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라이가는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희미하게 떠오른 기억은 있었으므로.
제아무리 기습당해 쓰러졌다고 한들, 라이가 정도의 강자가 완전하게 정신을 놓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아예 숨이 끊겨 죽지 않는 이상.
눈을 감아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절대 육감의 소유자가 바로 라이가였다.
‘분명히······ 염소는 동굴에서 나왔다.’
조각난 기억을 다시 조립한다.
분해되어 흩어진 편린을 하나하나 주웠다.
그리고 마침내 조각을 완성했을 때.
‘······ 미친.’
라이가는 흠칫 몸을 떨었다.
염소가 동굴에서 나온 이후의 일은 도저히 정상적인 게 없었으니까.
‘이놈은 대체 정체가 뭐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라이가는 염소를 바라보았다.
*
꽈아아아아앙!
고막을 터트릴 듯한 광음.
그 사이에 나타난 거체의 괴물.
“······!!!”
“······.”
사흉(四凶) 바알의 등장과 동시에 시선이 느껴진다.
수많은 강자들의 시선을 한데 받으며, 나는 천천히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자연스럽게.
한 치의 당황 없이.
마치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이 말이다.
‘너무 크다.’
문제는 그냥 타기엔 바알의 동체가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스으으윽!
그러자 마치 내 불편을 알아차린 듯 전신에서 연기를 뿜내며 바알의 크기가 작아졌다.
물론 여전히 크기는 했지만, 산과 같은 크기에서 덤프트럭 정도의 크기로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없던 현상.
‘히든 특성의 진화와 관련이 있나 보군.’
히든 특성의 융화와 진화.
그리고 탈각.
두 단계를 단번에 뛰어넘으며 생긴 변화는 극적이었다.
그 변화중 하나가 바로 이것인 듯싶었다.
바알이 내 의도대로 제알아서 크기를 줄이다니.
관련된 ‘지배력’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난 모양.
“······ 바알.”
동시에, 가라앉은 황제가 입을 열었다.
역시나 심연의 지배자들은 단번에 바알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단순한 소환물이 아닌 진정한 바알로 말이다.
“넌······ 바알의 주인인가?”
뿐만 아니라 바알을 소환하고 탈것처럼 등에 오른 나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알의 주인이냐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사흉을 다루던 옛 제국의 거대 가문들.
하지만 그들은 ‘주인’이라 하기엔 바알을 비롯한 사흉을 완전하게 제어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니 그 가문의 후계자냐는 물음은 아닐 터다.
지금 가라앉은 황제가 묻는 건 바알의 주인, 즉, 내가 ‘멸망’이냐는 뜻이다.
‘날 못 알아보는 건가?’
곧이어 저 청염의 말을 탄 남자가 가라앉은 황제라는 걸 나는 알아보았다.
내가 알아보았다면, 그도 나를 알아봐야 정상이다.
하지만 하루를 같이 보냈던 분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태도.
천마에게서 구해준 노인과 지금 저 본체는 마치 다른 존재 같다.
‘내 변화가 인식을 바꿨나 보군.’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군주 란돌프.
철혈군주의 심장이 진화하고, 영원군주의 심장이 초월하여, 드디어 완성된 나의 이름.
그 특성은 냉철하게 주변을 살피며, 무작위로 규칙 하나를 무시했던 그 수준을 넘어, 심연의 지배자들에게도 강렬한 경각심을 심어주고 있었다.
아예 나를 멸망으로 오해할 정도라면 말은 다했다.
하여, 못 알아본 것을 개의치는 않았다.
지금은 그보다 저 물음에 대답을 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바알의 주인이냐고?
“아니다.”
나는 바알의 주인이 아니었다.
“······.”
그러자 처음으로 가라앉은 황제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다른 지배자들도 술렁이는 게 느껴졌다.
바알의 주인이 아닌 자가, 바알을 탄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으니.
대신 나는 작게 미소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말하지 않았느냐. ‘괜찮은 탈것’이라고. 나는 ‘이것’을 나의 소유물로 여기지 않는다.”
스쳐지나가는 똥개라도 되는 양 나는 바알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만약 내가 ‘멸망’이라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았다.
