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죽이고 싶습니다. (3)
······ 이상하다.
전투가 지속될수록 천마는 의아함을 느꼈다.
가라앉은 황제.
놈이 사용하는 무수히 많은 벌레들.
처음에는 마나 벌레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마력을 먹어치워,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벌레는 끊임없이 복제되며 주인의 소모된 마력을 보충해줬다.
주변 마력을 끌어다가 사용하는 생사경의 경지와 비슷한 맥락이다.
허나 생사경의 경지와 다른 점도 분명히 있었다.
‘나의 내력까지 빨아들이고 있다.’
벌레가 닿는 족족 자신의 내력이 흩어지고, 빼앗긴다.
마치 산공독에 당한 기분이다.
끓어넘치는 내력을 쉽사리 사용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력마저 빼앗아갔다.
이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금강불괴(金剛不壞)와 만독불침(萬毒不侵)의 경지는 진즉에 뛰어넘었다.
사사로운 기운이나 존재가 침투하여 내력을 흩트리고, 빼앗아가는 건 불가하다.
‘······ 실로 불가해하군.’
······ 불가할 터였다.
천마조차조 집중해야 겨우 보일 정도로 하찮은 크기의 벌레.
하지만 그냥 벌레라고 하기엔 석연찮다.
생명력 따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주인의 명령을 듣는 도구.
정해진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에 더 가깝다.
확실한 것은, 이대로 싸움이 지속될수록 불리한 건 자신이라는 것이다.
천마도 없이는 저 무한하게 쏟아지는 벌레의 포위망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무한하게 증식하는 벌레들을 뚫고 가라앉은 황제에게 닿을 수 없었다.
‘불리하다. 이 내가?’
인간을 포기한 채, 심연에 발을 들이고선 처음있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천마도가 없다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할 듯싶었다.
가라앉은 황제.
놈은 강하다.
심연에서 만난 어떠한 괴물들보다도 더.
하지만 불리하다는 게 이길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과거에도 자신보다 강했던 존재들은 많았지만, 결국 그의 앞에 모두 목이 잘렸다.
‘허나, 파악했다.’
순간 천마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마구잡이로 강환을 던져댄 듯 보이지만 모두 저 벌레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파악했다.
가라앉은 황제가 가진 힘의 비밀을.
‘벌레들은 특정한 행동 규격이 존재하고, 서로에게 신호를 보낸다.’
잡아내는 게 불가능할 터인 소리를 천마는 잡아냈다.
오직 벌레를 다루는 주인인 ‘가라앉은 황제’에게만 들릴 터인 소리를 말이다.
그건 소리라기보단 파동······ 파장에 가까웠다.
뇌의 파장.
상단전(上丹田)의 울림!
‘놈은 상단전을 개방했다.’
상단전을 개방하면 신묘한 권능이 생긴다.
미래를 읽는 신통력과 같은 초능력이.
더 멀리 보고, 더 깊게 생각하며, 더 많은 현상을 일으킨다.
하여 신(神)으로 착각되어 추앙받는 일이 더러 있다.
하지만 상단전을 개방한 자들은 하나같이 단명하기 마련이었다.
상단전 자체가 생명의 원천을 대가로 사용되는 힘이기 때문이다.
심연에 가라앉았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저 많은 벌레를 끊임없이 다루기 위해선 생명의 원천을, 혹은 보다 소중한 것을 바쳤을 터.
과연 놈은 ‘진리의 문’에 무엇을 바쳤을까?
“인정하마. 너는 강하다.”
천마가 입을 열어 인정했다.
지난 세월을 둘러봐도 세 손가락에 꼽히는 일.
그러나 천마의 얼굴엔 여유가 피어났다.
상단전을 개방한 건 가라앉은 황제만이 아니었기에.
“하지만, 내가 더 강하다.”
천마는 웃었다.
위험한 상황에서 더 깊게 사고하는 것.
그리하여 순식간에 약점을 파악하고, 파훼할 방법까지 떠올리는 게 자신의 능력이었으므로.
마침 저 벌레들을 파훼할 방법이 떠올랐다.
과연 벌레들이 주고받는 신호를 교란하면 어떻게 될까?
‘천마군림보.’
상단전을 개방하고, 같은 파장을 일으킨다.
천마가 지면에 발을 내디뎠다.
쿠릉-!
짧은 울림.
동시에 그를 둘러싼 검은 장막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아아아!
스아아아아아아아아!
······ 연기가 퍼지듯 벌레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러자 가라앉은 황제가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무적의 방패는 깨졌다.
