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죽이고 싶습니다. (2)
쿠아아아아아앙!
가라앉은 황제가 손을 휘젓자, 지상에 균열이 일며 소용돌이가 치솟기 시작했다.
소용돌이는 닿는 모든걸 빨아들이고 가라앉혔다.
신의 위엄에 버금가는 가공할 위력.
그것을 본 천마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네놈이 가라앉은 황제인가 뭔가 하는 놈이었나?”
쿠릉!
천마가 발을 굴렀다.
그러자 지면이 반으로 쪼개지며 섬 전체가 요동쳤다.
부우우웅-
곧이어 천마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게 떠올랐다.
작은 모래와 돌무더기 따위가 내력에 의해 더욱 잘게 쪼개지더니, 이내 둥글게 압축되어 강을 머금은 10개의 환(環)을 만들었다.
신조차 증발시키는 힘.
바로 강환이다.
“모두 생각하는 게 비슷한 모양이군. 그렇지 않나?”
그들에게 원정 대결이니 별빛의 충돌이니 하는 건 어울리지 않다.
서로가 죽고 죽이는 피튀기는 전투만이 스스로의 존재의의를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니 죽이자.
이곳에서, 서로 죽이는 거다.
‘재밌군.’
천마가 짙게 웃어보였다.
이곳, ‘신의 섬’에 모인 자들은 하나같이 괴물이다.
몇 개의 심연영역을 지배하며 왕으로 군림하는 놈들이었다.
셀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 힘을 키운 가공할 괴물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진정한 왕이 되기 위해서.
진정한 심연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특히 저놈은 꽤 유명하지.’
가라앉은 황제.
일전에 만난 노인이 아니라 저놈이 진짜다.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 심연의 왕은 드물기에.
하물며 ‘가라앉은 황제’는 여러 의미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로스를 길들인 자.’
가라앉은 황제가 타고 있는 말.
저 말은 한때 심연영역 3개를 지배한 왕, 그로스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따르지 않기로 유명했던 말을 가라앉은 황제가 길들인 것이다.
자신조차도 실패했건만.
하여, 놈과는 꼭 붙어보고 싶었다.
“죽거라.”
동시에.
쉬잉-
수아아아악!
10개의 강환이 가라앉은 황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
“······!!!”
쾅! 쾅! 콰르릉!
쉴 새 없이 터져댄다.
강환 하나가 터질 때마다 대격변이 일 듯 세상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가라앉은 황제 역시도 ‘균열영역’을 만들어 대응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이는 전투.
‘밤의 악령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건가?’
이자벨라는 난데없이 벌어진 전투에 어안이 벙벙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밤의 악령 모두 위치를 알 수 있다.
지금쯤이면 다른 세 명의 악령들이 달려오고 있을 터.
아니, 밤의 악령만이 아니다.
이 정도 전투의 규모라면, 섬의 모두가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 이곳으로 전부 모일 거야.’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밤의 악령과 참가자들 전원이 모인다.
멍하니 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만약 ‘태어나지 않은 존재’라도 나타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이자벨라는 시선을 돌렸다.
천마와 가라앉은 황제가 대결을 펼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유일한 기회였으므로.
‘무덤의 주인!’
지금이라면 무덤의 주인과 1:1이 가능하다.
하지만 무덤의 주인은 이미 한 발짝 물러나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전투영역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그 결과 그녀와도 멀어지게 되었다.
찰나의 고민.
이자벨라는 답을 내렸다.
‘······ 나는 이곳을 지킨다.’
잡으려면 잡을 수는 있겠지만, 무덤의 주인 하나를 잡으려고 동굴을 벗어날 순 없다.
란돌프를 지킨다.
오로지 란돌프를 지키고자 그녀는 이곳으로 넘어왔으니까.
“그건 뭐지? 마력을 먹어치우는 벌레인가? 재밌는 충술(蟲術)을 사용하는군!”
천마는 들떠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가라앉은 황제가 사용하는 힘의 원리를 깨달았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결코 확인할 수 없을만큼 작은 벌레.
“하! 가라앉히는 게 아니라 갉아먹는 거였나!”