멸망의 소유물로 알려진 사흉.
하지만 멸망은 사흉을 대륙에 풀어놓았다.
구태어 사흉으로 말미암아 제국이 자멸토록 의도한 걸까?
‘멸망에겐 자신의 것이라는 개념이 없다.’
아니다. 그냥 놔둔 거다.
멸망은 모든걸 파괴하는 자.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건, 아낀다는 뜻이다.
하지만 멸망은 그 무엇도 아끼지 않는다.
아끼는 게 없기에 거리낌없이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소유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무소유(無所有).
사흉 역시 마찬가지다.
“······.”
그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라앉은 황제가 말머리를 돌렸다.
다른 심연의 지배자들도 마찬가지다.
천천히, 멀어져간다.
더 이상의 전투는 없었다.
말 한 마디로 심연의 지배자들 전원을 물린 것이다.
고오오오오-
딱 한 명.
고대의 골렘, 무덤의 주인을 제외하고.
*
푸른 머리칼, 푸른 눈동자.
긴 흰색의 상아가 이마에 솟아있는 여인.
툭. 툭.
스으으으으.
그녀가 걸을 때마다 신체에 닿는 모든 것들이 수분을 빼앗긴 채 말라간다.
풀과 나무를 비롯한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말라 비틀어져 푸석하게 변했다.
“천축의 고래. 네가 이 ‘섬’에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군.”
쩌적!
쩌저적!
허공에 솟아나듯 등장한 한 남자.
그는 천둥으로 이루어진 마차를 모는 존재, 폭풍의 배율자였다.
“그 ‘형태’로 변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거로 아는데 말이다. 아니면 섬 전체를 불모지로 만들 생각인가?”
“······.”
“대답을 바란 건 아니다. 말이 안 통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으니.”
폭풍의 배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천축의 고래.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절대자.
침입자는 결코 살아돌아갈 수 없으며, 영역 전부가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던가.
한데 그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고래가 인간과 비슷한 형태로 변신했다.
‘고래의 형태일 땐 바다의 사신이 되고, 인간의 형태일땐 지상의 사신이 된다는 소문이 정말이었군.’
먼 옛날, 천축의 고래가 세계의 축을 부쉈을 땐 아예 두 형태가 합쳐진 제3의 형태가 되었다는 소문마저 있었다.
하지만 소문만 무성할 뿐 천축의 고래가 자신의 영역 바깥에 모습을 드러낸 일은 근 수천 년간 없었다.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또한, 천축의 고래가 눈독들일만큼 이 ‘섬’의 가치가 뛰어나다는 방증이 아닐는지.
“처음에는 ‘신의 살갗 혼종’이 파놓은 함정 같은 게 아닐까 싶어서 별빛을 모조리 지우고 다녔다만, 생각이 바뀌었다. 천축의 고래여, 손을 잡지 않겠나?”
“······.”
대답은 없었다.
대화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도는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폭풍의 배율자는 재차 입을 열었다.
“이기고 싶지 않나? 아니, 적어도 ‘사흉’은 죽이고 싶을 텐데?”
툭!
천축의 고래가 멈춰 섰다.
그리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폭풍의 배율자를 바라봤다.
‘역시 사흉의 이야기엔 반응하는군.’
사흉, 바알의 등장.
갑작스러운 놈의 출현에 그들은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바알과 그 바알을 탄 ‘끔찍한 흉조’ 때문이다.
‘······ 진짜로 멸망인가?’
솔직히 반신반의였다.
그러나 멸망이라면 충분히 바알을 탈 수 있다.
심연의 옛 주인이라 일컬어지는 사흉을 애완동물처럼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바알이 제 스스로 크기를 줄인 걸 보면, 확실한 굴종의 의미다.
‘허나 바알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상으로 꺼림칙했다. 진짜 멸망과 같이······.’
하지만 바알 때문에 물러난 것은 아니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꺼림칙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게다가 그 태도.
그 여유.
바알의 주인이 아니라는 대답까지도 완벽했다.
만약 바알의 주인이라 하였다면, 한 번 더 의심했을 것이다.