남은건 놈의 심장에 꽂아넣을 창.
‘광룡진천하(狂龍震天下).’
쩌적! 쩌저적!
전신에서 번개가 일며 푸른 용의 형상이 맺힌다.
열 개에 달하는 강환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합쳐진 형태.
순간적으로 전신이 허한 느낌이 들만큼 광활한 내력을 사용하는 기술이지만, 그렇기에 직격한다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신조차 죽였던 기술이니, 가라앉은 황제라고 별 수 있을까.
구오오오오오오오-!
광룡이 입을 벌리며 가라앉은 황제를 향해 쏘아졌다.
꽈릉!
꽈아아아아아앙!
이윽고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버섯 모양의 연기를 일으키며 하늘을 가득 메웠다.
압도적인 광경.
······ 허나, 천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뚫고 가야 정상일진대, 폭발이라니?
방패가 사라진 이상 가라앉은 황제가 광룡진천하를 막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찰나, 천마는 폭발의 중심부에 선 존재를 확인했다.
누군가가 가라앉은 황제를 지킨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 네놈은?”
*
빌어먹을.
정말 빌어먹을 일이었다.
“쿨럭!”
사고를 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몸이 나갔다.
황제의 얼굴을 한, 가라앉은 황제를 지키기 위해서.
덕분에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순간적으로 5문의 봉인을 모두 풀어헤치지 않았다면 세포단위로 분열되었으리라.
그나마 살아있다는 것에 위안을 둬야할는지.
“괜찮······ 으십니까? 폐하.”
“······.”
가라앉은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깊게 가라앉은 눈과 표정.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저 얼굴을 착각할 리는 없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확실해졌다.
황제다.
신성 아르혼 제국의 초대 황제!
오랜시간 잠든 황제의 얼굴을, 라이가가 착각할 리 만무했다.
물론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제국에서 잠들어있어야할 그가, 왜 깨어난채 심연 속에 있단 말인가.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폐하.”
후!
라이가가 숨을 들이마셨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라이가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이 자는, 가라앉은 황제는, 제국의 황제와 동일인물이다.
그리고 팔가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라이가는 황제의 검이었다.
애초에 팔가는 제국보단 황제를 지키고자 만들어진 집단.
황제가 곧 제국이며, 제국은 곧 황제이니, 황제를 지키는 게 제국을 지키는 일이다.
‘차라리 잘됐다.’
이놈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제국을 위협하는 괴물들이다.
그러니 황제를 제외한, 이곳에 모인 멸망의 파편 전부를 사냥한다.
이미 5문의 봉인을 해제한 상태.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어차피 죽는다면 이곳에 모인 모든 파편 소유자들을 데려간다.
‘개방.’
라이가는 모든 ‘가호’를 개방했다.
곧이어 황금빛이 돌며 전신의 상처가 빠르게 치유됐다.
전신이 회복된 뒤, 라이가가 천마에게 검을 겨눈 채 말했다.
“괴물들이여. 나는 네놈들의 천적, 사냥꾼이다.”
*
이자벨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라이가와 천마의 대결을,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참가자들과 밤의 악령들까지도.
참가자들도, 악령들조차도 본분을 잊은 채 대결을 지켜보기만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상대를 밑바닥까지 파악해야 승리할 수 있으니까.’
밤이 되어 상대를 잡아봤자, ‘별의 감옥’에 하룻동안 이감시키는 게 전부다.
최종적으로 악령이 승리하려면 참가자 모두를 파악하고 ‘연기’해야만 했다.
참가자들 역시도 상대의 역량을 전부 파악해야만 승리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이유 보다는, ‘심연의 강자’가 싸우는 모습이 퍽 흥미로운 듯싶었지만······.
꽈릉!
꽝! 꽈앙!
쉴 새 없이 주고받는 공격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다.
확실한 건.
‘라이가가 우세하다.’
천마가 밀리고 있다.
내력을 바닥까지 긁어 사용했다지만, 라이가의 무력 역시 진짜였다.
5문까지 전부 개방한 라이가는 그야말로 무적이었다.
“아아, 저놈이 소문의 ‘그놈’이었나?”
“인간 파편 사냥꾼?”
라이가는 심연의 주민들에게도 꽤 유명한 모양이었다.
참가자들 역시도 유심히 라이가를 지켜보고 있었으니.
“흥미롭다. 파편 사냥꾼이 ‘가라앉은 황제’를 왜 지키는 거지?”
폭풍의 배율자는 이 상황이 상당히 재밌는 듯싶었다.
