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군주 란돌프
나의 몸 안에 이미 존재했던 무한한 그릇.
그것은 진리의 문이며, 동시에 광활한 우주(宇宙)다.
끝없이 팽창하고 뻗어나가는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내 안에 신(神)이 있다고 생각할 만하군.’
이걸 본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신이라고.
이 우주에 비하면 나는 너무나도 하찮은 존재였으니.
무언가를 바치고 공양하며 떠받들어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아무것도 바치지 않고, 떠받들지도 않았다.
하여 나는 이 문을, 나의 그릇으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흘러넘치는 마력을 담는 도구로.
-축하한다. 드디어 너의 ‘문’을 찾았구나.
그 말을 끝으로 ‘입’은 사라졌다.
단순히 문을 찾아 축하한다는 말이 아닐 터.
아마도 나만의 정답을 찾아서 축하한다는 말이겠지.
확실히 이 문을 본 자들은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른다.
열어본 자들도 있을 것이며, 진리의 문에 자신의 소중한 것을 바친 자들도 꽤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무언가를 얻어낸 자들은 강력한 권능을, 초능력과 같은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리라.
‘나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진정으로 바라지 않는다.
나는 진리의 문에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
진리의 문을 그릇으로 사용하려면 나 역시 바치는 게 있어야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아니다.
나는 그간 내 몸을 멋대로 점유한 이 ‘진리의 문’에 자릿세를 받으려는 것뿐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문을 ‘신’으로도 여기지 않는다.
그 말은 내가 곧 ‘신’이라는 건데, 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니까.
스스로 신이 되려는 자들만이 이 ‘진리의 문’에 소중한 것을 바치는 것이다.
‘이 문은 단순한 그릇일 뿐이다.’
나의 소유물에 불과하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히든 특성 ‘영원군주의 심장’을 지녔습니다.】
【히든 퀘스트 ‘군주의 마음가짐’을 통달하였습니다.】
【‘영원군주의 문’이 반응합니다.】
【모든 격이 어우러지며 하나로 이루어집니다.】
【히든 특성 ‘영원군주의 심장’과 ‘영원의 란돌프’가 합쳐집니다.】
【두 히든 특성이 ‘영원군주 란돌프’로 융합, 초월했습니다.】
진리의 문을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이.
진리의 문 어딘가에 잠겨있던 또 다른 문 하나가 열렸다.
영원군주의 문!
그것은 자격이었다.
영원군주가 될 수 있는 자격이 내 격과 함께 어우러진 것이다.
물론 그게 끝일 리 만무했다.
【‘기원(起源) - 종족재건’ 퀘스트가 도달했습니다.】
【‘영원의 수도자’가 ‘신의 섬’에 잠겨있습니다.】
【‘신의 섬’의 주인이 되면 ‘영원의 수도자’가 깨어납니다.】
기원 퀘스트?
시크릿 퀘스트나, 히든 퀘스트는 많이 봤어도 기원 퀘스트라는 건 처음 본다.
‘히든 특성의 기원이 되는 종족. 그 종족을 재건하라는 건가?’
히든 특성의 기원이라.
하지만 처음부터 ‘영원군주의 심장’이었던 건 아니다.
철혈군주의 심장이 영원군주의 심장으로 진화했다.
아마도 진화한 히든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게 첫 번째 조건이었을 것이다.
영원군주의 심장을 지닌 자가, 진리의 문을 열고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만 이 ‘기원 퀘스트’가 도달토록 했을 것이었다.
‘신의 섬에 잠겨있었다······ 멸망에 의해 완전히 멸종한 건 아니었나?’
종족재건을 위해 남겨둔 무언가가 있는 걸까?
확실한 건 가라앉은 황제가 말했던 ‘진리의 문’ 너머에 있는 12개의 별.
이게 그중 하나임은 틀림없었다.
정확히 그게 나의 자격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잠겨있는 ‘영원의 수도자’를 말하는 건지는 몰라도.
‘섬의 주인이 되면 알 수 있겠지.’
신의 섬을 갖게 되면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한 일이다.
