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골탈태
백성전.
그곳에 등장한 101번째 성좌!
찬란한 별빛을 흩뿌리며 나타난 불가해한 존재에게 성좌들의 관심은 쏠릴 수밖에 없었다.
“너는······!”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
그 역시 101번째 성좌를 보며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모든 법칙을 초월한 성좌의 출현은 그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101번째 성좌의 정체다.
“············ 물음표?”
성좌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희뿌연 안개로 가려져 있었다.
가려진 얼굴 위로는 물음표(?) 하나만 떠 있을 따름이었다.
저런 성좌는 처음 본다.
아니, 물음표를 과연 성좌라 칭할 수 있는 걸까?
성좌란 드높은 영광을 지녀 별이 된 자들.
수수께끼와도 같은 자가 성좌가 될 수는 없다.
“정체가 무엇이냐? 어떻게 101번째 성좌가 된 거지?”
하여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음표에서 느껴지는 기색은 아무것도 없었던 탓이다.
다른 성좌들처럼 영광을 지니지도, 성스럽지도 않았다.
너무나도 평범하다.
이윽고, 물음표의 얼굴을 지닌 성좌가 입을 열었다.
“나는 ‘진리의 문’을 열고 나온 자.”
“잠깐. 뭐라고?”
“진리의 문?!”
듣고 있던 성좌들은 기겁했다.
진리의 문!
이름은 알지만 아무도 실체를 확인하지 못한 ‘문’의 존재를 언급했으므로!
하물며 그 문을 열고 나왔다고 한다.
동시에,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는 관련된 기억을 떠올리며 표정을 굳혔다.
‘설마 그때 보았던······.’
모든 별빛을 사용하여 성좌의 자격을 박탈당하던 순간.
란돌프의 이야기에 만족한 그는 웃으며 소멸하려 하였다.
그렇게 계속해서 그려지고 있을 때, ‘건너편’에서 나타난 존재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입 하나.
-더 내놓을 게 있나?
··· 그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와 지금 저 물음표의 목소리가 똑같았으니까.
란돌프의 이야기를 더 보고 싶다고 소망하자 나타난 입.
-보고 싶다고 했지 않나. 그럼 더 내놓을 게 있어야지?
그는 어둠 속에서 나타난 ‘입’에게 자신의 모든 걸 넘겼다.
-여태껏 쌓아온 이야기라. 재밌군.
그리하여 모든 ‘이야기’를 먹어치운 ‘입’은, 찬란한 영웅의 성좌의 격을 드높여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로 만들었다.
‘그건 분명히 진리의 문이었다.’
하여 그는 그 입이 ‘진리의 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한데, ‘진리의 문’을 열고 나온 자라니?
게다가 저 물음표는 그때의 ‘입’과 똑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초유의 관심 속에서, 물음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순수의 성좌’이니라. 모든 규칙이 존재하기 이전에 있었던 백성전 최초의 성좌이며, ‘가장 높은 별’이 되어 ‘진리의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게 허락되었던 자가 나이니라.”
“가장 높은 별······!”
“그럼 왜 다시 나온 거지?”
가장 높은 별.
백성전의 성좌들이 바라고 마지않는 자리.
모든 성좌들을 재치고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나는 별만이 가질 수 있는 위치다.
그리고 ‘순수의 성좌’는 백성전이 만들어진 뒤 최초로 ‘가장 높은 별’이 된 자라는 말이었다.
그러자 ‘순수의 성좌’는 말했다.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졌으나, 실패했기 때문이다.”
“실패했다?”
“순수의 성좌여. ‘가장 높은 별’이 되면 기회를 얻기는 하는 건가?”
그들은 간절한 태도로 물었다.
이곳에 모인 성좌들은 모두 한 번씩 실패한 자들.
누구보다도 새로운 기회를 갈망하는 존재들이었기에.
순수의 성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건 본격적으로 ‘가장 높은 별’의 쟁탈전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성좌들이여, 지금까지의 미적지근한 태도로는 결코 ‘가장 높은 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뚜벅. 뚜벅.
순수의 성좌가 앞으로 나아간다.
