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 브레이커
이제는 알겠다.
이 게임의 숨겨진 의도를.
‘빼앗긴 걸 되찾는다. 그게 전부인 게임이다.’
가장 소중한 것일 남에게 빼앗기면 어떤 기분일까.
형용할 수 없는 분노와 상실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 상태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감옥에 갇히게 되면?
‘미쳐버리겠지.’
안절부절못하고 미쳐버릴 터.
되찾겠다는 생각만 더욱 절실해질 터였다.
별빛을 모아 원정을 한다는 건 구실에 불과하다.
이 게임은 남의 소중한 것을 빼앗고, 빼앗긴 것을 되찾는 게 전부인 게임이었다.
그 과정에서 숨겨진 ‘진실’을 마주하면······ ‘가장 소중한 것’은 어느덧 ‘가장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그렇지 않은가.
악신의 의도를 알게 된 천마가 천마도를 계속 쥘 수 있겠는가.
주인이 죽었다는 걸 깨달은 무덤의 주인이 삶을 지속하려 하겠나?
라이가······ 그는 자신의 부모와 관련된 모두를 죽인 팔가를 계속해서 계승하려 할까?
나를 포함한 다른 참가자들 역시 마찬가지겠지.
진실을 마주한 순간 좌절하고, 절망하며,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온 세월을 후회할 것이다.
‘그럼에도, 알아야 한다.’
설령 먼지 구덩이에 몸을 던지는 짓이라 할지라도, 잘못된 걸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라면 나는 마땅히 그렇게 할 테다.
시간이 더 지나서 뒤늦게 깨닫는다면 그때는 바로잡을 기회조차 없을 테니.
빛바래어 찢기고 뜯겨진 기억인들 어떠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후회보다는 나을진대.
“몸은······ 멀쩡하군.”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
손과 발, 목과 얼굴을 매만지며 손실된 부분이 없는지 확인한다.
육체는 정상이었다.
심장도 멀쩡히 뛴다.
‘겨울이나 태고의 갑옷도 그대로다.’
육체가 멀쩡하다면 다음은 장비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
가장 뛰어난 장비는 당연히 ‘겨울(최후의 황혼)’과 ‘태고의 갑옷’이다.
빛의 옥좌도 있기는 하지만 강화를 하지 않는 이상 두 장비보단 살짝 급이 낮은 게 사실이었다.
‘전부 그대로 있다.’
사라진 건 없다.
하지만 분명히 ‘가장 소중한 것’을 강탈당했다는 문구를 보았다.
여태껏 내가 강탈해온 것처럼, 당연히 무언가를 잃어버렸으리라 생각했거늘.
‘뭐가 없어진 거지?’
······ 이상하다.
아무것도 없어진 게 없다.
몸도, 장비나 도구도, 기억 역시 결손된 부분은 없었다.
‘모두 연결되어 있다.’
혹시나 싶어서 헬과 바알, 칼날여왕 하나의 ‘연결’을 확인했다.
미묘하게 느껴지는 존재감.
나와 연결되어 있음이 확실해진 순간.
‘더 소중한 게 있단 말인가? 나도 모르는?’
뭐가 있지?
이들보다도, 겨울이나 태고의 갑옷보다도, 내 육체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것이라는 게.
나는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떠올려보았다.
빌헬름.
그의 기억, 그의 습관, 그의 별까지도 모두 잊지 않았다.
심연까지 함께 온, 밤의 악령이라 추정되는 이자벨라.
나의 최측근이자 언제나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
항상 나를 위해 헌신해주는 일 중독자 허드슨,
가파르게 성장 중인 나의 부캐릭터 아이작과 발테.
지구의 용신, 칼날여왕 하나.
내 비장의 무기이자 사랑스러운 두 아이들, 나를 아버지라 부르는 이세라와 루카리아.
지금쯤이면 발란 왕국의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 있나?
나는 쥐어짜듯 나머지도 상기해냈다.
지금쯤이면 세계의 끝이라 칭해지는 엘프의 숲에 도달했을 앤드류 사제.
세렝게티의 아버지인 와이저 후작, 앤드류 사제의 자식이지만 아크 리치가 된 안다사르.
북쪽 크람델의 주인 백왕과 그의 딸 아리아.
사주력 대토룡, 궁기, 메두사, 그리고 흑왕에게 사로잡힌 사왕.
성녀 세아까지.
