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수도자
“그럼 ‘신의 살갗 혼종’을 움직이는 게 멸망이라는 건가?”
멸망에 대한 언급.
영원의 수도자가 패배한 뒤 몸을 빼앗기고 감옥에 갇혔다면, 지금 이 섬의 주인인 ‘신의 살갗 혼종’이 누구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눈동자가 양쪽으로 번갈아가며 움직였다.
-멸망이되 멸망이 아닌 것. 멸망의 파편에 의해 움직이고 있노라.
파편이 의지를 가지고 육체를 숙주삼아 움직이는 모양새.
일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다.
실제로 심연에서 사흉 바알은 파편에 지배당하고 있지 않았던가.
껍데기만 깨어난 바알이 심연으로 가라앉아 진화하려던 건 모두 파편의 의지였다.
“파편에 지배당하고 있다면 왜 ‘신의 살갗 혼종’은 굳이 이런 규칙들을 만든거지?”
허나, 그렇다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의 섬에 경쟁자들을 모아두고 마치 게임처럼 규칙들을 정해놓은 게.
-나의 영향이니라. 내가 계속해서 너를 부르고 있었으니.
영원의 수도자는 별 게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비록 육체의 주도권은 빼앗겼으나 영향은 남아있다고.
예컨대 습관과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로 인해 ‘신의 살갗 혼종’이 이런 게임을 만들었다는 의미다.
또한, 내가 이곳에 온 것도 모두 그의 의도라는 뜻이었다.
···이제야 의문이 풀린다.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신의 살갗 혼종’을 알고 있었던 것도 너의 영향이겠군.”
-‘영원군주’와 ‘영원의 수도자’는 뗄 수 없는 관계. 본능적으로 나를 알아본 것이겠지.
본능과도 같다는 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존에 갖고 있던 의문은 일소에 해소되었다.
이제 새로 생긴 궁금증을 풀 차례였다.
“내가 ‘신의 섬’의 주인이 되면, 너는 빼앗긴 몸을 되찾을 수 있나?”
-한 번 파편에게 빼앗긴 몸은 되찾을 수 없다.
······ 되찾을 수 없다고?
하지만 종족재건 퀘스트에선 분명히 ‘신의 섬’의 주인이 되거든 ‘영원의 수도자’가 깨어난다고 적혀있었다.
영원의 수도자가 몸을 되찾고 종족을 재건하는 게 아니었나?
무엇보다, 나는 한 번 몸을 빼앗기고 되찾은 적이 있다.
바알이 품은 파편에게 먹혀 죽었을 때.
그때 분명히 ‘영원의 란돌프’에 숨겨진 능력에 의해 몸을 되찾고 부활했다.
‘그 정도의 기적이 없는 한은 불가하다는 거로군.’
수많은 기적들이 맞물려 일어난 일.
다시 한 번 그런 요행을 바라선 안 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대비하고 준비해야만 했다.
-영원군주여! 우리 종족의 비원은 나를 죽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하여 내 안에 있는 무수히 많은 ‘씨앗’을 섬에 뿌려야만 하노라.
영원의 수도자가 강조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깨우는 게 아니라, 죽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방식이었다.
어쨌든 종족의 복원에 필요한 씨앗을 영원의 수도자가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를 죽여야만 비로소 종족재건의 비원이 해방된다는 것이었다.
“나를 부른 이유가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인가?”
-절반은 그렇다. 내 육신이 품고 있는 ‘씨앗’은 결코 놈들에게 넘어가선 안 된다.
“놈들이라면?”
-심연의 지배자들. 그들 중 하나가 이 시련에서 승리하여 완성된다면 보다 ‘심연왕’에 가까워질 터. 현재 심연은 수많은 지배자들과 파편의 주인들이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며 난립하는 상태. ‘씨앗’마저 넘어간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구나.
심연은 결코 누군가에게 정복되어선 안 된다.
정복되는 순간, 그 눈은 오로지 판게니아로만 향할 테니까.
또 다른 이름의 멸망이 탄생하는 셈이다.
그를 막고자 영원의 수도자는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
신의 섬에서 시작되는 각축전, 진정한 주인을 가리는 자리에.
