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신공
이자벨라는 두 문의 앞에 서있었다.
처음 란돌프가 들어간 이후로 계속해서.
“······ 란돌프님.”
그녀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끊임없이 도피하는 삶.
정착하지 못한 채로 이리저리 움직였던 것 같다.
뱀공주가 됐고, 성각자를 도왔으며, 사막여왕이 되었다가, 데르시안 가문에서 데르시안 영애를 연기하고, 이후 팔가 기사단의 견습 기사로 재차 란돌프를 만났다.
란돌프를 만나자,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란돌프님. 저는 별을 좇고 있었습니다.”
하늘에 떠있는 별.
잡을 수 없는 별을 잡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별들 중에 자신의 별이 어딘가에 있으리라 믿었다.
“성각자시여. 나의 주인, 나의 왕이시여.”
이자벨라는 란돌프가 들어간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음같아선 지금이라도 들어가고 싶다.
당장에 들어가서, 란돌프를 돕고 싶었다.
“진정한 제 별은······.”
자신의 진짜 별을 이제는 찾은 기분이었으니까.
진정한 그녀의 별은 처음부터 옆에 있었다.
옆에 있었음에도, 알지 못했다.
아둔하기 그지 없는 일이지 않은가.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다가가면 될까.
아니, 아직은 아니다.
더 강해져야한다.
그에게, 자신의 별에게 짐이 될 순 없으니.
-별을 좇는 자여.
그때였다.
끼이익대는 소리와 함께, 반대쪽 문이 열리며,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림자의 위로는 커다란 눈동자 하나만이 떠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별을 인도하는 자. 성각자이니라.
-별을 지키는 수호자이며, 이 심연을 관장하는 주인이기도 하지.
-너는 너의 왕을 위해, 너를 희생할 수 있나?
각기 다른 목소리들.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한데 뒤섞여 있었다.
“······ 할 수 있다.”
이자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자 그림자가 반대쪽 문을 가리켰다.
란돌프가 들어갔던 문을.
-그렇다면 들어가라. 너의 왕이 승리하려거든 네가 필요한 일이 있을 것이니.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쉽지는 않겠지.
말소리가 동시에 들려온다.
하지만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란돌프가 승리하기 위해선 자신이 필요한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사안이었으니까.
끼이익.
이자벨라는 문을 넘었다.
그러자, 그녀를 지켜보던 그림자가 눈을 감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아, 실로 오랜 기다림이었다.
-모든 것은 오직 그분을 위하여.
-우리의 왕을 위하여.
*
유일황제의 별빛!
내 것이 아닌 다른 별빛의 이름.
가라앉은 황제의 설명과는 달리 내가 보유하지 않았던 히든 특성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진화한 히든 특성, 혹은 고유의 히든 특성은 예외인 듯하군.’
지도상에서 보이는 특별한 별빛은 많지 않다.
그중에서 내게 맞는 것을 찾아야 하는 게임인 모양.
게다가 5성. 별이 다섯 개다.
하나만 착용 가능하다는 조건이지만 능력치가 말이 안 된다.
‘내게 맞는 5성 별빛을 찾을 때까지 착용하고 있어야겠군.’
착용한 별빛은 언제든 해제하여 교체할 수 있다.
별빛의 순서를 바꿀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다.
다만, 일반적인 별빛과 달리 특별한 별빛은 ‘제거’가 불가능한 것 같았다.
【‘손재주의 별빛’을 해제했습니다.】
【‘별의 기억’에 따른 효과(모든 별빛 공, 체+1)가 사라집니다.】
【‘유일황제의 별빛’을 착용했습니다.】
【현재 착용자의 공격력 76, 체력 70】
······ 과연.
특수한 순서의 배열에 따라 얻은 효과가 사라졌다.
그런데도 기존의 공격력과 체력보단 높다.
아직은 5성 별빛의 30에 육박하는 공격력과 체력이 별의 기억보다 더 좋은 것이다.
