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돌프의 가장 소중한 것
천마가 천마도를 쥐어 보였다.
‘드디어 내게 돌아왔구나.’
잘려나간 신체가 재생된 기분.
이 얼마나 고대하던 재회이던가!
진정 굴욕의 나날이었다.
첫날 ‘끔찍한 흉조’와의 별빛 대결에서 패배한 뒤, 다시 되찾고자 찾아간 자리에서 가라앉은 황제를 마주했다.
‘천마도만 있었다면 놈따윈 상대가 안 됐을 것을.’
허나 가라앉은 황제에게마저 패배에 가까운 굴욕을 겪었다.
천마도만 손에 쥐어져 있었다면 그런 그런 굴욕은 겪지 않았으리라.
‘······ 밤의 악령. ’
위험천만한 순간.
죽기 직전, 그는 기지를 발휘해 밤의 악령에게 달려들었고 ‘별의 감옥’에 이감됐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소중한 것’을 잃었다.
‘악령에게 뭘 뺏겼는지 모르겠군. 아무래도 기억같은데.’
문제는 빼앗긴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내력도, 무공도 그대로인 상태.
그렇다면 남은 건 ‘기억’뿐이었다.
기억나지 않는 걸 인지할 순 없으므로.
그래도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다고 하였던가.
“끔찍한 흉조······ 나를 찾아올 줄이야.”
천마는 어제 밤의 일을 떠올렸다.
감옥에서 풀려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점.
어젯밤, 끔찍한 흉조는 ‘바알’을 타고서 나타났다.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천마는 피하지 않았다.
천마도를 눈앞에 두고 어찌 발길을 돌린단 말인가.
그렇게 정면에서 끔찍한 흉조를 마주한 순간, 천마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가라앉은 황제’의 물건과 천마도를 바꾸도록하지.
놈이 느닷없이 거래를 제안해온 것이다.
천마의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밤의 악령이 돕고 있는 듯한 끔찍한 흉조.
무엇보다 아직 내력이 회복되지 않았다.
‘어차피 내겐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쓰임새도 불분명한 작디 작은 물병.
그딴것과 천마도를 교환하자니 일순간 미쳐버린 건가 싶었다.
‘천마도를 내어주면 공격하려 했다만.’
또한 곧이곧대로 거래를 할 생각도 없었다.
천마도만 되찾으면 이 섬의 누구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천마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작은 물병과 천마도를 교환했으나, 이후 끔찍한 흉조가 멀어지는 걸 천마는 그저 지켜만 봐야했던 것이다.
‘··· 내력이 실리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거지?’
천마도를 쥐면 내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야만 한다.
그런데 내력이 늘긴커녕 실리지도 않았다.
곧이어 천마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천마도가 놈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끔찍한 흉조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내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마치 천마도가 놈을 두려워하는 것만 같은 모양새.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잡아먹히긴커녕 끔찍한 흉조가 천마도에 무슨 짓을 해놨다는 뜻이다.
대관절 무슨 짓을 해놨는지는 모르겠으나.
“······ 다시 만나거든 절대로 살아서 돌아가진 못할 것이다.”
어찌됐든 천마도를 되찾았다.
되찾았으면 됐다.
이제 몸만 회복하면 더 이상 두려울게 없었다.
가라앉은 황제도, 끔찍한 흉조도.
다시금 자신을 만나거든 결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리라.
신의 섬? 별빛 원정?
그딴 것들 보다도 두놈의 죽음이 먼저다.
천마가 굳은 표정으로 결의를 다졌다.
*
찬바람이 쌩쌩분다.
초면을 대하듯.
아니, 실제로 초면이 맞을 테다.
‘그 노인······.’
첫만남에서 노인은 자신을 가라앉은 황제의 분신이라고 하였다.
먼 옛날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에 불과하다고.
그래서인지 생김새도, 성격도 백팔십도 달랐다.
‘설마 밤의 악령이었나?’
어쩌면 밤의 악령이 변신한 걸지도 모른다.
밤의 악령은 단순히 이 게임을 위해 준비된 NPC와는 거리가 멀었다.
동굴앞에서 나를 지키던 악령에겐 분명히 의지가 있었다.
아마도 실존하는 누군가를 데려다놓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밤의 악령은 아침이 되면, 다른 참가자를 모방하여 게임을 진행하는 것이다······.
‘이 게임의 숨겨진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밤의 악령이다. 참가자들 외의 또 다른 참가자.’
그렇게 생각하면 얼추 앞뒤가 맞는다.
단순히 규칙대로 움직이는 NPC일 경우 동굴 앞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끝까지 나서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고로, 그들 역시 참가자다.
우리에게 그들이 밤의 악령이듯, 그들에게 우리는 아침의 악령인 셈이다.