이 게임에서 승리하면 그뿐인 일.
어차피 그러려고 했다.
그럴 마음이 없었다면,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었다.
‘이제 나가자.’
바깥으로.
언제까지고 이 망망대해에 표류해있을 순 없으므로.
나는 나를 가둔 알을 찢었다.
나를 막던 벽을 허물고, 부수며,
나를 억류하던 모든 것들을 털어냈다.
【‘탈각(脫殼)’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
눈을 뜨자 어두운 동굴이었다.
동굴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정체 모를 ‘밤의 악령’이 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음?’
뭐지?
갖고 있는 별빛이 요동치는 걸 보면 ‘밤의 악령’이 확실하다.
그런데 왜 밤의 악령이 동굴의 입구를 막아서고 있단 말인가.
‘적의는 없어 보이는군.’
막는 게 아니라, 지켜주고 있는 것 같다.
바깥에서 느껴지는 ‘존재’들에게서, 나를 말이다.
‘밤의 악령이 나를 지킨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바깥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틀림없이 참가자들이었다.
심연의 지배자와 태고의 괴물들.
왜 밤의 악령이 그들과 대치하며 나를 지키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비켜라.”
태양이 떠오르면, 밤의 악령은 사라진다.
어차피 저들과는 마주하게 되어있었다.
굳이 피할 생각도 없었다.
이 섬의 주인이 되어야 할 이유가 하나 늘어났으니.
나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걸리적거린다.”
나를 상대로 대결을 펼칠 생각이 없다면 비키라고.
그러자 그림자의 형상이 한차례 나를 쳐다보곤, 천천히 동굴의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의 미련이 느껴지는 발길.
‘전투가 있었군.’
허나 지금은 밤의 악령보다 바깥의 상황이 더 중요했다.
아무래도 큰 전투가 있었던 것 같다.
수많은 구멍들은 마치 운석이 떨어져서 세상이 멸망이라도 한 것 같았다.
허.
흔적만 보는 것임에도 전율이 일 지경이다.
하지만 나는 차분하게 흔적들을 살피고 상황을 유추해보았다.
‘싸운 대상은 세 명. 한 명은 저 말을 탄 놈이고, 한 명은 저기 쓰러져있는 라이가다. 나머지 한 명은······ 천마.’
천마신공의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하지만 정작 천마는 보이지 않았다.
도망친 걸까?
라이가도 바닥에 볼썽사납게 처박혀 피죽이 되어있었는데, 저 말을 탄 놈이 둘을 그렇게 만든 모양이었다.
고오오오-!!
동시에 내게 적의를 드러내는 존재가 있었다.
거대한 골렘.
저 고대의 골렘은 스스로 작동하며 심연을 지배한 강자다.
쿵! 쿵! 쿵!
강력한 적의를 품은 채 미친 듯이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품을 뒤졌다.
그리고 구릿빛 동전을 놈에게 던졌다.
“돌려주마.”
······ 고오오.
동전을 받아 든 골렘이 급하게 멈춰 섰다.
빼앗은 것을 이렇게 쉽게 돌려줄 줄은 몰랐다는 듯.
원정대결에서 패배한 자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승자는 그것을 갖는다.
그러나 돌려주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었다.
돌려받지 못할 때는 오직 한 가지 경우.
밤의 악령에게 패배하여 빼앗겼을 때뿐이었다.
나는 동전을 받아 든 채 멍하니 서 있는 ‘무덤의 주인’을 보며 말했다.
“무덤의 주인. 너를 만든 제작자가 남긴 마지막 유품이더군. 심연 어딘가에 있을 너의 주인을 아직도 찾고 있는 거냐?”
저 동전 하나에 의지한 채, 고대의 골렘은 심연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본 건 천마도의 기억만이 아니었다.
무덤의 주인의 동전에 얽힌 기억 역시 훑어보았다.
‘제작자는 이미 죽었다.’
‘멸망’에 의하여 자신이 죽기 직전 아이는 저 고렘을 만들었다.
저 동전 하나만 남긴 채 말이다.