그 벌레가 마력을 갉아먹는다는 걸!
가라앉은 황제가 사용하는 회오리나 검은 영역은 모두 그 벌레들로 채워진 장소다.
워낙 양이 많아서 분간하는 게 힘들었을뿐.
심지어 그 벌레들은 강환조차도 어느정도 상쇄하는 듯보였다.
재미는 있지만, 아쉽다.
결국 사술에 불과하다.
사이한 술법 따위로는 천마신공을 감당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천마신공은 내력을 폭발적으로 증폭시켜 압도하는 기술.
벌레들이 아무리 많아봤자 내력을 먹어치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반면 그의 내력은 무한대(無限大)에 가까웠다.
고오오오오오오-!
다시 한 번 천마의 주변이 들끓는다.
그리고 솟아오른 모든 게 천마에게 흡수되었다.
만물의 내력을 빨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바꾸는 능력.
무공의 영역을 벗어난 자만이 닿을 수 있는 경계의 힘.
‘생사경(生死境).’
생사경은 천마신공을 익히는 자만이 닿을 수 있는 탈마의 경지다.
벌레들 따위로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천마의 주변으로 20개에 달하는 강환이 생성되었다.
“어디까지 먹어치울 수 있는지 보자꾸나.”
그야말로 창과 방패의 대결.
하지만 천마는 저 방패를 뚫을 자신이 있었다.
*
경천동지.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노한다.
섬의 모든 이들이 그 전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법이군.”
별빛을 삭제시키던 ‘폭풍의 배율자’도,
“더 깊은 심연속 존재들의 대결이라. 귀한 장면인걸?”
‘별 부수는 자’도,
“······.”
섬을 부수려던 ‘천축의 고래’도,
“여기서 작당모의라도 하는 거냐?”
······ 그리고 라이가 역시도.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함부러 나서지 않는다.
지금은 오로지 천마와 가라앉은 황제의 시간이었기에.
그들은 암묵적으로 침묵한 채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군.’
그 괴물들의 행태에 라이가는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심연의 괴물 따위가 명예와 예의를 중시하는 건지.
지금 저 둘을 공격하면 단번에 경쟁자를 제거할 수 있을진대.
여태껏 그가 경험한 심연속 괴물들은 모두 그랬다.
틈만 보이면 잡아먹으려고 들었고, 동족이라 할지라도 자비를 두지 않았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심연의 괴물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다르다.’
이놈들은 다르다.
이곳 ‘신의 섬’도 마찬가지다.
여태껏 라이가가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심연.
하지만 진정으로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이놈들 전부가 멸망의 파편 보유자다.’
참가자 전원이, 멸망의 파편 보유자라는 것!
라이가 역시도 ‘파편’을 보유하고 있기는 했다.
괴물을 죽이려면 괴물이 되어야했으니.
아마도 이 게임에 참가하기 위한 조건이 ‘멸망의 파편’인 듯싶었다.
‘그럼 염소가 파편 보유자라는 말인가?’
다만, 그럴 경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끔찍한 흉조라 칭해지는 염소.
사신교의 간부이며 자신이 심연으로 데려온 염소 역시도 파편의 소유자라는 건지.
염소는 모든 ‘관찰’을 차단시키는 힘을 지녔다.
그래서 파악할 수 없었던 게다.
만약 염소 역시 파편을 지녔다면······.
‘염소도 제거해야할 대상이다.’
파편을 지닌 괴물은 죽여야만 한다.
그것이 팔가의 무덤에 맹세한 내용이었다.
설령 상대가 누구더라도 마찬가지다.
라이가는 이맛살을 구겼다.
파편을 지닌 괴물들 전원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아무리 그라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쁜 기회는 아니었다.
이곳에서 놈들의 무력 따위를 미리 파악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태어나지 않은 존재, 그리고 염소는 어디간 거지?’
그 둘이 보이지 않았다.
섬 전체를 아우르는 대결.
이 대결을 안 보고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감옥에 이감되어 볼 수 없는 상황이거나, 그도 아니라면······.
‘밤의 악령이 뭘 지키고 있는 거지?’