허나 그게 전부가 아니고 절반의 이유라고 한다.
나는 작게 이맛살을 구겼다.
“나머지 절반의 이유는?”
-너의 완성을 위해서다. 영원군주여.
“······?”
-이제 선택할 때가 되었다.
선택이라니.
무슨 선택을 말하는 걸까.
게임에서 승리하는 건 확정 사안이다. 선택이라 할 게 없었다.
이곳에 도착한 것조차도 그의 의도라면, 내가 선택할 게 대체 무엇이란 건지.
영원의 수도자.
그 거대한 ‘눈’은 나를 보며 말했다.
-버려라. 그리고 완성되거라. 이곳은 그것만을 위한 장소이니.
“···무엇을 버리라는 말이냐?”
버린다.
내가 갖고 있는 것, 지니고 있는 것을 쏟아내란 의미다.
하지만 아예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하여 되묻자 영원의 수도자가 비웃듯이 말했다.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너의 가장 소중한 것. 하지만 이제는 필요 없는 것. 섬에 도착한 이들 모두가 갖고 있는 미련과 영혼!
······ 나의 가장 소중한 것.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몰랐다.
그런 내 태도를 보며 영원의 수도자가 혀를 찼다.
-천마도와 동전, 일기장에 얽혀있던 건 기억이 아니다. 영혼이다. 그동안 네가 읽은 것은 그 영혼들 자체이니라.
가장 소중한 것이 사실은 영혼이라는 말.
틀린 말은 아니다.
천마도에 깃든 악신은 분명히 초대 천마의 영혼이었으니까.
다만, 다른 물건과 달리 악신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이유는 놈의 자아가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무덤의 주인이 소중히 간직하던 동전에도, 라이가의 육성일기에도 모두 기억만이 아니라 영혼이 깃들어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잃은 게 없다.
나와 관계된 영혼이라는 것도 짐작가는 바가 없었다.
-버려야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영혼들. 보통은 관련된 물건에 깃들어있기 마련이나, 너의 ‘가장 소중한 영혼’은 너 자체에 깃들어 있더구나.
영혼은 물건에 깃든다.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헌데, 나 자체에 깃들어 있다면······.
-떠올려봐라. 언제부터 ‘로그아웃’하지 않았지? 마지막으로 돌아간 게 언제인지 기억은 나느냐? 언제부터인가 판게니아에만 ‘로그인’한 상태이지 않나?
“······!!!”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 단어들은 분명히 귀에 익었다.
로그인과 로그아웃.
영원의 수도자의 말마따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로그아웃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 시점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2차 침략을 당했을 때가 마지막인 것 같은데.
그 이후 판게니아에 몰입했고, 아무런 의구심도 가지지 못했다.
허나······.
‘뭐지?’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사실.
‘내가 왜 로그아웃을 하려 했지?’
도려내듯 지워진 기억이 있다.
떠올리려 하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이름이.
‘나는 누구지?’
이 몸을 움직이는 것은 당연히 나다.
‘나’라는 존재다.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고,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존재하는가.
영원의 수도자는 그런 나의 혼란이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너는 그 이름을 잃었다. 잊었다. 허나, 되찾을 필요 없다. 너는 영원군주 란돌프. 오로지 란돌프로서 시작하여 완성된 자.
-감옥에 갇힌 뒤 스스로 기억을 상기할 때도 너는 그 이름만은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필요없는 이름이기에.
-잊어라. 영원히.
-너는 이미 완성되어 있으니.
-더이상 조종당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부턴 오롯이 너의 삶을 사는 것이다. 영원군주 란돌프여!
*
고오오오.
무덤의 주인은 끔찍한 흉조를 바라보았다.
영롱한 무언가.
가장 소중한 것을 받아든 끔찍한 흉조에게 자신 역시 받아야할 것이 있었으니까.
“그렇게도 알고싶은가? 아이의 행방을?”
고오오오오-!
무덤의 주인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미치도록 알고싶다. 그러기 위해 셀 수 없는 세월 동안 심연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런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그러자 끔찍한 흉조가 말했다.