가장 최근 합류한 엘프 아우릴도 당연히 잊지 않았다.
‘인연은 그대로다. 아무것도 잊지도, 잃지도 않았어.’
그렇다면 너무 흔해빠져서 갖고 있는지도 모르는, 하지만 소중했던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건지.
감옥을 나서면 알 수 있을까?
【처음으로 ‘별의 감옥’에 이감되었습니다.】
【기본적인 ‘규칙’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처음으로 이감되자 나타나는 수많은 규칙들.
모두 이미 내가 숙지했거나, 파악한 것들이었다.
‘천마를 비롯한 참가자들이 감옥에 이감된 이후 다른 움직임을 보인 이유가 여기 있었군.’
한 번 패배한 뒤 감옥에 들어와야 제대로 알려준다.
패배를 맛봐야만 게임에 임할 존재들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다.
한데, 내가 몰랐던 규칙도 몇 가지 있기는 있었다.
【소중한 것을 빼앗은 상대에게서 ‘별빛 원정’을 성공시키면, 상대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거나 빼앗긴 것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빼앗거나, 되찾거나.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다.
어찌 됐든 소중한 것을 되찾고 싶다면 열과 성을 다해 게임에 임하라는 건데.
【모든 참가자와의 ‘별빛 원정’에서 가장 먼저 승리할 경우 ‘신의 섬’과 ‘거룩한 별’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의구심이 생긴다.
모든 참가자라는 건 심연의 지배자와 태고의 존재들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밤의 악령’도 포함되는 걸까?
만약 후자라면 사태가 심각해진다.
밤의 악령은 별빛 원정에서 패배할 경우 소멸하기 때문이다.
‘신의 살갗 혼종······.’
나는 곰곰이 턱을 쓸며 이 게임의 주최자를 떠올렸다.
섬의 주인이자 혼종들의 신.
다른 참가자들에 의해 이 섬의 주인이 ‘신의 살갗 혼종’임을 확신하게 되었지만 문제는 ‘왜’ 이런 게임을 만들어냈냐는 점이었다.
판게니아의 사람들과 플레이어는 이런 류의 게임이 익숙하다.
수많은 던전과 탑 등에서 항시 별의별 규칙과 오락성이 동반되는 탓이다.
그러나 이곳은 아니었다.
‘심연의 주민들은 이런 종류의 게임에 익숙하지 않다.’
익숙한 사람이라고 해봤자 나 아니면 라이가 둘 뿐이다.
하지만 라이가도 심연을 전전했으니, 진정으로 익숙한 참가자는 나 하나라고 봐야했다.
······ 나를 위해 만들었다?
‘아서라.’
고개를 젓는다.
신의 살갗 혼종.
놈과 인연이 없는 건 아니다.
두 번 본 적이 있다.
처음 와이저 후작가에서 시작된 ‘메인 퀘스트 4, 암흑공간의 틈새를 메워라’에서 놈은 등장하려 했었다.
다행히 놈이 등장하기 전에 퀘스트를 클리어했지만.
그 뒤는 바알을 죽이고 나서다.
정확히는 심연에 가라앉은 제주도민들과 플레이어들이 탈출할 때.
내가 ‘검은 알’에서 깨어났을 때 말이다.
수많은 심연의 ‘눈’들이 나를 보았고, 그중 분명히 ‘신의 살갗 혼종’이 있었다.
‘······ 아니.’
잠깐만.
‘눈만 보고 나는 어떻게 그게 신의 살갗 혼종이라 확신하는 거지?’
모순을 발견했다.
나는 신의 살갗 혼종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전신을 마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메인퀘스트 4에서 소환되지도 않았고, 당시 심연에 떠오른 눈은 수천, 수만 개에 달했다.
그 많던 눈 중 하나를 보고 놈인 걸 어찌 알았을까.
하물며 그간 아무런 의심도 없이 확신하고 있었다.
본적도 없는 괴물을 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알고 있다.
마치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알고 있는 게 당연한 것처럼······.
‘누구냐, 넌.’
나는 어둠 속을 직시했다.
새까만 어둠밖에 없는 공간.
이곳은 별의 감옥.
별이란 기억이다.
그리고 이곳이 기억의 감옥이라면, 틀림없이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을 터.
손을 뻗었다.
그러자 거친 표면의 장막이 손에 잡혔다.