‘이 게임은 무조건 선공이 유리하다.’
하여 공격력을 올리는 게 먼저다.
손재주의 별빛은 공격력 2와 체력 8을 올려줘, 선제공격을 펼칠 땐 효율이 높지 못했다.
‘그런데 선공과 후공은 무작위로 정해지는 건가?’
여태까지 상대한 두 명은 별빛 자체를 갖고 있지 않았다.
자동 패배처리 되어 선공과 후공의 구분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별빛의 중요성을 깨달은 참가자들이 필사적으로 섬을 탐사하고 다니리라.
선공과 후공의 기준을 밝혀낼 필요가 있었다.
【‘유일황제의 별빛’에 담긴 기억을 살핍니다.】
그때였다.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는 기억들.
곧이어 눈앞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황제를 죽여라!
-폭군 라인하르트를 죽여라!
-미친 황제!
-악마 황제를 죽여!!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화난 군중들과 병사들.
대륙을 통일한 황제의 궁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피의 물결이 이어졌다.
궁 내에 있는 모두가 죽었다.
모든 게 부서지고 파괴되었다.
어린아이 한 명, 개미 새끼 한 마리까지도.
그야말로 아비규환.
인세에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었으니.
-대영웅 말피엘을 따라라!
-말피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
-오오오, 빛의 사자시여!
그 군중들과 병사들의 중심에 한 남자가 있었다.
대영웅 말피엘.
대륙 제일의 소드마스터도, 8서클의 대마법사도 이 남자에게 무참하게 썰렸다.
더 막아서는 자가 없자 그는 홀로 황제 라인하르트 앞에 섰고.
-폭군 라인하르트. 죽어 마땅한 황제여.
-······ 네놈 면상을 보니 더욱 머리가 아프군.
황제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주 신물이 난다는 표정으로.
-무혈입성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다 죽였느냐?
-깨끗한 인간이 이 황궁에 남아있을 리 없으니까.
-허, 칭송받는 대영웅이 할 말은 아닌 듯한데.
-청소가 필요하다. 이 썩어빠진 제국을,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선.
-··· 어차피 내가 죽인 것으로 기록될 테니, 속은 편하겠군.
-역사는 승리자의 편이지.
같은 살육자일진대 누구는 대영웅이 되고, 자신은 폭군이 되었다.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더욱이 우스운 건 대륙을 통일하고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본인의 처지다.
이 세계는 나아진 게 없다.
하나로 만들었으나,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결국, 꿈은 꿈이었나.
‘꿈은 깨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더니.’
대마법사의 말이 맞았다.
깨기 위해 존재하는 게 꿈이라더니, 실로 그렇다.
황제가 비릿하게 미소짓자 말피엘이 웃었다.
-슬프군.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이라는 건.
쿠릉!
콰르르릉!
······ 번개의 폭풍이 몰아닥치며, 회상은 종료되었다.
갑작스러운 기억에 얼떨떨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건 가라앉은 황제의 기억이다.’
지금 내가 본 게 바로 옆에 있는 ‘가라앉은 황제’의 기억이라는 것.
가라앉은 황제조차도 잊고 있는 기억일 가능성이 컸다.
대륙을 통일한 황제, 라인하르트.
그리고 그를 죽인 대영웅 말피엘.
모두 잊고, 잃은 뒤 그는 심연의 끝까지 가라앉았다.
“갑자기 왜 그러느냐?”
“······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작게 고개를 털었다.
지금은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게 있었다.
‘만약 다른 고유의 별빛 모두가 기억을 품고 있다면.’
이 게임의 의도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별의 기억’을 따라가는 게임.
아마도 참가자 대부분이 잊고 있을 기억을 되짚어주려는 게 아닐는지.
아니면 또 다른 비화(祕話) 같은 게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궁금해진다.
‘내 별빛은 어떤 기억을 품고 있을까.’
······영원의 란돌프.
그 고유의 별빛 역시도 이 섬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
탐욕도, 영원군주의 심장도, 하이드루이드의 대자연, 진리의 눈, 마혈종의 신 마저도.