이후 순수의 성좌가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 앞에 마주섰다.
“투쟁하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황금률’을 모아라. 다른 성좌를 짖밟고, 올라서서 ‘가장 찬란한 황금률의 별빛’을 완성하는 자만이 ‘가장 높은 별’이 될 수 있을 테니!”
“······ 선전포고인가?”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는 표정을 굳혔다.
지금까지 성좌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기존의 방식을 답습했고, 규칙에 어긋나는 짓은 최대한 멀리했다.
그것을 통틀어 ‘미적지근한 태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순수의 성좌는 여태껏 나타난 성좌들과 백팔십도 달랐다.
영광스럽지 않다.
그러자 순수의 성좌는, ‘가장 찬란한 영웅의 성좌’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너희는 정녕 멍청하구나.”
“······.”
계속해서 선을 넘는다.
이에 가장 찬란한 성좌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순수의 성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리어.
“멍청한 성좌들이여!”
도발했다.
“진정으로 백성전이 이곳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느냐?”
이제 제발 좀 깨달으라는 듯이.
*
천천히 눈을 뜬다.
뚜둑. 뚜두둑!
목을 꺾어 뭉친 근육을 풀었다.
손을 들어 흔들어도 보고, 깍지를 껸 채 기지개를 펴기도 하며 몸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걸 확인했다.
“음.”
내 몸이 맞다.
아무런 이상도 없다.
허튼 수작을 버리려던 악신의 의도는 대차게 실패한 셈이었다.
“도망쳤군.”
결국 악신은 천마도의 안으로 도망쳤다.
왜 나를 콕집어 ‘탐욕의 악마’라고 칭한 지는 여전히 그 이유를 모르겠지만, 놈에게서 얻어낸 게 아예 없지는 않았다.
눈앞에 떠오른 글귀들.
그것을 보며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스킬 ‘천마신공(1Lv)’을 체득했습니다.》
《히든 특성 ‘손재주’에 의해 2Lv로 격상합니다.》
《업적 ‘초대천마의 후계자’를 달성했습니다.》
《‘위대한 위상’에 따라 명예를 두배(3,000)로 획득합니다.》
《‘명예’가 40,000을 돌파했습니다.》
《명예의 성소에서 ‘거룩한 자격’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천산(天山)’에 입장할 권리가 주어집니다.》
악신에게서 천마신공의 묘리를 빼앗은 것이다.
아직 완벽하게 체득하진 못했으나, 그럼에도 확실하게 내 스킬로 만들었다.
-인간을 버리지 않고 천마신공을 대성할 수 있는지 두고보마!
악신의 마지막 단말마였다.
이후 놈은 천마도로 꽁꽁 숨어버렸다.
‘애초에 내 검이 아니었으니.’
그래도 이만하면 됐다.
어차피 천마도의 현재 주인인 천마를 죽이는 게 아닌 이상에야, 천마도의 온전한 주인이 될 수는 없었다.
물론 ‘초대천마의 후계자’라는 명표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보자마자 어이가 없었다.
내가 악신의 후계자라니?
어깨를 으쓱하며 나는 스킬화 된 천마신공의 정보를 살펴보았다.
【천마신공(2Lv)】
-수라가 되기 위한 공부.
-순수한 악의 기질을 지닌 자만이 익힐 수 있다.
-내공(성력)을 증폭시키며 강(强)의 기운을 폭발적으로 늘려준다.
-천마신공의 성취에 따라 증가하는 폭이 커지지만, 그와 비례하여 ‘악’의 저항력을 상실하게 된다.
-또한 천마신공의 성취가 늘어날수록 증폭되는 내력을 견디지 못하면 ‘그릇’은 깨지고, 폐인이 된다.
적혀있는 정보는 길지 않았다.
하지만 정보를 확인한 즉시 나는 한 마디를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쳤군.”
진짜로 미쳐버렸으니까.
내력을 증폭시켜주는 스킬이라니!
이런게 있다는 말은 듣도보도 못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내력으로 찍어내리는 기술이 바로 천마신공이었다.
히든 특성과 맞먹는 기능.
