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 VS 란돌프
별 부수는 자.
붉은 피부를 지닌 오우거.
낡디 낡은 망토와 곳곳에 이가 나간 갑옷, 양 손에 자신의 몸집만 한 대검 두 자루를 든 채로.
그는 자신의 앞을 기어가는 ‘재앙의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스으. 스으으으으.
살이 지면에 쓸리는 불쾌한 소리.
코가 막힐 것만 같은 악취.
닿는 모든 것을 먹어 삼키는 괴물 중의 괴물!
‘태어나지 않은 존재.’
쳐다보아선 안 된다.
쳐다보는 순간 잡아먹힐 테니까.
하지만 그건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에 한하는 이야기다.
“······ 쏟아낸 성배의 잔여물 같은 존재이지, 저건.”
성배.
수많은 교단들이 성물이자 신기(神器)로 취급하는 것.
믿고 따르는 신을 상징으로 빚어놓은 물건이 바로 성배다.
하지만 지금 별 부수는 자가 말하는 것은 그런 일반적인 성배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저것’이 태어난 곳은 신들의 성배.
수많은 신의 영혼이 모여 빚어진 성배의 가장 안쪽.
온갖 불쾌하고 추악한 것들을 모아둔 찌꺼기.
그래, 이 감상을 한 마디로 엮자면.
“역겹군.”
실로 역겹기 그지없다.
심연의 무수히 많은 괴물을 탐해온 별 부수는 자의 입장에서도 ‘태어나지 않은 존재’는 그다지 달갑지가 않았다.
저딴 게 있으면 심연이 쓰레기장이라도 되는 듯한 기분이 드니까.
하수구를 드나드는 쥐새끼마냥 심연 곳곳을 들쑤시며 온갖 것을 먹어치우는,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재앙의 덩어리.
‘저딴 게 감히 올 곳이 아닌데.’
별 부수는 자는 의아했다.
저건 대체 왜 신의 섬까지 흘러들어왔을까.
누군가의 말을 듣거나, 의도대로 움직일 놈은 아닐진대.
오로지 ‘태어나고자’하는 본능밖에 없는 족속.
본능적으로 승리하며, 끊임없이 나아간다.
하지만 절대로 태어나지 못하는 강대한 저주를 품고 있기에 어찌 보면 이곳에서 가장 불쌍한 놈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대가 아니었다면 쳐다도 안 봤을 것을. 덕분에 좋은 구경을 했다고 해야 하나?”
피식 웃으며 별 부수는 자가 자신의 앞에 선 여인을 바라보았다.
천축의 고래.
차갑기 그지없는 얼굴, 감정이 메마른 눈빛.
대답은 없다.
설령 대답을 하더라도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고.
천축의 고래와 소통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멸망뿐이었으니.
별 부수는 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나저나 그대도 변했구나. 심연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만 하더라도 순진무구한 어린 고래였거늘.”
“······.”
“지금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천축이 무너져내릴 때가.”
별 부수는 자는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수많은 신격과 여신 레아가 자기희생을 통해 ‘멸망’을 막아냈을 때.
저 고래는 천축을 부쉈고, 모든 경계가 사라졌다.
동시에 하늘에선 쏟아지지 말아야할 것들이 쏟아지며 지상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죽은 자가 되살아났고, 있지 말아야할 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아득히 오랜 세월 전에 모습을 감췄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그렇게 심연은 완성되었다.
여신 레아의 쌍둥이 동생인 여신 피나가 남은 대륙을 가까스로 떠올리지 않았다면.
저 하늘에 보이는 ‘별’들을, 대륙을, 그들이 올려다볼 일은 없었을 텐데.
“지금에야 천상에서 떨어지는 불순물을 몇몇 ‘탑’에 흘려보내 소각한다지만······ 그때 쏟아진 것들은 태초부터 쌓여온 독기였지.”
너무나도 생생하다.
생생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망각하지 않는다.
잊고 싶은데 잊혀지지가 않았다.
이보다 더한 저주가 어디 있을까.
“그래서 묻고 싶었다. 천축의 고래여, 왜 그랬느냐?”
“······.”
“그리고-, 저 ‘덩어리’는 왜 그대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거지?”
“······.”