한데 무덤의 주인은 아이가 아직도 살아있다고, 심연 어딘가에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심연을 돌아다녔다.
쉬지 않고, 끝없는 세월 동안.
‘무덤의 주인은 동전에 얽힌 기억을 모른다.’
가장 소중한 것.
거기에 얽힌 가장 소중한 기억.
천마는 천마도에 깃든 악신의 의도를 몰랐고, 무덤의 주인은 동전에 얽힌 이야기를 전혀 모르고 있다.
이게 의미하는 게 무엇이겠나.
‘나도 모른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과 그 소중한 것에 얽힌 기억을.’
빼앗겨야만 알 수 있다.
상대가 내게서 빼앗은 소중한 것의 기억을 읽고 다시 나한테 말해줘야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나는 모르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기억일 가능성이 높았다.
천마도와 동전에 얽힌 내용처럼 말이다.
‘나 역시 알아야 한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과 그 소중한 것에 얽힌 이야기를.’
신의 섬은 그저 별의 기억만을 좇는 곳이 아니다.
이곳은, 나 자신을 바로 알게 되는 기억의 공간이었다.
그러니.
“나는 너의 주인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나를 따라라, 무덤의 주인이여.
내가 가장 소중한 것을 돌려주었듯, 너도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돌려주면 된다.
이 게임은 혼자서 풀어가면 승리할 수 없다.
나의 편을 만들어야 한다.
오로지 내 의사대로 움직일 참가자가 있어야만 했다.
숨겨진 것들을 찾아내려면 반드시.
-······.
무덤의 주인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만하면 충분하다.
적의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청염의 말을 타고 있는 남자.
‘내가 아니라 동굴 안의 악령에게 볼일이 있나 보군.’
마찬가지로 적의는 없었다.
하지만 동굴 뒤로 들어간 ‘밤의 악령’에겐 관심이 많은 듯했다.
비키지 않으면 전투도 불사할 기세.
비키든가, 아니면 싸우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
허나 이곳엔 다른 참가자들도 함께 있다.
멀리서 대놓고 이곳을 지켜보는 중이다.
만약 비켜선다면, 그들은 나를 겁쟁이 취급할 것이었다.
게다가 동굴 안의 악령은 어찌 됐든 나를 지켜주었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탈각할 동안 입구를 막지 않았더라면 내 도전은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비켜서지 않는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전투.’
저 말을 탄 남자는 천마와 라이가를 동시에 거꾸러트린 존재.
탈각했으나 그럼에도 쉽지 않은 대상이다.
물론 아침이 될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별의 원정 대결이 된다면 절대로 내가 질 수 없으니까.
다만······.
‘그마저도 석연치 않다.’
버티다가 다른 수로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이상했다.
약자의 악착같은 승리는 저들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오로지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줘야만 한다.
그리고 신의 섬의 주인이 되는 것 이상으로 저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설령 섬의 주인이 된다 한들, 저들에게 얕보인다면 언제든지 섬을 빼앗고자 달려들 것이었기에.
‘내가 바라는 건 궁극적인 승리다.’
단순한 게임의 승리만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진정한 승리를 원했다.
그 누구도 감히 쉽사리 나의 것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다.
판게니아에서도, 이곳 심연에서도 말이다.
게다가 ‘무덤의 주인’이 온전하게 나의 말을 듣게 하려면, 모든 걸 뛰어넘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 나도 마침 괜찮은 탈것이 하나 있었지.”
나는 불꽃을 내뿜는 청염의 말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내게도 썩 괜찮은 탈것이 있었으므로.
그리고 예전부터 궁금했다.
‘이것’을 본 심연의 지배자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는지.
과연 심연에서 ‘이것’이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가지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모를 리가 없다.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이다.
당연히 내가 아는 것 이상으로, 그들은 ‘이것’에 대한 정보를 더욱 많이 갖고 있을 것이었다.
수많은 심연의 지배자들이 한데 모인 지금, ‘이것’에 대한 궁금증을 풀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으리라.
그래서 소환했다.
“바알.”
··· 사흉 바알을.
꽈아아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