인간이 심연의 지배자를 지키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래도 이대로면 라이가가 천마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천마만 죽인다면, 이 동굴을 노리는 건 단 하나.
무덤의 주인뿐이다.
이자벨라 혼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이다.
‘라이가를 응원하게 될 날이 올줄은 몰랐어.’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재수없는 라이가를 응원하게 될 날이 올줄이야.
하지만 응원은 오래가지 못했다.
푸욱!
“폐, 폐하. 어째서······?”
라이가의 가슴팍을 꿰뚫은 손.
다름아닌 ‘가라앉은 황제’가 라이가를 공격한 것이다.
자신을 지키고자 금기를 어긴 라이가를!
하지만 가라앉은 황제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말했다.
“거치적 거린다.”
거치적 거린다고.
자신의 앞을 막지 말라고.
“커헉!”
라이가가 검은 피를 토해냈다.
동시에 라이가의 전신을 수놓은 황금빛이 빠르게 사그러들었다.
거의 모든 생명력이 고갈되었음을 뜻했다.
5문과 가호를 모두 개방한 부작용.
툭!
결국 라이가는 혼절한 채 지면에 떨어졌다.
이대로면 머지않아 라이가는 죽을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로군. 자신을 지키려한 자를 죽이다니.”
그 장면을 보며 천마는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제대로 인간을 버린 놈이었다.
그 어떤 측은지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비웃음과는 별개로 천마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라이가를 상대하며 진원지기까지 사용한 탓이다.
반면 가라앉은 황제는 어느덧 벌레를 군집시키고 있었다.
다시금 무적의 방패가 생성된 것이다.
‘이대로면 필패로군.’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그럴 힘도 없었다.
하다못해 천마도라도 있었다면.
그래, 천마도만 있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후웁!”
천마가 내력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발을 박찼다.
설마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도망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
이자벨라의 두 눈에 다급함이 들어찼다.
천마가 향한 곳은 가라앉은 황제가 아니다.
자신이 서있는 동굴 앞!
그러나 이자벨라는 안중에 없다.
천마가 노리는 것은 동굴의 안에 있는 것이다.
란돌프에게서 빼앗긴 ‘소중한 것’을 되찾기 위함이 틀림없었다.
【‘밤의 악령’이 ‘천마’를 상대로 ‘원정 대결’을 시작합니다.】
【‘밤의 악령’이 승리했습니다.】
【‘천마’의 두 번째로 소중한 것을 빼앗았습니다.】
【‘밤의 악령’에게 빼앗긴 ‘소중한 것’은 절대로 되찾을 수 없습니다.】
【‘천마’가 ‘별의 감옥’에 이감됩니다.】
【승리한 ‘밤의 악령’은 다음날 저녁까지 ‘원정대결’을 펼칠 수 없습니다.】
이자벨라는 다급히 천마를 상대로 대결을 펼쳤다.
눈 깜빡할 사이에 패배한 천마가 증발했지만, 이자벨라는 똑똑히 보았다.
천마의 입가에 피어난 미소를.
비록 패배하여 소중한 것을 잃었지만, 어찌됐든 죽지는 않았으므로.
고오오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무덤의 주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가라앉은 황제 역시도 그녀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이자벨라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결 불가?’
승리할 경우 그날은 연달아 대결을 할 수 없다는 말.
이 역시 지금에서야 안 규칙이다.
허나 이자벨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덤의 주인과 가라앉은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자벨라의 소멸을 바라고 있었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느덧 밤하늘이 조금씩 색을 바꾸는 중이었다.
지평선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이자벨라는 굳건하게 동굴을 지켰다.
어쨌든 자신이 대결을 펼칠 수 없다는 걸, 저들은 모를 터이니.
차아아아악!
태양이 보일수록 이자벨라의 전신이 타올랐다.
이제 변신의 순간이 오면, 저들에게 이자벨라의 정체가 들통날 테고, 소멸을 맞이할 것이다.
이자벨라는 떠오르는 태양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당신을 죽이고 싶습니다.’
마치 운명의 장난 같았다.
이어 이자벨라는 동굴의 안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설령 자신이 보았던 기억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 괜찮다.
괜찮았다.
그녀는 란돌프를 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악인이 아니다.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조종하여 파탄시킬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란돌프 역시 말못할 사정이 있었으리라.
그러니 이 모든 상황을 만든 신이 있다면.
그 신을, 죽이고 싶었다.
‘란돌프님. 나의 별, 나의 왕이시여.’
이자벨라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 비켜라.”
동굴의 안쪽에서, 란돌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