“먹이로 주고 있는 건가? ‘폭풍의 배율자’를 먹이로 줬듯이?”
별 부수는 자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저 저주의 덩어리가,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지금 소화시키고 있는 게 무엇인지.
그건 바로 ‘폭풍의 배율자’다.
신의 섬에 참가한 참가자이며 심연영역 다수를 지배하는 지배자.
그만한 존재를 먹였는데도 만족하지 않는다.
스으으.
스으으으윽.
주변을 어슬렁대며, 자신을 노리고 있다.
‘저 덩어리는 흘러들어온 게 아니었구나.’
아아.
그제야 별 부수는 자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덩어리는 흘러온 게 아니다.
끌고온 것이다.
천축의 고래가.
심연의 공주라 일컬어지는 그녀가.
이곳, 심연에는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는 자들과, 여왕 혹은 공주라 불리는 이들이 몇몇 있기는 했으나······.
진짜는 그녀뿐이었기에.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따르는 것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니.
“뭘 만드려는 거지? 무엇을 태어나게 하려는 거냐?”
허나 저 덩어리는 결코 태어날 수 없는 저주를 품었다.
그런데도 먹이를 준다는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는 것이다.
뭘까.
무엇을 태어나게 하려는 걸까.
신의 섬에 있는 자들 모두를 먹을 셈이다.
그렇게까지해서 탄생시키려는 게 무엇인지.
설마, 멸망?
하지만 바알을 이끄는 자가 이곳에 있었다.
끔찍한 흉조.
새로운 ‘멸망’으로 추정되는 남자 말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하지만.
‘인정하지 못한다. 그런 거로군.’
과연.
그래서 자신이 만들겠다는 건가.
다시 부활시키겠다는 생각인가!
“그대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할 수는 없을 것 같구나. 천축의 고래, 불쌍한 심연의 공주여.”
촤아아악!
양손을 뻗어 검을 한차례 털어낸다.
별빛 대결 따윈 하지 않을 생각이다.
천축의 고래, 태어나지 않은 존재.
‘둘 다, 쳐 죽인다.’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
섬이 흔들린다.
어딘가에서 가공할 존재들이 서로를 부숴대고 있다.
그렇게 반나절.
마침내 결판이 난 듯 소란이 잠잠해지자, 밤이 찾아왔다.
밤.
빛 한 점 없이 어두운 하늘.
천마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력도, 신체 능력도 다 회복됐다.’
모든 게 정상이다.
아니, 정상 이상이었다.
이전보다 한 단계 진일보했음이 느껴진다.
‘이곳에서 나는 대성(大成)을 이룬다.’
천마신공의 성취가 한 단계 나아갔다.
예상대로 이 섬은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곳이었다.
더없이 풍부한 기운과 더욱이 강렬한 강자들.
게다가 천마도 역시도 그에게 힘을 보태주고 있었다.
“상쾌하군.”
불쾌하기 그지없는 일들의 연속이었으나, 이 역시 완성되어 가는 과정 중 하나라 생각하니 나쁘지 않았다.
강자와의 대결은 애초에 그가 바라 마지않던 것이었으므로.
허나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건 결국 그일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빌어먹을 벌레들을 처리하느라 애를 좀 먹었다만······.’
몸속에 침투한 가라앉은 황제의 벌레들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내공을 끓이고 태워 한계까지 몰아가야 겨우 타서 없어졌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죽을뻔했다.
내공이 뒤엉켜, 폐인이 될 뻔했던 것도 수차례.
‘덕분에 진일보했지.’
허나 깨달음도 함께 찾아왔다.
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의 결과에서 그는 넘어선 것이다.
대해와 같이, 우주와 같이 끝 없이 펼쳐진 무(武)의 세계에서 나름대로의 방점을 찍었다.
대성으로 향하는 길을 확실하게 마주했다.
‘가라앉은 황제, 끔찍한 흉조.’
그러니, 이제는 다르리라.
목표는 둘.
그 둘만은 꼭 자신이 죽인다.
이른 아침부터 섬이 흔들려대긴 했으나 그 둘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해서 관심을 접었다.
둘을 처리하고 나머지를 정리해도 충분하니까.
그렇게 익숙한 기운을 찾아, 얼마나 섬을 쥐잡듯이 돌아다녔을까.