‘철창이로군.’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
그들을 가두고 옥죄는 건 공간이 아닌 바로 이 쇠창살이다.
본래라면 잡고 뜯어내는 건 불가능할 것이나.
‘너의 규칙 안에서만 움직이진 않을 것이다.’
나는 규칙을 무시하는 자.
영원군주 란돌프이며,
룰 브레이커다.
쫘아아악-
힘을 주어, 장막을 찢어냈다.
그리하여 장막의 뒤쪽에서 나를 지켜보는 ‘눈’을 찾아냈다.
-놀랍구나. 이곳에 갇힌 그 누구도 나를 찾아내진 못했는데.
신의 살갗 혼종.
······ 이 아니다.
저건 감옥의 간수다.
감옥을 지키는 괴물.
죄수들의 비정상적인 행동이나 탈출을 막는 존재.
동시에, 별의 감옥 그 자체인 것.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 영원의 수도자.”
영원의 수도자!
히든 특성이 융합되고 초월하며 영원군주 란돌프가 되자 나타난 퀘스트의 주인공.
【‘기원(起源) - 종족재건’ 퀘스트가 도달했습니다.】
【‘영원의 수도자’가 ‘신의 섬’에 잠겨있습니다.】
【‘신의 섬’의 주인이 되면 ‘영원의 수도자’가 깨어납니다.】
신의 섬에 잠겨있다는 영원의 수도자.
그는 별의 감옥에 갇혀있었던 것이다.
곧이어 거대한 눈이 움직였다.
-그러하다. 나는 영원의 수도자. 허나 ‘멸망’에게 패배하여 몸을 빼앗긴 이후 이 감옥에 갇혀있노라, 영원군주여.
*
고오오오.
무덤의 주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별빛의 대결이 끝나자마자 끔찍한 흉조는 사라졌다.
바알도 모습을 감췄다.
심지어 파편 사냥꾼도 끔찍한 흉조에게 패배하여 감옥에 이감되었으니.
하지만, 남은 건 있었다.
고오오오오오-.
손에 쥔 것을 바라보며 무덤의 주인은 고민했다.
이건 끔찍한 흉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절대로 놓을 수 없는 것일 테다.
그러나 이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
어떨 때는 황금빛으로 빛나다가, 어떨 때는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다가, 또 어떨 때는 새하얘지기도 하는 작고 동그란 무언가.
고오오오?
음, 빛나기만 하는 건 아니다.
까맣게 물들기도 했다.
게다가 힘을 주면 부서질 것처럼 연약하다.
고오. 고오오오.
과연. 무덤의 주인은 한참을 들여다본 끝에 이게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약간의 기억이 흘러들어온 덕분이다.
숨겨져 있던, 굳이 몰라도 되는 기억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끔찍한 흉조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럼 부숴버릴까?
고오오오오.
무덤의 주인은 고민에 잠겼다.
끔찍한 흉조는 그의 동전을 아무런 대가 없이 넘겼다.
심연에서 그런 자는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자신의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다지 않나.
은인이다.
이름은 끔찍한 흉조지만, 찬란하게 빛이 나는 존재다.
반면 그의 가장 소중한 것인 ‘이것’은 너무나도 불안정하다.
게다가 ‘이것’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기억을 살펴본 결과 그랬다.
끔찍한 흉조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부숴서 없애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고오. 고오. 고오오.
고민은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부술까 말까를 한참이나 고민하던 찰나.
“······ 이제 돌려다오.”
끔찍한 흉조가 나타났다.
고민이 너무 길었나?
고오오오.
무덤의 주인은 잠시 갈팡질팡했다.
“돌려주지 않을 거냐? 아니면, 너도 받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나?”
고오?
무덤의 주인이 의아해했다.
너도라니.
또 누가 그와 같은 생각을 했던 걸까.
“돌려다오, 그건 분명히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이 맞으니.”
이토록 불안정한 것을 왜 끌어안으려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돌려줄 수밖에 없다.
결국 무덤의 주인은 쥐고 있던 것을 끔찍한 흉조에게 넘겼다.
그러자 그것을 받아든 끔찍한 흉조는 ‘그것’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 박현명.”
란돌프의 가장 소중한 것을 불렀다.
오랜 시간 자신을 대신해 자신을 움직였던 자를.
“나의 가장 소중한 존재여.”
··· 여신이나 빌헬름보다도, 다른 연인들보다도 더욱 소중한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