멸망은 그 누구도 거두어들이지 않는다.
적어도 폭풍의 배율자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모두가 놈이 멸망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은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제대로 파악하고 달려들어도 늦지 않았으니.
폭풍의 배율자가 천축의 고래를 향해 재차 말했다.
“도와주마. 이 섬의 주인이 된다면, 멸망의 총애를 받을 수 있을 거다.”
“······.”
“아아.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눈빛이로군.”
폭풍의 배율자는 미소지었다.
천축의 고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심연의 옛 주인들. 사흉으로 알려져 있다만, 사실 오흉이 아니었던가? 천축의 고래여. 멸망의 구혼자들이여.”
“······.”
“걱정하지마라. 떠들고 다닐 생각은 없으니.”
멸망이 탄생하며 함께 나타난 네 괴수들.
하지만 실은 다섯이었다.
천축의 고래는 그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을뿐.
다른 사흉들과 달리 보다 늦게 태어났으므로.
폭풍의 배율자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천축의 고래와 손을 잡으면 내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그녀와 손을 잡으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그조차도 꺼려지는 괴물을 방지해줄 수 있는 게 그녀였으니.
‘태어나지 않은 존재를 방지할 수 있는 건 천축의 고래뿐이다.’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나타나지 않은 건, 그곳에 천축의 고래가 있어서였다는 걸 폭풍의 배율자는 잘 알고 있었다.
지상의 생명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그녀는 그 괴물과 극상성이었다.
“이대로 얌전히 바알에게 자리를 양보해줄 생각은 아니겠지? 양보하지 않으려고 이 ‘섬’에 온 거 아닌가?”
쐐기를 박았다.
천축의 고래가 왜 ‘신의 섬’에 왔는지 궁금했는데, 그 이유를 이제 알겠다.
진정으로 저 ‘끔찍한 흉조’가 멸망이고, 멸망이 부른 게 바알이라면, 당연히 천축의 고래도 있어야하는 것이다.
사흉. 아니, 오흉은 모두 멸망을 사이에 둔 경쟁자들이니.
폭풍의 배율자가 손을 내밀었다.
“내 목적은 단 하나. ‘신의 살갗 혼종’을 죽이는 것이다. 이 ‘섬’은 누가 갖든 상관이 없으니 너에게 주마, 천축의 고래여.”
*
해가 뜨고, 완연한 아침이 되었다.
동굴에서 한참을 멀어진 다음에야 나는 내심 안도할 수 있었다.
‘따라오는 놈은 없는 것 같군.’
하나는 몰라도 다수가 달려들었다면 빠져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을 터.
내 연기가 제대로 먹혔다는 방증이다.
물론, 단순한 연기는 아니었다.
덤벼든다면 한놈은 죽일 자신이 있었다.
또한, 아침이 된 이상 더 이상은 두려울 게 없었다.
‘이제 밤에 덤벼오진 못하겠지.’
놈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오로지 ‘별빛의 대결’만 하도록 유도했다.
그래야 내가 훨씬 유리하니까.
‘밤의 악령도 전투가 벌어진다고 무조건 달려드는 건 아니었으니.’
게다가 밤의 악령 중 하나는 나를 돕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탈각하는 시간 동안 나를 지켜준 게 틀림없었다.
대체 밤의 악령은 정체가 뭔지.
이 섬, 혹은 나와 관련이 있는 걸까?
하여간 그러한 사실들을 파악했으니, 가장 위험한 건 단연코 ‘밤’의 시간이다.
그러나 놈들이 나를 ‘멸망’으로 착각한다면 당연히 밤에 덤벼들진 못할 것이다.
어떻게든 별빛의 대결로 이기려 들겠지.
‘그럼 이제······.’
드디어 생긴 여유.
나는 아주 오랜만에, 나의 변화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느낌상으로도 충분히 변화를 만끽할 수 있었지만, 인간은 본래 보다 정확하게 수치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가장 객관적인 형태로 나의 강함을 확인할 수 있는 창.
‘상태창.’
곧이어 떠오른 창 하나와 그곳에 적힌 변화를 확인한 순간.
‘······ 진짜 미쳤군.’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