‘······ 찾았다.’
드디어 목표 중 하나를 찾았다.
허나 발견하자마자 나서진 못했다.
그 목표가 ‘밤의 악령’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밤은 악령의 시간이다.
대결을 펼치려 들면 절대로 이길 수 없다.
다시금 ‘소중한 것’을 잃고 감옥에 이감되는 것 외엔.
하여, 지켜보았다.
‘뭘 하는 거지?’
끔찍한 흉조.
그리고 밤의 악령.
둘이 함께 무엇을 하는지.
커다란 바위의 아래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별빛.’
저건 별빛이다.
그것도 평범한 별빛이 아닌, 찬란한 주홍빛의 별빛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은가.
왜 별빛의 옆에 악령과 흉조가 함께 있는지.
‘······ 밤의 악령이 별빛으로 인도했다?’
대관절 밤의 악령이 무엇이기에.
놈을 지키던 것으로도 모자라, 별빛으로 인도까지 한단 말인가.
둘이 함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아침은 별빛 대결을 펼칠 수 있는 시간.
하지만 별빛 대결로는 상대를 죽이지 못한다.
그러나 천마가 원하는 건 놈의 죽음이었다.
그러니 밤에 직접 처리해야만 했는데, 악령이 옆에 붙어 있다면 도저히 방법이 없는 것이다.
‘저 악령부터 소멸시켜야겠군.’
다급해 하지 않는다면 수가 없진 않다.
악령을 소멸시킬 방법은 감옥에 두 번이나 이감되며 숙지했으므로.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나와라, 천마.”
그때였다.
끔찍한 흉조의 목소리.
스륵.
천마는 흉조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용케 눈치챘군.”
“······ 대놓고 살기를 드러내는데 모를 리가.”
맞다.
멀리서, 천마는 살기를 드러냈다.
악령과 거리를 유지한 채 놈에게 투쟁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는지 궁금했는데.
천마는 도발했다.
“어떠하냐, 서로 죽고 죽여보는 게? 겁을 먹었다면 악령에게 도움을 청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만.”
그러자 별빛을 주워든 흉조가 웃었다.
“저급하기 짝이 없는 도발이라. 그러나······ 마음에 든다. 지금 나는 기분이 매우 좋으니.”
도발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천마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쉽게 받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이상한 점이 있었던 탓이다.
‘······ 뭔가 달라진 것 같군.’
뭐가 달라진지 모르겠지만 무언가가 달라졌다.
마주한 건 두 번에 불과하나 분명하게 변한 게 있었다.
더욱 꺼림칙하고, 불분명해졌다고 해야 할까.
마치 다른 존재가 된 것만 같은······ 묘한 감각.
‘천마도도 다시 반응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천마도가 숨었다.
진짜로 겁이라도 먹은 것마냥.
성취가 올라가서 더 강대한 기운을 품게 되었거늘,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거늘.
대체 천마도는 놈의 무엇에 겁을 먹었단 말인가.
‘그래도 괜찮다.’
천마도의 도움 없이도 그는 강하다.
대성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진 이상 감히 적수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 순간.
꽈르릉!
흉조가 발을 굴렀다.
지면이 흔들리며 기운이 요동쳤다.
전신을 옥죄는 압박감.
고작 한 발자국에 새겨진 압도감.
천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천마······ 군림보······?”
일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어떻게 놈이 이 기술을 사용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마 군림보.
천마의 발걸음은 오로지 천마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천마의 발걸음을 사용할 수 있다면.
“네놈······!”
허나, 불가하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전혀 그런 기색은 없었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느 틈에.
아니, 어떻게.
“천마신공을······ 익혔느냐?”
자신에게만 허락된 천마신공을 놈이 익혔단 말인가!
그러자 흉조가 비웃었다.
“천마도가 말해주지 않던가?”
“천마도가······?”
“아아. 너보단 내가 천마신공을 대성할 인재라고 생각한 거겠지.”
“······ 미친 소리를 하는군.”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었다.
천마도가 놈에게 천마신공을 알려줬다니.
살면서 이보다 더 미친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건만.
천마가 표정을 굳혔다.
“네놈. 곱게 죽진 못하겠구나.”
아무래도 이놈을 찢어 죽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