“······ 무엇을 원하느냐 물었다.”
가라앉은 황제는 참을성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내놓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는 태도.
그리고 지금은 아침이었다.
별빛의 원정 대결도, 혹은 일반적인 전투도 가능한 아침!
허나 가라앉은 황제는 한차례 나를 멸망으로 오인하고 물러난 적이 있다.
그러니 무력의 대결은 아닐 테고, ‘별빛 대결’에서 제법 자신이 있는 듯싶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곤 짧게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
노인의 정체에 대한 의구심.
그 의구심은 지금 눈앞에 있는 가라앉은 황제에게도 적용되었다.
하여, 시험해본 것이다.
“이 물병이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이라면,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정도는 알아봤을텐데.”
나는 다시 품에서 물병을 꺼내어 흔들었다.
동시에 물병은 형태를 바꿨다.
······ 염소 가면으로.
태고의 갑옷에 적용된 옵션 중 하나인 ‘형태 변형’을 이용한 것이다.
물론, 형태만 본떴다.
아무리 정교해도 주인이라면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정도는 알아봤으리라.
헌데, 놈은 아무런 의구심도 갖지 않았다.
그 증거로 놈은 무려 두 번이나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어보았다.
정말로 이상하지 않나.
‘노인이 가짜인 줄 알았건만.’
처음에는 나와 하룻밤을 보낸 그 노인이 진짜 밤의 악령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넌 ‘가라앉은 황제’가 아니로군.”
“그게 무슨······.”
쩌적!
동시에.
놈의 전신에서 균열이 일며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음······?!”
껍질이 깨지듯 그 안에서 나타난 완전히 다른 모습.
가라앉은 황제가 아닌 앙상한 몸과 흰색 머리칼을 지닌 남자였다.
“아아······!! 천존이시여!”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진정으로 가라앉은 황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순간.
【합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추론하여 ‘밤의 악령’의 정체를 밝혀냈습니다!】
【정체가 밝혀진 ‘밤의 악령’이 소멸했습니다.】
【공격력과 체력이 50씩 상승합니다.】
【남은 ‘밤의 악령’은 셋입니다.】
【모든 밤의 악령을 소멸시키면 ‘밤’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밤의 악령은 ‘별빛 원정’에서 패배시켜도 소멸합니다.】
역시나, 밤의 악령이었다.
아침이 되면 참가자로 둔갑하여 혼란을 가중하는 존재!
그러나 단순한 의심만으로는 소멸시킬 수 없다.
합당한 근거가 필요했다.
바로 지금처럼.
‘천존이라.’
게다가 남자가 소멸하기 전 남긴 말이 묘하게 귀에 걸린다.
천존이라 불릴 만한 참가자는 한 명밖에 없었으므로.
천마.
수많은 광신도들을 이끌어 천산의 신처럼 군림하는 자!
악신의 기억에 의하면, 신도들은 천마를 천존이라 불렀다.
‘밤의 악령은 참가자들과도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군.’
그것도 아주 깊은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허나 악령들의 제거는 승리를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공격력과 체력을 50이나 올려주는 건 5성급 별빛으로도 힘드니까.
그리고 악령을 모두 제거하면 ‘밤’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
오로지 별빛의 대결로만 승패가 나뉜다는 의미였다.
마음에 든다.
전부 마음에 들지만, 딱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나를 지켰던 악령.’
동굴의 앞에서 나를 지켰던 그 악령의 정체.
누굴까.
그 악령이 없었다면, 나는 동굴 안에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대체 누구이기에 나를 지켰는가.
‘설마.’
짐작가는 게 한 명 있었다.
‘······ 이자벨라?’
······ 아니다.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이자벨라가 밤의 악령일 리가 없지 않은가.
이자벨라는 나와 약속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바깥에서 기다리기로.
그런데도 만에 하나,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온 게 맞다면.
‘이 게임을 최대한 빠르게 끝내야한다.’
이 빌어먹을 게임을 최대한 빨리 끝내야만 한다.
클리어하는 시간이 늦어질수록 이자벨라가 소멸할 가능성도 높아질 테니.
“라이가. 공격력과 체력이 몇이지?”
고개를 돌려 묻자, 라이가가 답했다.
“그런건 왜 물어보느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하였다.
“방금 본 ‘밤의 악령’은 가라앉은 황제를 흉내냈다. 만에 하나 너를 흉내내는 놈이 나타났을 때를 위함이다. 서로에 관한 정보를 미리 공유하도록하지.”
우리는 같은 편이다.
미리 서로를 파악해두는 게 중요하다!
내키지는 않지만 어느정도는 사실이었기에, 라이가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 60, 58이다. 너는 몇이지?”