······ 동굴 앞을 지키고 있는 밤의 악령.
저 동굴 안에 뭔가가 있는 건 아닐는지.
꽈아아아아아앙!
“끄르르르!”
불현 듯 천마가 괴성을 내질렀다.
천마와 가라앉은 황제의 대결은, 신과 신의 전투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지만 천마는 시간이 지날수록 펼쳐지는 강기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점차 이성을 잃어갔다.
가라앉은 황제에 의해, 조금씩 가라앉고 있는 것이다.
대해처럼 무한해보이던 내력이 조금씩 사그러들고 있었다.
“‘천마도’만 있었다면 이딴 벌레 따위는······!”
천마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가장 소중한 것인 천마도가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무기 없이 전장에 나온 셈.
무기에 제약을 받지 않는 절대고수라고는 하나, 천마도는 단순한 무기가 아니다.
천마의 손과 발이었다.
허나 가라앉은 황제도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쩌적!
갑옷과 투구가 깨지고 그 안에 형태가 드러났다.
계속되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깨진 것이다.
강환에 의한 공격을 아예 무(無)로 되돌리는 건 불가능했으니.
이어, 젊은 남자의 얼굴이 얼핏 보인다.
새까만 머리칼과 칠흑 같은 눈.
공허한 눈빛과 핏빛하나 없이 새하얀 얼굴로 그는 무정하게 천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럴 리가.’
······ 그리고 저 얼굴을, 라이가는 알고 있다.
순간 라이가가 미간을 찌푸렸다.
동공이 흔들리고, 안색이 푸르게 변했다.
그만한 자조차도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 잘못 봤을 것이다.
그래. 잘못 본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이곳 심연에 아는 얼굴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가라앉은 황제’의 얼굴은 몇 번을 봐도 눈에 익었다.
결국 라이가는 경악하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 황제········· 폐하?”
*
그릇.
무언가를 담는 기구.
담아내는 내용물이 많으면 그릇은 넘친다.
그릇이 작으면 담아낼 수 있는 내용물도 적을 수밖에 없다.
마력을 담는 몸의 공간도 마찬가지다.
특히 플레이어는 시스템에 의해 그릇이 정해져있었다.
‘레벨에 따른 한계치.’
레벨이 높으면 한계치도 높기 마련.
특히 나의 그릇은 여타 다른 플레이어들보다도 큰 편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천마신공으로 증폭된 마력을 온전하게 사용하려면.
더 나아가 천마신공을 대성하려면 압도적으로 커다란 그릇이 필요했다.
진정으로 세상을 담을 수 있는 무한한 그릇 말이다.
그럼, 그 무한한 그릇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답은 내 안에 있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또한- 이미 무한한 그릇은 내 안에 있었다.
준비된 상태였다.
일전에 한 번 본 적도 있지 않은가.
‘진리의 문.’
그 거대한 눈과 입.
놈들이 바로 진리의 문이며, ‘천상’이다.
그리고 무한한 그릇이다.
게다가 나는 마음만 먹으면 진리의 문을 찾을 수 있다.
볼 수 있다.
그럴 수 있도록 예전에 이미 선물해줬으니까.
이제야 알겠다.
왜 이걸 나한테 준 건지.
‘진리의 눈.’
히든 특성 대현자가 진화한 이름, 진리의 눈.
그 진리의 눈으로 진리의 문을 찾는다.
곧이어 내 앞에 문 하나가 덩그러니 나타났다.
‘문을 열어라.’
나는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너머엔 망망대해와 같은 무한한 그릇이 있었다.
-축하한다. 드디어 너의 ‘문’을 찾았구나.
무한의 영역에서 ‘입’이 말했다.
생각보다 빨랐다는 듯이.
그러나 진심어린 축하의 인사였다.
그와 동시에.
【모든 격이 어우러지며 하나로 이루어집니다.】
【히든 특성 ‘영원군주의 심장’과 ‘영원의 란돌프’가 합쳐집니다.】
【두 히든 특성이 ‘영원군주 란돌프’로 초월합니다.】
······.
【‘탈각(脫殼)’이 완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