“혹시 누군가가 신의 섬에 오면 아이를 찾을 수 있다고 했느냐?”
고오. 고오오.
무덤의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신의 섬에 온 이유도 같은 까닭이다.
“누가?”
고오오오.
“······ 운영자?”
고오오오오오.
무덤의 주인은 긍정했다.
‘운영자라.’
스스로를 ‘운영자’라고 밝힌 누군가가 무덤의 주인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한데, 무엇을 운영한다는 걸까.
이 심연을?
아니면 판게니아 자체를?
혹, 그것도 아니면 세계를 운영하는 신이라도 된다는 건지.
확실한 건 모두가 의도를 갖고서 신의 섬에 모여들었다는 점이다.
무덤의 주인만이 아니라 다른 참가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 이곳에서 얻고자 하는 게 있다.
신의 섬과 거룩한 별?
그건 부수적인 것이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것들을 찾고자 모여들었다.
무덤의 주인처럼 말이다.
고오오오오.
이윽고 무덤의 주인은 끔찍한 흉조를 바라봤다.
이제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가장 소중한 것을 약속대로 지키고, 넘겨주었으니, 아이의 행방을 알려주라는 것이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끔찍한 흉조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알려줄 수 없다.”
··· 고오?
지금 뭐라고 하는 건가.
알려줄 수 없다고?
“알아봤자 고통스럽기만 할 것이다.”
고오오오오!
순간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무덤의 주인은 순수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끔찍한 흉조에게.
애초에 고통은 자신이 감내하는 것이다.
억겁의 세월 동안 심연을 돌아다니며 마침내 행방의 단서를 찾았건만.
이제와서 알려줄 수 없다?
자신의 것을 되찾았으니 그걸로 끝이라는 건가.
고오오오오오-!!
죽인다.
죽일 것이다.
자신을 막아섰던 심연의 괴물들처럼.
영역의 주인들처럼.
가루도 남기지 않고 뭉게버리리라.
스아아아아!
그때였다.
끔찍한 흉조의 등 뒤로 떠오르는 무수히 많은 별빛들.
【‘무덤의 주인’과 ‘끔찍한 흉조’가 ‘별의 원정 대결’을 펼칩니다.】
【‘무덤의 주인’의 공격력은 85 체력은 60입니다.】
【‘무덤의 주인’이 선제공격합니다.】
허나, 먼저 대결을 걸었다고 무조건 ‘선제공격’을 취하는 건 아니다.
뭉개버리려 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우선 다시 놈의 소중한 것을 빼앗고, 밤이 되면 죽여도 늦지 않았다.
무덤의 주인이 자신 있게 별빛을 수놓았다.
먼저 공격하는 게 자신이라면 끔찍한 흉조도 이길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끔찍한 흉조’의 공격력은 126, 체력은 120입니다.】
【‘무덤의 주인’이 패배했습니다!】
【‘끔찍한 흉조(밤의 악령)’이 ‘무덤의 주인’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강탈합니다.】
【‘밤의 악령’에게 강탈당한 ‘가장 소중한 것’은 밤의 악령을 소멸시켜야만 되찾을 수 있습니다.】
고오오오-?
그 문구를 본 무덤의 주인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끔찍한 흉조를 바라보았다.
패배한 것보다도 더 충격적이었으니까.
끔찍한 흉조가 밤의 악령이라니?
설마 밤의 악령이 지금 끔찍한 흉조의 흉내를 내고 있던 것이라고?
고오오오오!
속았다.
무덤의 주인은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소중한 것과, 끔찍한 흉조의 소중한 것까지 모두 넘겨버리게 되었으므로.
무덤의 주인이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닿기 전에.
【대결에서 패배한 자는 하루 동안 ‘별의 감옥’으로 이감됩니다.】
슈우웅!
무덤의 주인은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이어 홀로 남은 끔찍한 흉조는 다시금 자신이 쥔 것을 바라보았다.
영롱하나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둥그런 무언가.
“박현명.”
란돌프의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소중한 영혼.
끔찍한 흉조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이제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저의 왕, 저의 별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