“이제 곧 알게 될거다.”
“······?”
화아아악!
【‘라이가’와 ‘란돌프(끔찍한 흉조)’가 ‘별의 원정 대결’을 펼칩니다.】
【‘라이가’의 공격력은 60, 체력은 58입니다.】
【‘라이가’가 패배했습니다.】
【원정에 성공했습니다!】
【현재 성공한 원정은 셋입니다.】
【‘란돌프’가 ‘라이가’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강탈합니다.】
경악하는 두 눈과 떨려대는 볼살.
배신당한 라이가가 치를 떨며 외쳤다.
“너······!!”
【대결에서 패배한 자는 하루동안 ‘별의 감옥’으로 이감됩니다.】
슈웅!
그러나 외침은 이어지지 않았다.
라이가의 신형이 순식간에 증발하듯 사라진 탓이다.
‘며칠은 살아있겠지.’
배신이라면 배신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빠르게 이 게임을 끝내기 위해선.
이로써 세 번째 승리.
그리고 약속대로 라이가의 상태도 그 안에 호전시킬 생각이다.
또한, 궁금했다.
‘책?’
라이가의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그건 세월을 알 수 없는 낡은 서적이었다.
아무런 제목도 적혀있지 않은 책.
스륵.
나는 책을 펼쳐 글을 읽어나갔다.
안의 내용은 별 게 없었다.
평범한 육아일기였으니까.
‘팔가의 전대 주인이 적어놓은 라이가의 성장일기다.’
라이가가 성장하는 모습을 누군가가 보고 적어놓은 일기장.
그중 고아인 아이를 들여와 힘들게 수련시키는 내용이 9할이었다.
‘책의 내용과 기억이 다르군.’
그러나 책에 얽힌 기억은 달랐다.
전대 팔가의 주인은 라이가의 재능에 반해, 라이가의 부모를 죽이고 강제로 어린아이를 납치해왔다.
그리곤 전부 죽였다.
관련된 모든 걸 지웠으며 라이가의 기억 역시 왜곡시켜 놓았다.
‘······ 스승이 아니라 원수인데.’
미친.
원수가 적어놓은 성장일기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을 줄이야.
라이가.
놈의 현실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
나는 서책을 덮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의구심은 어느덧 확신이 됐다.
‘굳이 몰라도 되는 기억들뿐이야.’
천마도도, 무덤의 주인이 소중히 여기는 동전도, 이 일기장 역시도.
전부 굳이 몰라도 되는 기억들밖에 없다.
괴로운 현실과 마주해야만 하는 기억들.
만약 천마가 악신이 자신의 몸을 빼앗으려 한다는 의도를 알게 되면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무덤의 주인은 자신을 만든 고렘마스터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좌절하겠는가.
라이가도 스승이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걸 알게 되면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무덤의 주인이여.”
고오오오.
녀석은 아까부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허나 섬에 온 첫날에 이미 무덤의 주인은 ‘별빛 대결’에서 한 번 이겼다.
다시 대결을 펼칠 이유가 없다는 의미.
【‘허무의 별빛’을 해제했습니다.】
【‘손재주의 별빛’을 해제했습니다.】
······.
【모든 별빛을 해제했습니다.】
허나, 나는 모든 별빛을 해제했다.
그리고.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뭔지 알아야겠다.”
굳이 몰라도 되는 기억.
하지만, 반드시 알아놔야하는 기억이다.
나 역시 ‘가장 소중한 것’과 얽힌 정반대의 기억이 존재할 것이었다.
내 존재의 중추를 파고드는 핵심적인 무언가가.
그러니 알아야겠다.
조금은 망설였던 게 사실이나, 이자벨라가 악령일 수도 있는 이상 더 이상 망설이고 있을 수 없었다.
고오오오.
그런 내 의도를 알아차린 무덤의 주인이 자신의 별빛을 허공에 수놓았다.
【‘무덤의 주인’과 ‘란돌프’가 ‘별의 원정 대결’을 펼칩니다.】
【‘란돌프’의 공격력과 체력이 0입니다.】
【‘란돌프’가 패배했습니다.】
【원정에 실패했습니다!】
【‘무덤의 주인’이 ‘란돌프’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강탈합니다.】
라이가에겐 절대로 보여줄 수 없는 장면.
나의 소중한 것을 라이가가 알게 할 수는 없다.
허나 무덤의 주인은 다르다.
주인을 찾아 심연을 억겁의 시간 동안 돌아다닌 그의 순수성을 믿는다.
내가 돌려주었듯, 그 역시 내게 돌려줄 것이라고.
얽혀 있는 기억과 함께 말이다.
【대결에서 패배한 자는 하루 동안 ‘별의 감옥’으로 이감됩니다.】
슈우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