분명히 자신의 기세다. 

역대의 천마들 모두가 가졌던 그 기세를, 오로지 천마만이 나타낼 수 있는 만인지상의 기운을 어찌 흉조 따위가 흉내낸단 말인가. 

쿠릉! 

천마가 이를 갈며 내공을 일으켰다. 

콰릉! 콰드드득! 

동시에 천마의 주변반경 수십미터가 움푹 파였다. 

내공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지형지물이 변한다. 

이전과도 비교가 안 되는 압도적인 내력. 

시간을 끌 것도 없다. 

단번에 놈을 압살할 생각이다. 

쉬익! 

발을 지면에 디뎠다고 생각한 순간 천마의 신형은 어느덧 흉조의 앞에 있었다. 

벼락같이 뻗어낸 검. 

인식조차 할 수 없는 순간에 목을 베어 끝낼 작정이었다. 

콰칭! 

허나, 튕겨나간다. 

‘내 검을, 받아냈다?’ 

당연히 막지 못하리라 확신했건만. 

뿐만이 아니다. 

검의 끝에서 거칠게 느껴지는 반발력. 

이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나의 내공을 정면에서 받아치고 있다고?’ 

내력과 내력의 대결. 

이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무언가를 흉내낼 수는 있어도 내력은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영역이다. 

천마신공을 익혔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성취에 미칠 리가 없다. 

그런데. 

그러할진대······. 

천마는 자신의 검을 받아낸 흉조의 눈을 바라보았다. 

흔들림없이 고요하기 짝이 없는 눈. 

그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짙은 흥미! 

‘오냐. 어디까지 받아낼 수 있는지 보마.’ 

천마는 내공을 더 끌어올렸다. 

설령 놈이 진짜 멸망이라 한들 자신의 내력만큼은 따라올 수 없으리라. 

겁을 먹은 듯 반응하지 않던 천마도도, 어느덧 그의 내력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단순 내력의 대결이라면 절대로 지지 않는다. 

꽈릉! 

광대한 기운이 부딪히자 주변으로 거대한 원을 만들며 계속해서 파여갔다. 

콰직! 콰지직! 

섬 전체가 흔들리고 가까이에 있는 모든 것들이 눈깜빡할 사이에 잘게 부서져 사라졌다.

구아아아아아- 

그건 마치 무언가의 비명소리 같았다. 

이어 둘의 기운이 부딪히며 만들어낸 원은 수십, 수백미터를 넘어, 그 이상의 영역까지 끊임없이 확장해나갔다. 

더할나위없이 패도적인 광경. 

어느 누가 이것을 단순한 내력의 대결이라 생각하겠는가. 

‘······!’ 

천마는 내심 당황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내력의 단계를 올리는만큼, 흉조 또한 같이 올리고 있었기에. 

허나, 불가능하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내력 역시도 자신과 결이 같았다. 

천마신공으로 인해 증폭된 내력을 끊임없니 순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확장하여 힘 그 자체를 부풀리는 게 천마신공이었으니. 

여태껏 수많은 적들을 오로지 힘으로 찍어눌렀던 천마다. 

‘내 성취와 비슷하다?’ 

그럴 리가. 

놈이 천마신공을 익혔다한들, 그 시기는 얼마 되지 않았을 터. 

만에 하나 천마도가 놈에게 천마신공을 알려주었더라도 그 시간은 고작 며칠에 불과하다. 

그 며칠 사이에 자신이 평생 이룩한 성취를 따라잡는다는 게 정녕 가능하단 말인가? 

천년무재.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무의 재능을 지녔다 칭송받던 자신이다. 

그야말로 무공을 익히기에 최적화 된 육체. 

더불어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니, 천상천하에 감히 적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놈은 만년무재라도 된다는 뜻인가? 

‘만년무재라 할지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례없는 고금제일의 재능을 지녔다한들 고작 며칠만에 자신의 성취를 따라잡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 

불가능한 일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졌다. 

까득! 

까드득! 

이빨이 절로 물린다. 

천마는 한계에 다다를 정도로 내력을 일으키고 있었다. 

대성에 가까워진 성취, 자연경의 경지도 다 소용없었다. 

이 괴물 앞에선. 

‘원래부터 지녔던 내력이 나를 넘어설만큼 많았던 게다. 그게 아니고서야!’ 

애써 부정한 천마가 결국 한 발자국 물러섰다. 

내력의 대결을 더 이어가면, 그대로 놈에게 먹힐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자신을 넘어선 내력의 소유자. 

여태껏 만나본 적 없는 부류의 적. 

‘··· 검술이라면 다를 거다.’ 

찍어누르겠다는 생각, 버렸다. 

천천히 말려죽인다. 

검술의 깊이와 격은 저 괴물이 자신을 따라올 수 없을 테니. 