그도 그럴게 ‘천상’ 역시 레벨에 따른 능력치 상한을 1.2배로 늘려주지 않았던가.
천마신공은 ‘성력’만 늘려주긴 하지만, 그 증폭율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에 따른 부작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
‘어쩐지 몸에 기운이 넘친다 싶더라니······.’
심호흡을 했다.
얼마나 증폭했는지, 상태창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상태창을 띄우기도 전에.
《‘악의 자질’이 꿈틀거립니다.》
《‘준비된 자’의 ‘그릇’이 확장됩니다.》
《‘탈각(脫殼)’이 진행됩니다.》
육체가 경직된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곧이어 온몸의 피부가 일어나더니, 실타레처럼 풀어지며 고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탈각(脫殼).
이름 그대로 껍데기를 벗고, 새로이 육체가 재구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환골탈태(換骨奪胎).
문제는 이곳이 신의 섬이고, 나는 아직 도전자의 신분이라는 점이었다.
72시간 이상 ‘원정대결’을 펼치지 않으면 ‘밤의 악령’이 찾아온다.
만약 탈각의 진행 중에 누군가가 찾아오면 내 목숨은 없다고 봐도 좋다.
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멈춰야 하는가, 멈추지 말아야 하는가.
허나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탈각이 이뤄질지 모른다.
‘그릇. 내력을 담는 신체의 기능을 끌어올리는 일이다.’
또한 이번 기회에 그릇을 키우지 않으면 폐인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일장일단.
결국 선택하기 나름이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탈각의 기회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
“아아······.”
이자벨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별빛, 영원의 란돌프.
지금은 저걸 지키는 게 문제가 아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별빛이 보여준 기억.
그것이 진짜인지 묻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여태껏 자신을 농락해온 것인지.
모두를 속여온 것인지 말이다.
별빛의 기억이 만약 진실이라면······ 그건 무슨 일이 있어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 몸이?’
그때였다.
몸이 점차 굳어가기 시작했다.
허나 지금 자신은 ‘밤의 악령’이 아닌 ‘끔찍한 흉조’의 겉모습을 빌린 상태.
끔찍한 흉조, 란돌프 말이다.
‘란돌프 님이 어디 계신지 알 것 같다.’
동시에 끔찍한 흉조의 형상이 자신을 어딘가로 부르고 있었다.
아마도 란돌프가 있는 곳으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본능.
‘란돌프 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왜 갑자기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란돌프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니 본능에 따라 움직이면 란돌프를 찾아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망설여졌다.
란돌프를 마주하면, 자신은 소멸된다.
또한 란돌프를 마주한다 하여 과연 진실을 물을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 가자.”
이자벨라는 애써 고개를 털었다.
지금 이 현상이 무엇인지 확인은 해야했으니까.
진실을 묻는 건 그 뒤의 일이다.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지만, 그럼에도 란돌프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자신의 눈으로 반드시 확인은 해보고 싶었다.
이자벨라는 ‘끔찍한 흉조’의 형상이 가고자하는 대로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동굴. 아마도 이 안에 란돌프 님이 계신다.’
벼랑의 중간에 위치한 동굴을 발견했다.
이 안에서 더 강렬하게 란돌프의 자취가 느껴졌다.
이자벨라는 심호흡을 한 뒤,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고치······?”
동굴의 끝에 웬 고치 하나가 있음을 확인했다.
‘란돌프 님.’
이게 란돌프라는 사실도 본 순간 알았다.
순간 이자벨라의 눈빛이 어지러워졌다.
현재 란돌프가 무슨 상황인지 대강 짐작은 갔기 때문이다.
지금 란돌프는 한계를 부수고 있다.
더 나아가고자 육체를 재구성하고 있는 중이다.
허나 이 육체의 재구성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육체가 재구성되는 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란돌프 님. 별빛이 보여준 기억이 정말 사실입니까?”
당연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꽈아악.
이자벨라는 몸을 떨며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분노다.
끓어 넘치는 분노가, 폭발하듯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건 기회였다.
이 오갈 데 없는 분노를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
······ 란돌프를 죽이려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