틀림없이 기억을, 이야기를 품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앞으로 나아갈 나의 행적에 중요한 지표가 될 터.
‘더 진지하게 임해야겠군.’
승리해야 할 이유가 늘어났다.
나의 것을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말아야할 이유도 생겼다.
나는 여전히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가라앉은 황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꿈은 꾸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친구여.”
“······? 갑자기 미쳤느냐?”
*
날이 밝자, 가라앉은 황제는 사라졌다.
별의 감옥에 이감되어있던 본체가 풀려난 영향이리라.
인사도 없이 헤어져서 아쉽긴 하지만 개의치는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영원한 아군은 있을 수 없으므로.
그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본체를 만나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겠다고 말이다.
‘덕분에 많은 걸 알았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가라앉은 황제가 옆에서 조언해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헤매고 있었을 터.
나는 동굴의 안에서, 천마도를 쥐었다.
‘··· 탈각(脫却)하고 멸각(滅却)하여 수라를 엿본 자만이 ‘천마신공’을 대성할 수 있다. 하지만 오롯이 순수한 마기(魔氣)를 쌓는 건 인간의 심법(心法)만으로는 불가하며 더욱 본질적인 마(魔)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노라.‘
천마도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벽을 넘어 절대자가 되는 방법에 대해서.
‘천마가 심연의 존재가 된 건 천마신공의 대성을 위해서다.’
인간이어선 안 된다.
인간의 심법으로는 절대자가, 수라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천마는 스스로 심연에 몸을 담갔다.
인간이길 포기했다.
덕분에 탈각하고 멸각하여 수라를 엿보았다.
만약 이 섬의 특수성이 아닌 정면대결이었다면 천마를 이기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욕심이 난다.
나는 탐욕하는 자.
이 또한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어차피 특별한 별빛은 밤에 나온다.
이미 아침에 얻을 수 있는 별빛은 모두 모은 상태.
나는 집중하기 시작했다.
‘천마도는 심법(心法)이다.’
천마도 자체가 심법서이고 무공서였다.
왜 천마의 가장 소중한 게 천마도인지 이제는 절실히 알 것 같다.
지금쯤이면 사력을 다해 나를 찾고 있지 않을까?
그러니 놈이 나를 찾기 전에, 새겨진 심득만큼은 반드시 익히리라.
‘천마신공으로 가는 첫 번째 길은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
자세를 잡은 뒤 눈을 감고 모든 잡념을 지웠다.
물론 진짜로 인간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인간이고, 박현명이며, 란돌프다.
이 세 가지 명제만큼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포기할 필요도 없다.
‘끔찍한 흉조, 어둠을 피우는 자, 그리고 탐욕의 악마.’
그 누구보다도 깊은 어둠을, 마(魔)를 지니고 있는 게 나였으니!
자신하건대 설령 천마라 할지라도 나보다 더 깊은 어둠을 지니진 못했을 것이다.
-미쳤어? 그만둬!
겨울이 다급하게 외쳤다.
내가 뭘 하려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그 칼에 새겨진 계약은 해제시킬 수 없어. 내 힘으로도 역부족이야! 네 힘으로 지배하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고!
안다.
알고 있다.
흉조의 눈을 피우고, 계약을 해제하는 겨울의 힘을 사용하는 건 이 천마도를 지배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잡아먹힐 거야. 그 칼에 새겨진 정신은 함부로 깨워선 안 되는 거라니까! 더럽고 흉물스러운 악신(惡神)을 깨워서 어쩌려는 거야······!
악신. 악신이라.
겨울의 반응도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내 목적은 다르다.
이 섬은, 이 게임은, 기억을 찾는 게 목적이다.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게 기억의 표본이었다.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이곳에서라면, 오직 이곳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유일황제 라인하르트의 기억을 되살핀 것처럼.
······ 그러니 천마도여.
네놈의 기억을 내게 보여봐라.