숨을 가다듬고, 자세를 잡는다. 

그리고 재차- 발을 뻗었다. 

천천히 휘둘러지는 검. 

하지만 그 안엔 수천, 수만가지의 묘리가 담겨있다. 

탈마에 이른 검은 일견 평범해보일지라도 막아낼 수 없다. 

촤악! 

······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벤다고 생각하면 베였고, 막았다고 생각하면 뚫렸다. 

틀림없이 같은 천마신공임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저 흉조의 검을 막을 수가 없다. 

막기는커녕. 

··· 착실히 농락당하고 있었다. 

-놈을 죽여야 한다! 놈은, 나를 빼앗아가고 있다! 

천마도가 분노했다. 

여태껏 들린 적 없던 천마도의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천마는 제대로 인지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움직임이, 상대에게 전부 읽히고 있었으니까. 

“넌······ 뭐냐······?” 

뚝, 뚝.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피. 

저며진 가죽 사이에서 드러난 힘줄은 갈기갈기 찢어발겨져 있었다. 

천마는 상대를 바라봤다. 

흉조의 눈. 

더없이 가라앉은, 감정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무저갱의 눈을. 

보자마자 알았다. 

저것이야말로 인간을 버린 자의 눈이다. 

필요 없는 모든 것을 버리고 배제한 채 완성된 괴물. 

인정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이런 자가 존재한다면. 

만마(萬魔)를 굴종시키고 하늘을 떨게 만드는, 

진정한 하늘의 마귀. 

“천마······.” 

······ 그것은 천마일 것이다. 

자신이 향해야할 지향점. 

그 궁극에 선 자! 

여태껏 천마를 흉내내고 있었던 건 자신이었던 것이다. 

어느덧 자신은 가짜가 되고, 놈은 진짜가 되었다. 

빼앗겼다. 

완벽하게. 

존재를, 존재의 의미를, 모든 기억을. 

그리고 이것은 시작일 따름이었다. 

‘모든 걸 먹어치우는 괴물······!’ 

자신을 시작으로 놈은 섬의 모든 것을 먹어치울 테다. 

그리하여 모든걸 넘어서고 완성될 터였다. 

그제야 천마는 확신했다. 

처음에는 아리송했으나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끔찍한 흉조. 

놈은, 멸망이다. 

쉬익. 

툭! 

천마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신체의 모든 신호가 끊긴 채 바닥에 스러진 육신.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이자벨라는 알 수 있었다. 

‘달라.’ 

다르다고.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란돌프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그렇다면 저게 란돌프의 진정한 정체성······ 박현명에게 조종당하지 않는 진짜 란돌프의 모습일 것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조종당했던 불쌍한 인간. 

자신이 오롯이 따라야만하는 왕이자 별. 

옭아매던 주박이 사라지자, 란돌프는 모든 한계를 뛰어넘고 있었다. 

란돌프야말로 정점(頂點)의 존재라 할 수 있으리라. 

‘내가 해야할일. 나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 

이자벨라는 자신의 품에 있는 불안정한 구를 바라보았다. 

박현명. 

이것은, 그의 영혼이다. 

자신과 란돌프를 조종한 다른 세계의 파렴치한 인간. 

초월하며 그 이름을 알고는 있었으나 실체를 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게 자신이 해야할 일이었다. 

이 영혼을 지워 없애는 것 말이다. 

그리하여 란돌프의 오점을, 주박을 완전하게 해제해주는 게 자신이 해야할 일이었다. 

박현명은 자신에게도 원수였으므로. 

마침 너무나도 좋은 기회이지 않은가. 

이건 밤의 악령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왜 자신은, 이 영혼을 없애지 못하고 있나. 

아마도 그건 그녀가 박현명의 영혼에 얽힌 기억을 엿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보다도 판게니아를 사랑했던, 

성실하며 열렬하게, 오롯이 이 세상의 구원만을 위해 뛰었던 한 인간의 기억. 

비록 그 과정에서 수없이 실패를 맛보기도 하고, 수많은 죽음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과연 그것을 그저 ‘장난’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는가? 

신병을 유발하며 멋대로 조종한 뒤 누군가의 인생을 박살내는 괴물이라 하기엔, 박현명의 기억은 너무나도 순수했다. 

순수하게, 성심성의를 다해, 판게니아를 구하려했을 뿐이었다. 

‘내가······ 해야할 일.’ 

이자벨라는 다시 한 번 자신이 해야할 일을 떠올렸다. 

“란돌프님.” 

밤의 악령은 절대로 입을 열어선 안 된다. 

당연히 참가자에게 말을 거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체가 들통났다간 그대로 소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자벨라는 란돌프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어루어 만지면서. 

또박, 또박, 정확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이자벨라입니다.” 

······ 어차피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